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목천IC 나들목을 나서 병천 방향으로 약 4km쯤 가게 되면 상량골 마을이 나온다. 기술대연구소 옆으로 난 좁은 도로를 따라 북동쪽으로 들어가면 은지리 은석골을 만난다. 첩첩산중이라고 해야 맞을 듯한 산위로 향하는 이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은석골에서 거리를 둔 은석산의 남쪽계곡에 은석사가 자리하고 있다.

 

은석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이 은석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은석사와 동일한 사찰로 추정되며, 현재의 절은 와편 및 초석 등으로 볼 때 1530년 이전에 건립된 절로 보인다. 414일 이 은석사에서 9회 은석사 진달래 화전축제를 연다고 해서 구불구불 산길을 돌아 찾아갔다.

 

 

단출한 은석사에 손님들이 찾아들어

 

은석사를 찾아가는 초행길은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을 여기저기 돌아 찾아가니 주차장이란 작은 푯말이 붙은 곳에는 수십 대의 차량들로 들어차 있고, 여기저기 차를 세울만한 곳에는 모두 차들이 들어차 있다. 이곳은 은석산을 산행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잔칫집답게 사람들이 모여 전이며 화전을 들고 있다.

 

절은 의외로 단출하다. 비구니 스님 두 분이 거주하고 계시다는 은석사는, 본전인 보광전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9호인 <천안 은석사 목조여래좌상(天安 銀石寺 木造如來坐像)>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2호인 <천안 은석사 아미타극락도(天安 銀石寺 阿彌陀極樂圖> 등 두 점의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조형한 목조여래좌상

 

목조여래좌상은 은석사 보광전에 모셔진 조선조 후기의 목조불상이다.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135cm, 어깨 폭 27.6cm로 불상의 얼굴은 방형이다. 불신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나 좁은 어깨와 넓은 무릎 폭으로 인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두 귀는 크고 목은 짧은 편이다. 짧은 목에 삼도가 뚜렷하다.

 

여래좌상의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을 하였고, 별개로 만든 왼손은 발 위에 놓아 중지와 약지를 구부렸다. 오른쪽에 어깨위로 둥글게 걸친 변형 우견편단식 법의와 옷주름은 단조롭게 표현하였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여래좌상은, 허리를 곧추세운 채 굽어보는 듯한 자세와 단정한 이목구비,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신체 묘사 등이 특징이다.

 

 

목조여래좌상의 후불탱화인 아미타극락도

 

원래 은석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이 은석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지 못한다. 조선 영종 때의 암행어사 박문수 묘가 절의 위편에 자리하고 있어, 은석사에서 이 묘를 지키는 일도 함께 맡아했다고 한다.

 

목조여래좌상 뒤편에 걸린 후불탱화인 아미타극락도는 가로 185cm, 세로 145cm로 견본채색(絹本彩色)을 사용하였다. 이 아미타극락도는 부분적으로 변색되어있고, 군데군데 훼손이 심한상태이다. 하단부 좌우에 화기(畵記)가 남아있어, 함풍 11, 즉 철종 12년인 1861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이 후불탱화는 여래좌상의 후불탱화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화기에 적힌 것을 보면 태화산 마곡사 부용암에 봉안되었던 것을 옮겨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원의 이름 등은 훼손이 심해 알 수가 없다.

 

 

봄날 찾아간 은석산 은석사. 이날 진달래화전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짜장스님이 이곳에서 350명에게 스님짜장 봉사를 했다. 스님짜장을 맛보기 위해 길게 줄이 늘어진 것을 보고, 짜장스님의 인기는 갈수록 더해만 간다는 생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조성한 보광전과 삼성각, 그리고 두어 동의 요사 등이 있는 은석사의 봄은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불로 추정되는 석불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 경내 한편에 눈에 발목이 묻혀있는 석불 한기가 보인다. 날이 추워서인가 박물관을 찾아오는 발길도 뜸한 듯하다. 이런 추운 날 밖에서 저리 서 있다면, 더 춥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석불입상이지만, 가만히 살펴보다가 괜히 웃고 만다.

 

석불입상을 보고 웃은 이유는 그 모습이 균형미를 잃어서가 아니다. 그 추운 날 만난 석불입상의 입가에 흘린 엷은 웃음 때문이다. 돌이다가 어떻게 저리도 따듯한 미소를 표현할 수 있었는지. 그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웃음 하나가 세상 온갖 고통을 한꺼번에 녹여버릴 듯하다.

 

천왕사 터 부근에서 발견되다

 

현재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지10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조여래입상은, 1933년 부여군 부여읍 금성산의 천왕사 터라고 전해지는 곳의 인근에서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석조여래입상은 고려시대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이 거대석불 인 점을 감안하면, 이 석불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 석불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크다. 전체적인 모습은 굴곡이 없이 일직선의 신체로 표현을 하였다. 어깨와 하체가 일직선으로 곧게 서 있는 모습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살이 올라 풍부한 느낌을 준다. 반쯤 감은 눈과 입술 등의 윤곽이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밋밋한 장식의 표현

 

어깨에서부터 흘러내린 법의는 아무런 무늬가 없이 발밑까지 내려져 있다. 법의는 가슴께까지 깊게 파여져 있으며, 어깨부터 팔을 따라 주름으로 표현을 하였다. 이렇게 표현한 주름이 이 석불입상에서 가장 표현을 강하게 한 부분이다. 두 손은 가슴께로 올렸으며, 그 아래ㅔ로 법의가 U자의 주름으로 발목까지 내려가고 있다.

 

 

손은 투박하고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전체적인 비례가 맞지 않는 이유도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큰 머리와 손 때문으로 보인다. 왼손은 위로 올려 손바닥이 밖을 향하게 하였고,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트려 손바닥이 보이게 하였다. 손가락의 표현도 어디인가 멋스럽지 못하다.

 

충청도 일원에서 보이는 고려불의 특징

 

이러한 모습은 충청도 일원에서 발견이 된 고려불의 특징이다. 중앙의 장인들이 아닌,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성이 된 석조여래입상으로 보인다.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석불의 특징은 거대불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실내에 서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래 기단부가 눈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음이 아쉽다. 봄철 눈이 녹으면 다시 한 번 찾아가 받침돌을 확인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균형미는 떨어지는 석불입상이지만, 그 편안한 미소에서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런 위로 덕분에 이 추운 날에도 길을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주변이 다섯 그루의 괴목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이름을 ‘오괴(五槐)’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인지. 주변으로는 잎을 다 떨군 오래 묵은 괴목들이 서 있다. 그저 지금은 그리 절경도 아니고, 아름다운 정자도 아니다. 하지만 이 정자는 처음에 이곳에 정자를 이룩한 이후 벌써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전북 임신군 삼계면 삼은리에 있는 오괴정(五槐亭)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오괴정은 조선조 명종즉위년인 1545년에 처음으로 오양손이 지었다. 그 후 후손들이 1922년에 고쳐지었다.

 

 

사화를 피해 낙향한 오양손

 

전국 이곳저곳을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게 되는 수많은 정자들. 그 정자 하나같이 사연이 없는 정자는 없다. 모두 다 그럴만한 사연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정자 하나가 다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 정자를 짓는 사람들이나, 어느 누구를 생각해 후에 정자를 짓기도 한다.

 

오괴정 또한 그럴만 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해주 오씨로 처음 삼계리에 들어온 오양손은 김굉필의 문인으로 참봉을 지냈다. 오양손은 중종 14년인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 많은 문인들이 화를 입는 모습을 보고, 경기도 수원과 남원 목기촌으로 은거하였다가, 중종 16년인 1521년에 삼은리로 들어왔다.

 

후학을 가르치고 술과 시로 벗을 삼아

 

삼은리로 낙향한 오양손은 이곳에 오괴정을 짓고, 시와 술을 벗 삼으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오괴란 다섯 그루의 괴목을 심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괴정은 보기에도 고풍스럽다, 정자 주변에는 커다란 괴목들이 있어, 이 정자의 예스러움을 더욱 느끼게 해준다. 또한 정자 벽에 걸려있는 게판들은 칠이 벗겨져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정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전라북도 지역의 정자들이 다 그러하 듯, 오괴정 역시 정자 가운데는 방을 두어 운치를 더했다. 이 지역의 정자들은 대개가 이렇게 한 칸의 작은 방을 들였다. 아마도 정자와 집을 따로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오르면 앞으로 흐르는 작은 내와 펼쳐진 밭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경은 아니라고 해도, 주변 괴목이 우거지면 한 폭의 그림과 같을 것이다. 오양손은 이곳에서 술과 시를 벗 삼고,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마 권력의 회오리 틈에서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마음 편하게 일생을 자연과 더불어 살았나보다.

 

 

세월은 흘러도 주인의 이야기는 남는 법

 

세월의 무상함은 마음을 비워버린 정자 주인을 읽고, 봄날 스쳐가는 바람만 괴목가지를 흔들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유난히 정자를 좋아한 것도, 알고 보면 먼 훗날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정자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을 보면, 그 정자를 지은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저 절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지어진 정자도 아니다. 오양손이라는 인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양손은 중종이 경연을 별설하여 그와 더불어 강론을 할 정도로 문장덕행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양손의 자는 계선, 호는 둔암이다. 한양에서 출생하여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사재 김정국과 동문수학하였다. 일생동안 경의를 논하고 성리학에 참잡했다. 사림파간에도 그의 문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으며, 조정에도 그의 실력이 알려져 순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정자 하나가 아름답다는 것만으로도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 정자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이 있기에 찾아가는 것이다. 정자의 아름다움만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그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오늘도 길가에 오롯이 서 있는 작은 정자 하나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그 정자에 얽힌 사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