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 7번지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2호인 ‘용인목신리석조여래입상(龍仁木新里石造如來立像)’. 이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은 용인시 원삼면 목신리에 있는 화강암으로 만든 여래입상이다. 입상의 하반신이 땅에 묻혀 있을 뿐만 아니라, 마멸이 심해 정확한 원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에는 넓고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솟아 있으며, 얼굴은 마멸이 심해 원형을 알 수 없지만 본래는 원만한 인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워낙 마멸이 심해 처음 조성했을 당시 형태는 아예 추정하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이러한 문화재들은 전국을 다니면서 답사를 하면서 수도 없이 만날 수가 있다.

 

고려시대 이전의 석조불상으로 추정해

 

이 목신리 석조여래입상의 법의는 통견으로 양 어깨에 두껍게 걸치고 있는 형태이다. 어깨 부분에서 굵은 옷 주름이 보이고, 가슴에는 U자형의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에서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맞댄 형태이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는 시무외여원인의 모습이다.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전체적인 석조여래입상의 형태로 보면, 옷 주름이나 신체 표현에서 유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고식적인 법의의 형태인 통견이나 손의 형태가 시무외여원인을 결한 것으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은 제작시기가 고려시대 이전으로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소중한 문화재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간수해야

 

찬찬히 살펴보아야만 그 형태를 그나마 추정이라도 알 수 있는 목신리 석조여래입상.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어, 제대로 된 모습을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눈과 코는 식별이 불가능하지만, 목까지 길게 내려온 귀나 도톰한 입술 등으로 볼 때 상당히 인자한 표정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손과 발, 주름 등도 확연히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게 파인 옷 주름 등으로 볼 때, 조성 당시에는 꽤나 걸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비바람, 혹은 막무가내 식인 훼손에 의해서 사라졌다. 자신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문화재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언잰가 전라남도 구례군에서 문화재 답사를 하고 있을 때, 어린 학생에게서 참으로 충격적인 발언을 들었다. 구례 화엄사에의 문화재를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항생 하나가 말을 건넨다.

 

“선생님 이 문화재는 언제 적 거예요?”

"신라시대에 연기조사가 조성을 했다고 전해지지“

 

낯 뜨거운 일화,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있는 ‘효대’를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사자 삼층석탑이 있는 곳을 효대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한 연기조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으로 인해 효를 상징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국보 제35호인 이 사사자 삼층석탑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조성한 것으로, 탑 안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72과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신라 때 문화재도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있는데, 왜 조선시대에 조상한 불상이나 탑들을 보면 다 부수어지고, 심지어는 머리가 없는 불상들이 그렇게 많아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문화국민이라고 말로는 떠들면서 정말 무책임한 어른들이네요.”

 

중학생 정도인 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성인이라면 역사적인 사건이나 종교적 이야기 등, 할 말이 많았겠지만 이 어른 아이에게 무슨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얼굴만 벌게진 채 말을 이을 수가 없다. 그때처럼 낯 뜨거운 일은 없었던 듯하다.

 

하기야 백번 천번 그 아이의 말이 맞다. 우리는 우리 것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말로는 문화민족이라고 참 쉽게도 표현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화민족이라는 것일까? 담당자가, 국민이, 그리도 책임 있게 보존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 소중한 문화재를 올바로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그 뒤로 정말 최선을 다해 문화재를 답사하고, 글을 썼다. 그 이상은 부끄러운 선대로 아이들에게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후손들에게 모두 부끄러운 조상들이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 51에 소재한 용화사. 그 경내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41호인 ‘이천자석리석불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천시 설성면 자석리의 남쪽 산기슭에 위치한 용화사 경내 노천에 자리하고 있는 이 석불입상이 자리한 곳은, 예로부터 미륵당이라고 전해진다.

 

전체 2개의 돌로 이루어진 이 석불은 머리에 원형의 넓은 갓인 개석을 쓰고 있으며, 긴 타원형의 얼굴에는 이마 중앙에 백호가 표현되었다. 양눈썹과 는, 돌출된 코와 입이 작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옷주름은 양 손의 표현과 더불어, 마멸이 심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렵다.

 

용화사의 주존불

 

이 불상은 얼굴과 더불어 짧은 목, 몸체에 비해 좁은 어깨와 간결하게 처리가 된 옷주름 등을 볼 때 고려 후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용화사(龍華寺) 경내에 주존불로 노천에 봉안되어 있는 이 석불입상은, 높직한 석축을 쌓고 그 중앙에 석불을 모시고 있다. 뒷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이 평평하게 조성을 하였다.

 

 

기단이 이 석불입상을 조성할 때 있던 것이 아니다.  새로 조성을 한 것이다. 가슴 아래에 커다란 하나의 동과, 가슴 위 부분과 얼굴이 하나의 돌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모든 것이 간략하게 처리가 되어있다. 이는 고려 말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시의 경우 이러한 석불과 마애불 등이 딴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장의 번영을 위해 세웠다고?

 

일설에는 고려 현종 9年인 1018年, 장호원읍 선읍리에 감무를 두어 그 아문을 설치하였을 때 시장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건립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납득하기가 어렵다. 대개 시장이나 마을의 안녕 등을 위한 것이었다면 석장승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석리는 본래 음죽군 근북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새롭게 조성된 지역이다. 여주군 소개면의 흑석동 일부와 가서면의 자은동 일부를 병합하여, 자은과 흑석의 일부를 따서 자석리라 하였으며, 설성면에 편입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석불입상을 시장의 번영을 위해 조성했다는 것은, 타당하지가 않다.

 

화강암의 두 개의 석재를 이용하여 조성을 한 용화사 석불입상. 일반적으로 석불의 경우 몸에 팔을 조각하는 것이 통례인데 비해, 이 석불입상은 그저 통으로 두 개의 돌을 포개놓고 얼굴의 형상을 조각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팔은 찾아볼 수 없고, 균형은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많은 석불을 만나보았지만, 그 중에 가장 약식화 된 석불입상이었다는 생각이다. 한창 더위가 기승을 떨 때 찾아갔던 용화사 자석리 석불입상. 올 가을이 짙을 때 이곳을 다시찾아, 가을의 풍취와 어울리는 또 다른 모습이 보고 싶다.

석탑은 대개 3층 석탑, 혹은 5층석탑 등 그 층수를 앞에 붙인다. 하지만 전북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6에 소재한 금당사의 경내에 있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2호인 금당사 석탑은 그냥 앞에 층수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있는 부재들로 보아, 처음에는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석탑의 기단부는 가운데돌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형태로 남아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꼭대기에 놓인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탑으로, 제작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호국, 항일의 절 금당사

 

삼국유사 제3권 홍법조에 보면 금당사는 신라 때 처음으로 창건된 절로 전해진다. 무상, 금취 화상이 서기 650(백제 의자왕 10)에 마이산(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 조선개국 후에는 속금산이라 불렸다)에 열반종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금당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이 절이 상당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이 금당사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이곳 도장굴에서 100일 기도 후,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아 조선을 개국하였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을 혈암사라고 적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의 주둔지로, 승병이 패퇴함에 따라 절이 전소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전봉준의 딸이 이곳 고금당에서 10여 년간 숨어 지냈으며, 1906년 윤 4월에는 호남최초의 항일의병 경사체이기도 한 장의동맹이 이곳을 진앙지로 삼았다고 한다.

 

금당사에는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 괘불탱이 전해지고 있다. 이 괘불탱은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제작한 것으로 높이 약 9m에 넓이 약 5m 정도이다. 한국의 괘불탱 중에는 유일하게 화관에 4마리의 봉황이 그려진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고 있다. 이 외에도 전북 지방문화재 제18호인 금당사 목불좌상이 있다.

 

 

연못 가운데 서 있는 석탑

 

이 석탑은 당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작은 형태의 석탑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석탑이 크게 파손이 되었다. 기단부도 사라져 현재는 원래의 석탑에 사용한 부재가 아닌, 딴 돌을 이용해 채워놓았다. 조선조 숙종 때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 고쳐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금당사 석탑은, 구조나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덮개돌의 밑받침은 3층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추녀는 밋밋하게 꾸며졌다. 탑의 몸돌에도 특별한 조각이 없이, 사각형의 탑신으로 올려놓은 형태이다.

 

한 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의병들의 거점으로, 승병을 키우는 곳으로,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개국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금당사. 그 대웅조번 앞쪽에 오롯이 서 있는 금당사 석탑, 그 석탑은 금당사의 역사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무더운 날 찾아간 금당사에서 만난 석탑 한기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충청남도 부여군 내산면 저동리 계향산 산33-5에 소재한 미암사에는. 거대 와불과 함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71호인 부여 저동리 쌀바위가 소재한다. 쌀 바위는 산중턱에 있는 높이 30m의 거대한 자연석 바위를 말하는 것으로, 암반의 표면이 하얗다. 이 쌀바위가 있어 절 이름도 미암사(米巖寺)로 부른 듯하다.

 

미암사를 들린 것이 벌써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많이 변해 있겠지만, 그 당시 쌀바위 보다도 절 경내에 누워있는 와불에 더 놀랐다. 얼마나 와불이 컸으면, 그 좌대 아래에 법당을 조성할 수 있었을까?

 

 

세계최대 와불을 조성한 미암사

 

와불은 흔히 열반상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열반을 하실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화신불 8불 중에 하나인 와불은 부처님이 입멸하는 상이기도 하다. 부처님이 80년간 중생을 교화하고 인연이 다하여, 중인도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에서 하루 낮 하루 밤을 대열반경의 설법을 마치셨다.

 

대열반경을 마치신 후 머리는 북쪽으로 얼굴은 서쪽으로 향하고,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입멸을 하셨다. 미암사의 와불은 그 형상을 표현한 것으로 길이 27m에 높이 6m, 6m나 되는 거대 와불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바닥에는 전륜과 음자 1만 팔천여자를 새겼다고 하는데, 이 와불을 조성하는 동안 동지섣달인데도 개나리꽃들이 노랗게 피어있었다고 한다.

 

 

쌀바위에 얽힌 전설

 

백제의 역사와 함께 유원한 내력을 지닌 미암사쌀바위는 많은 전설과 일화를 가지고 있다. 일명 음겨석, 촛대바위, 부처바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그 형태를 비유하여 붙여진 듯하다. 미암사 경내에 높다랗게 솟아있는 쌀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에 한 노파가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하여, 절에 찾아와 식음을 잊고 불공을 드렸다. 오직 손자가 잘 되기만을 바란 노파가 지성으로 불공을 드리고 있자니, 비몽사몽간에 관세음보살이 현몽을 하였다. 관세음보살은 노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호리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어 바위에 심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이 바위에서 하루에 세끼 먹을 쌀이 나올 것이니, 아침과 점심, 저녁을 지을 때 이 쌀을 가져다 짓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노파서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바위에서 쌀이 나오고, 그 쌀로 밥을 지어 손자에게 먹일 수 있어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욕심 많은 노파가 더 많은 쌀을 얻기 위해 부지깽이로 구멍을 후벼 팠더니, 쌀은 나오지 않고 핏물이 흘러 주변이 핏빛으로 물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은 전국에 산재해 나타나는 쌀바위의 전설과 공통적인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그 행위를 한 인물이 다를 뿐이다. 금강산 화암사 입구에 있는 높다랗게 솟은 봉우리를 쌀바위라 하는데, 이곳에도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미암사는 노파가, 화암사는 스님이란 존재가 다를 뿐이다.

 

이러한 쌀바위에 대한 전설은 인간의 욕심에 대해 경계를 하라고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하고, 온전한 생활을 하라는 쌀바위의 전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가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기야 내가 문화재 담당자가 아니니, 그런 소릴 들었다고 무엇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일이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소중한 가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실실 울화가 치밀 때도 있다. 막무가내로 돌덩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열을 올리는 사람들 때문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 681번지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인 장남리 삼층석탑이 소재한다. 인제에서 홍천으로 오다가 보면 군계를 벗어난 고개에서 조금 내려와, 삼층석탑의 사진을 곁들인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안내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장남리 삼층석탑. 그러나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아서 겨우 만날 수가 있었다.

 

 

그 땅 꼭 그렇게 차지하고 있어야 하나요?”

 

장남리로 들어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물어본다. 어디로 이렇게 가면 있다는 삼층석탑. 길에서 보인다고 하는데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몇 번을 그 앞으로 지나쳤으면서도 볼 수가 없었다. 탑은 작고 그 앞에 나무 한 그루가 풍성하니 탑을 막고 있어, 길에서 보인다는 탑은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탑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한 사람이 곁으로 와 이야기를 한다.

 

저 탑을 치울 수 없어요?”

탑을 치우다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탑이냐고 어디 탑 같지도 않은데 땅만 잔뜩 차지하고 있잖아요.”

, 그래도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니까요

그래도 꼭 그렇게 넓은 땅을 사용도 못하게 만들어야만 하나요?”

아마도 이곳이 옛날 절터라 보존을 해야 하나 보네요. 그리고 문화재는 보물이 되었건, 이렇게 작고 볼품없는 탑이 되었건 다 소중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 보호철책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면서도 영 기분이 찝찝하다. 물론 땅 주인이야 문화재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땅을 넓게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나 그래도 문화재야

 

전국을 다니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된 수많은 석탑들을 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로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은 것들도 보았다. 그런가하면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도, 이런 문화재도 있구나 할 정도로 초라한 것들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문화재는 다 그 나름대로 그 시대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남리 삼층석탑은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탑의 각 부재들을 수습하여 쌓아 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탑의 높이는 전체가 1.3m 정도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맨땅 위에 막돌과 기다란 돌 2개를 깔아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아래층 기단, 위층 기단, 탑신의 1층 몸돌과 지붕돌 3개를 차례로 올려놓았다.

 

기단부 이하의 석재들도 제짝이 맞지를 않아 정리가 되어있지 않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2개씩의 안상을 새겼으며, 일층 몸돌에는 양편에 양우주를 조각하였다. 두툼한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위로 치켜져 올라갔으며, 지붕돌의 밑면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다. 고려시대 후기 석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장남리 삼층석탑. 비록 특별한 것도 없고, 제대로 부재가 맞지를 않아 볼품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그래도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석탑이다.

 

 

문화재를 답사할 때마다 종종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런 문화재라고 하여서 푸대접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장남리 삼층석탑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고, 넓은 대지에 보호철책을 만들어 놓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제대로의 대접을 받으려는지.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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