옛 풍습에 매향(埋香)’이란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은 하늘과 땅의 신을 모시기 위한 의식으로, 향나무를 땅에 묻거나 피우는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과정과 시기, 그리고 관련된 집단이나 사람들을 기록한 돌을 <매향비>라고 한다. 매향비는 다듬은 돌에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커다란 바위에 그대로 기록을 해 놓는 형태도 있다.

 

매향의식은 내세에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기원하며 향을 땅에 묻는데, 매향 의식은 고려 때도 성행하였으나, 그 후 불교에 대한 억제가 강화되던 조선조 초기에 극락정토로 갈 것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우던 비밀 종교행위의 하나이기도 하다. 매향은 주로 민초들이 즐겨했으며, 순수한 민간신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미륵의 세계를 그린 민초들의 염원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로는 13098월에 세운 고성삼일포 매향비를 비롯하여, 13353월에 세운 정주 매향비, 1387년에 세운 사천 매향비, 1405년에 세운 암태도 매향비, 1427년에 세운 해미 매향비 등이 있다.

 

충남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당진안국사지매향암각은 자연석의 거대한 통바위로서 규모는 높이 2.93m, 길이 13.35m, 2.5m이다. 이 매향비를 마을에서는 여러 가지로 부르고 있다. 마치 그 형태가 배 모양 같다 하여 '배바위' 또는 고래모양이라 하여 '고래바위' 또는 베틀에 딸린 북모양이라 하여 '북바위'등으로 불리우며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다.

 

 

충청남도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는 배바위의 암각 명문은, 매향과 관계된 고려말, 조선초의 기록으로서 전국에서 발견된 매향관련 명문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자료라 할 수 있다. 또한 조성시기를 달리하는 2건의 매향자료가 기록되어 있어, 안국사지 및 주변지역의 역사와 매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사라진 안국사, 어떤 절이었을까?

 

백제 때에 창건해 고려 때에 번창한 큰절이었다던 안국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해미현조에 보면 안국산에 안국사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 뒤편에 산을 은봉산 혹은 안국산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한 안국산 안국사는 현재 절터가 남아있는 이곳을 가르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발굴조사 시 발견된 유물 등에서 나타난 명문 등을 보면, 고려 현종10년인 1030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안국사지는 거란의 세 차례 침입 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건립됐음이 석불입상을 보호하던 금당의 명문기와에 의해 밝혀진 천년고찰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중창을 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이 이렇게 중건과 소실, 혹은 폐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긴 시간을 전해진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석불과 석탑 등이 남아 그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역사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야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이리저리 그 소중한 문화재들을 옮겨 다니면 그도 힘들어질까 걱정이 된다.

 

 

당진군은 보물 제100호인 석불의 주변을 정비한 것에 이어, 보물 제101호인 삼층석탑과 매향암각의 주변을 정비하고, 금당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운바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의 복원을 마치게 되면, 과거 안국사의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보호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란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두 개의 전설을 가진 미륵과 암구멍

 

마을에 들어가 이야기를 찾다가 보면, 어떤 때는 참 황당할 때가 있다.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한 마을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에 위치한 백도해수욕장. 이 곳은 여름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는 곳이다. 백도라는 섬은 마을 앞 멀지 않은 동해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바위가 하얀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백도가 이렇게 흰 빛을 띠는 이유는 수많은 새들이 그 섬에 배설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 백도해수욕장은 민박집들이 바다와 가까이 있어 이용하기가 수월하며, 백사장의 길이가 400m 정도에 폭이 50m 가까이 되기 때문에, 바다와 모래밭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미륵이야? 아님 문인석이야?

 

백도해수욕장에서 해안가 도로를 따라 동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철문이 있다. 그 안은 군부대이기 때문에 일몰시간이 되면 이 철문을 닫아버린다. 그 철문을 들어서면 동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 두 기의 석물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석물을 미륵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석물은 어디로 보아도 묘 앞에 세우는 문인석의 모습이다.

 

이 두 기의 석물에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있다. 이 두 기의 석물을 문암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아 , 마을에서 위하고 있다고 한다. 바다를 보고 있는 석물은 아주 오랜 옛날 신라의 영토인 백도에 고구려가 침범을 해, 전투를 하다가 전사를 한 신라의 장군이 한을 품고 죽은 자리에서 바위가 솟았는데 그 바위가 솟은 곳을 미륵동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과 연결이 되는 것이 바로 이 미륵불로 모시고 있는 문인석이다. 예전에 삼척부사의 부친이 사망하여, 묘를 쓰고 앞에 석물을 세우려고 하였단다. 그런데 집 앞을 지나가던 스님 한 분이 고성 문암마을을 찾아가 문인석을 만들면, 가문이 크게 번창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삼척부사는 그 말을 듣고 바로 문암마을로 찾아가, 문인석 2기를 만들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문인석을 다 만든 후에 배에 실어 부친의 묘가 있는 삼척으로 옮기려고만 하면,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몰아쳐 도저히 갖고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삼척부사는 이 문인석을 부친의 묘로 옮기지 못하고 포기를 하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그 문인석은 문암리에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기의 문인석 미륵동의 바위로 만들었을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가 자연히 연결이 된다. 즉 삼척부사의 부탁으로 만든 두 기의 문인석은 바로 신라의 장수가 억울하게 죽은 곳에서 솟아난 미륵동의 바위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지 못해, 옮기려고만 하면 바람을 일으키고 풍랑이 치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문암리를 지키는 두 기의 문인석을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랬을 것이란 생각이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을 들어보면 시대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것은 묘하게 연결이 되어 정리가 된다.

 

이 두 기의 미륵인 문인석이 일제강점기에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지고 말았단다. 마을에서는 6,25 한국동란 후에 다방면으로 고생을 하다가 하나를 찾아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파도에 의해 바닷가 모래밭에서 찾아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미륵불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제 때 수많은 문화재들이 일본으로 수탈을 당했기 때문에, 문암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 미륵불이 스스로 몸을 감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구멍들은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22일에 찾아간 문암리. 미륵불 앞에는 누가 치성이라도 드린 듯, 북어와 떡이 보인다. 치성을 마치고 이곳에 두고 간듯하다. 문암리 두 기의 미륵물이 서 있는 옆, 바닷가에 서 있는 바위들도 묘하게 미륵이 서 있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면 문암리라는 이곳은 온통 미륵불 투성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미륵동이라고 했던 것일까?

 

그곳을 지나쳐 양편에 바위가 서 있는 곳을 지나 백도항 쪽으로 나가면 등대가 보인다. 그 좌측 바위를 보면, 누구나 그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고 싶다. 온통 크고 작은 구멍들로 바위가 요란스럽다. 어찌 저렇게 생긴 것일까? 그런데 이 문암리에는 암서낭에 남근을 깎아 바치는 제의가 정월 초사흘에 있다고 했다.

 

 

남근을 닮은 미륵과 암구멍이라는 무수한 바위들. 참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다. 음양학으로 생각해도 문암리라는 곳이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다. 예전에 이곳의 이름이 만호가 살 터전이라고 해서 만호리라고 했다던가? 언제 시간이 나면 정초에 치러진다는 문암리 서낭제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것만 같다. 일몰 시간이 가까워 발길을 돌리면서도, 그 희한한 바위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은 무엇 때문이지?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를 들어가다가 그 입구에 보면 좌측에 작은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얼핏 보기에도 꽤 오래됨직한 이 전각 안에는 돌미륵이 한 기 서 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천지가 개벽할 당시부터 있었다고 한다. 천지개벽이란 말에 조금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금산사의 개산대제를 보기 위해 들어가는 길에 미륵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침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다년 간 듯, 여러 개의 촛불들이 커져있다. 그리고 지나는 행인 한 사람이 절을 하더니 돌미륵에 손을 대고 한참이나 기도를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상당히 효험을 보았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금산사 입구에 있는 할머니당과 안에 모셔진 돌미륵입상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였지’

마을에 사시는 분들에게 미륵당에 대해 물어보아도 잘 모르시겠다는 이야기다. 하기에 이곳이 상업지역이 되다보니 외지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기 때문인가 보다. 올해 연세가 79세가 되셨다는 토착민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미륵당을 마을에서는 무엇이라고 부르세요?”
“그냥 돌할머니라고 불러”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세요?”
“잘 모르지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고, 그 이전 할아버지 때도 보았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 묵은 것은 알지”
“그런데 왜 할머니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저 할머니가 뱃사공이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 같은데. 뱃사공이 바다에 나가서 죽었는데, 그 넋이 저 돌이라는 거지”
“할머니가 뱃사공 노릇을 했나요?”
“나도 그것이 이상해. 남자도 아닌 여자가 뱃사공을 했다는 것이. 그래도 어른들이 그렇게 불렀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그냥 흘러 온 이야기로 할머니이고, 예전에 뱃사공이었다는 것이다. 금산리 금산마을은 얼마 전까지도 땅을 파면 땅속에서 배가 썩은 나무 조각들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이 바다였기 때문이란다.

“돌미륵이 정말 영험합니다.”

한 칸으로 마련된 전각의 창호로 안에 켜놓은 촛불의 불빛이 흘러나온다. 문을 열고 보니 한 분이 열심히 절을 하고 난 후, 미륵에 손을 대고 기도를 하고 있다. 사진을 찍기도 죄스러워 한참이나 기다리고 있다가 물어보았다.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아닙니다. 저는 처음인데요. 소문을 들어보면 이 돌할머니가 상당히 영험하다고 해서요”
“무엇을 빌고 계시던데...”
“예, 아픈 사람이 있어서 얼른 낫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미숙한 솜씨를 보이고 있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가 1m 80cm 정도 되는 돌미륵의 머리는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목 부분에 새로 얻은 머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시멘으로 발라놓은 흔적이 있다. 오른 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렸다. 법의는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께서부터 주름이 잡혀있다. 그러나 왼손으로 옷을 잡아 올린 듯, 허리 아래쪽에서는 주름이 -자로 표현이 되었다.

아래는 바닥에 시멘으로 발라놓아 자세히 알 수가 없어, 발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전체적인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생김새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빌고 갔으면, 그것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었을 텐데.

석불입상 앞에 켜 놓은 촛불. 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있다.

많은 곳에 마을에서 섬기는 미륵이 있다. 미륵골, 미륵당, 부처울, 부처골 등의 지명이 있는 곳이 바로 돌미륵들이 서 있었던 곳이다. 후천세계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상향이라는 돌미륵. 어쩌면 금산마을의 미륵 역시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표현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타고 있는 수많은 촛불들이 있어 마음 한편이 따스해 지는 것도, 나 역시 이상향을 기다리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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