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냥 공원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공존을 하고 있다. 이런 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참 즐거운 일이다. 15일 일찍 오산을 찾았다.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보고 난 후 오산시 금암동 산 53번지 일대에 조성한 오산금암리 지석묘군을 찾아보았다.

 

이 고인돌이 있는 금암동 일대는 주변에 여기저기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앞으로는 시원한 도로가 뚫려있지만, 아파트까지 인 듯 길이 막혀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고인돌 공원이라고 명명한 공원은 주변정리가 잘 되어있어, 누구나 돌아보기 좋게 조성을 하였다.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이곳을 나와 한 바퀴 돌아보고 갑니다. 공기도 좋고 아이에게 잘 모르는 것이지만 자료를 보고라도 설명을 해 줄 수가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기도 하죠. 우선은 역사적인 곳이 마을에 있다는 것도 즐겁고요.”

뒤편 휴먼시아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는 이아무개(, 38)씨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걷다가 하는 말이다.

 

 

개석식 고인돌 9기가 널린 곳

 

경기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금암리지석묘군은 전형적인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의 형태인 고인돌은 좌우에 길고 넓은 받침돌을 세우고 앞뒤로 조금 좁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평평한 덮개돌을 얹는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후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이 있다.

 

오산시 금암동에 위치한 9기의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이다. 땅 위로는 커다란 바위만 노출이 되어있어 흔히 개석식 고인돌이라 부른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땅 위에 드러나 있지만 하부구조는 흙속에 묻혀 있어 자세하게 알 수 없다. 금암리 고인돌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은 덮개돌의 길이가 6m 정도이다.

 

 

이곳에 있는 고인돌 중 제2호 고인돌의 덮개돌의 윗면에 성혈이 있다고 한다. 성혈이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민족의 신앙적인 형태의 하나로 전해진 것이며, 돌에 돌을 이용해 구멍을 파는 것이다. 금암리 고인돌 2호에 파인 성혈은 파인 모양으로 보아 쇠붙이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고 한다. 성혈은 풍년을 빌거나 기자속(祈子俗)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한 고인돌공원

 

고인돌을 촬영하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낮은 목책으로 경계를 구분해 놓아 밖에서만 촬영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개석식 고인돌이라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제대로 촬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작 외형만 촬영을 할 것을 안으로 들어가 공원은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요즈음 사람들을 그저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이런 공원을 와도 카메라 하나를 둘러메고 안으로 들어가 무슨 큰일이나 치르는 양 덮개돌 주변을 왔다갔다 하면서 사진을 찍어대는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꼭 저렇게 촬영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3년 전인가 이곳을 왔을 때는 모두 11기의 고인돌과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는 덮개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돌아보니 9기의 고인돌이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잘 꾸며진 산책로와 여기저기 만들어진 정자, 그리고 수로와 시 한편을 읽을 수 있도록 꾸며놓은 경관 등 참 좋은 공원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와 문화가 공존하는 오산 금암동 고인돌공원. 이렇게 아이들과 함께 배울 수 있는 공원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이 공원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지석묘군을 돌아보다가 만난 할아버지바위와 할머니바위, 혹 이 바위로 인해 금암리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뒤돌아서면서 초가을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오마이뉴스)

 

향교와 서원, 모두 예전 교육기관이다. 개인이 운영을 하는 교육기관이냐, 아니면 국가에서 하는 기관이냐의 차이라고 보면 간단하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으로 유교문화 위에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이다. 당시 국가가 유교문화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교육기관인 향교는 지방의 수령이 책임을 맡았으며 중앙의 재정적 지원도 받았다.

 

이와는 달리 서원은 조선 시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거나,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하던 곳이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의 명칭으로, 서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지역에서 선비들이 자의적인 모임을 이어가기 위해 구성원들을 모아 꾸려나가던 곳이다.

 

 

서원은 지방사림세역의 구심점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중앙에 있는 성균관과 사부학당, 그리고 지방의 향교를 중심으로 한 관학이 교육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고려 말부터 대두하기 시작한 소규모 서재의 사학도 인정되었으며 국가에서 그러한 사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중종 38년인 1543년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웠다.

 

우리나라의 서원은 16세기 후반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서원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존재하던 서재의 전통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재의 성격이 단순히 유자의 안거강학의 장소였던 데 반해, 서원은 안거강학의 기능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가지고 있었다. 서원은 지방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 정치세력의 제지 기반으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모처럼 대성전 문을 개방한 수원향교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07-9 (교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호인 수원 항교. 향교는 일년 중 춘추에 벌어지는 석전제 등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성전의 문을 개방하지 않는다. 대개의 향교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성으로 되어있는 향교는 명륜당 앞 외삼문과, 명륜당 뒤 대성전으로 오르는 내삼문이 있다.

 

향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하여, 신위를 모시고 있는 41018현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치루는 일 이외는 대성전을 거의 개방하지 않는다. 그런 수원 향교가 모처럼 향교를 개방해 일반인들도 대성전 등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수원 향교는 원래 화성군 봉담면 와우리에 있었다. 정조 19년인 1795년경 정조의 명에 의해 현 위치로 옮겨 세우고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원 향교 역시 앞쪽으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편으로 계단위로 올라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둔 전학후묘의 배치를 하였다.

 

 

향교의 기본 형식을 충실히 따른 수원 향교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학의 공간인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당은 정면 5, 측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정면 가운데 3칸은 문을 달았으며 양쪽 2칸은 막혀 있다. 양편의 두 칸이 막힌 것은 이 곳은 온돌방으로 마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명륜당 뒤편 좌우측으로는 동재와 서재가 마련되어 있다.

 

명륜당 뒤편에 높게 계단을 놓고 그 위에 내삼문이 마련되어 있다. 모두 세 칸으로 된 삼문은 대성전에 출입을 할 때는 우측 문으로 들어가고, 대성전에서 제향을 마치고 나올 때는 좌측 문을 이용한다. 수원 행교 대성전은 정면 5, 측면 3칸 규모이다. 좌우에 마련한 동무와 서무는 정면 3, 측면 2칸 규모로, 공자와 그의 제자 등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모처럼 문을 개방해 돌아볼 수 있었던 수원 향교.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하지만 우리 지역의 문화재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에 소재한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용주사천보루 (龍珠寺天保樓)’.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정조 14년인1790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창건하여 고려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용주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그 전각의 배치나 규모 등이 다르다. 이것은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원찰로 지어졌기 때문에, 사찰로사의 모습보다는 궁의 한 면을 옮겨놓은 듯한 형태로 꾸몄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기에 용주사는 절의 입구인 출입문도 일반적인 문이 아닌 삼문으로 조성하였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인 1790년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천보루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새 날개 모양으로 짜 맞춘 익공 양식이다. 천보루의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의 쾌성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 영은사의 팔정스님이 단청을 하였다.

 

석조기둥으로 받친 천보루

 

천보루는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동편의 나유타실과 서편의 만수리실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좌우의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이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용주사가 딴 사찰과는 다른 점이다.

 

이렇게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석주는, 용주사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준다.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회랑과 자연스럽게 연결해

 

천보루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다. 바로 동쪽에 나유타료(那由陀寮)’와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이러한 구조는 용주사의 창건당시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인데, 천보루는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중앙의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천보루와 연결이 되어있는 회랑인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그대로 받아 조성한 것이다. 특이하게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대웅보전에서 바라보면 차우 김찬균의 글씨로 쓴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조의 마음이 담긴 홍제루에서 배워라

 

밖에서 보면 천보루요, 안에서 보면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 진 것이다. 이 누각은 원래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홍제루란 이름을 붙인 것은 바로 정조의 호인 백성을 사랑하는 홍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의 호인 홍제는 <논어>에 나오는 士不可以不弘毅에서 따온 것으로, 넓고 큰마음과 굳센 의지를 뜻한다.

 

 

용주사를 다녀온 지는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하지만 오늘 새롭게 이 천보루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세월호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로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실종자들을 향해 거북한 소리를 해대는 모자라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천보루를 지나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뭇 낮아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 땅의 모든 높은 자리라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이 용주사를 찾아 홍제루를 지나면서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깊게 머리를 숙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 1332번지 신흥사에 가면 기형목(奇形木)이란 기이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삼척시 제51호 보호수로 지정이 된 나무인데, 수령이 200년 정도라고 한다. 단지 수령 200년 정도 된 나무가 무엇이 그리 기이하기에 호들갑을 떠느냐고 핀잔을 주시는 분들도 있겠으나 내막을 알고 보면 누구나 수긍이 갈 것이라고 본다.

 

태백산 신흥사는 신라 때의 고찰이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3년에 범일국사께서 창건을 하였다고 하니, 벌써 2천년이나 된 고찰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담선사께서 중건한 후 몇 차례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흥사를 찾는 길은 삼척시에서 동해고속화도로를 타고 내려가다가 보면 근덕 해수욕장을 지나 동막(東幕)이라는 마을에 다다른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꺾어 계곡을 따라 4가량 올라가면 양평중학교가 있고, 여기에 신흥사 입구가 나온다. 우측 개울에 걸린 좁은 다리를 건너 200m 정도를 가면 신흥사가 되는데 일주문을 보면 너무나 작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안개산 자락에 자리한 신흥사

 

태백산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로 조선시대에도 사격이 이어져 규모 있는 사찰로 유지되었는데, 요사인 심검당과 설선당은 중요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신흥사가 자리한 곳은 태백산의 줄기가 뻗어 내린 곳으로, 안개산(707m)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 지명은 국립지리원에서 발간한 지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근덕면과 노곡면의 경계에 걸쳐 있는 신흥사는, 안개산이 거의 끝나는 곳에 자리하여 사역이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편이다. 그러면서도 산사의 정취가 듬뿍 배어있는 절집으로 아름드리나무가 주변에 가득하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칠 줄을 모른다. 몇 번인가 망설임 끝에 길을 나서기로 작정을 했으니 장비를 챙겨들고 차에 올랐다. 미리 주지 스님께 연락이 되었기에 서둘러 신흥사를 찾았다. 지역에서 봉사를 많이 하시는 스님은 출타를 하셔야 한다는 기별을 받았기 때문이다. 설선당에 있는 스님의 방으로 가서 차를 대접받으며 담소를 나눈 후 여정이 바쁘신 듯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님은 이것저것 하나라도 챙겨주신다. 책이며 달력이며 하나하나 주시다가 그것도 부족했는지 스님이 드실 고구마까지 주신다. 산사 살림살이를 아는 나로서는 그러한 스님의 마음씀씀이에 오히려 죄스럽기만 하다. 절집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고 있으려니, 스님은 보호수가 참 대단한 나무라고 알려주신다.

 

배롱나무가 소나무를 품었다

 

200198일자로 삼척시 보호수로 지정이 된 배롱나무를 보는 순간 입이 벌어진다. 세상에 어찌 이런 나무가 있을 수가 있을까? 안내판에는 수령이 200년에 높이 5m, 둘레 1m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수종에는 배롱나무(소나무)라고 기록을 했다. 배롱나무라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소나무라는 소리일까? 아래 설명을 보면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신흥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배롱나무에 소나무가 자연적으로 생육공생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나무를 찬찬히 살펴본다. 아무리 보아도 그 해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배롱나무에서 소나무가 자란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소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모습으로 나무가 생육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해보아도 이해가 안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무의 형태를 보면 배롱나무 위에 소나무가 얹혀있는 형태다. 아래는 배롱나무인데 그 중간에서 소나무 줄기가 솟아나 자라고 있다.

   

나무를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것이 이 절집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개가 숙여진다. 더불어 사는 삶, 어떠한 어려운 난관이 닥친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스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서로가 더불어 삶을 살수만 있다면 이렇게 기이한 모습으로도 살아갈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아마 세상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나무인 것 같다. 빗속에 길을 나서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몇 번인가 배롱나무 주위를 돌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한다.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자고.

 

충남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에 소재한 대한불교 조계종 인취사. 인취사 극락전에는 조선시대의 아미타삼존불상이 모셔져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5호 아산 인취사 석조 아미타삼존불상은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에는 관음보살이 우에는 지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는 삼존불이다.

 

중앙의 아미타불좌상은 선정인으로서 결가부좌하였으며, 육계가 크고 나발이 선명하고 오른팔에 편삼을 걸친 변형 통견식 법의로서, 아미타불의 전형적인 수인과는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좌측의 관음보살상은 본존과 같은 착의법을 하였으며, 보관정면에 아미타불좌상의 화불을 조각하여 관세음보살임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우측의 지장보살상은 고려후기에 유행했던 피건을 두른 모습으로서 무릎위에 올린 두 손에 보주를 잡고 있는 형태이다. 삼존불 모두 둥글고 작은 얼굴로서 형태가 비슷한 데 눈, , 입이 작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모습으로 지방적인 요소가 강한 표정을 보이고 있으며,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법흥왕 때에 창건했다는 인취사

 

인취사는 신라 법흥왕 때에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눈이 쌓여 있는 날 찾아갔던 인취사. 그리 크지 않은 인취사 경내는 온통 흰 눈이 여기저기 쌓여있었다. 겨울에 사찰답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 절을 올라갈 때 한참을 걸어야한다면 바람과 미끄러운 길로 인해 애를 먹기도 한다.

 

인취사 경내에 들어서면 앞으로 탁 트인 전망에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극락전에 들려 참배를 한다. 고려 말부터 몽고와 왜구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은 민초들은 이승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관세음보살과 저승의 지옥에서 건져준다는 지장보살을 좌우협시불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 삼존불의 형태를 알 수 있어

 

이 인취사 석조아미타삼존불상은 조선시대 아미타삼존불의 시원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금으로 채색을 하여 석조불의 느낌은 제대로 느낄 수 없지만, 그래도 조선 초기의 아미타삼존불상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뿌듯하다. 오랜 시간 전국을 돌면서 수없이 만난 석불이지만, 볼 때마다 그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인취사는 절에 내력에 대해서 전하는 바가 없어 일설에는 고려 때 창건한 절로도 알려져 있다. 수많은 절들이 임진왜란 등 전화로 소실이 되면서 기록이나 문화재들이 소실이 되었다. 거기다가 수탈까지 해간 것들이 상당히 많은 양이기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재는 양으로는 많다고 하지만 질로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한다.

 

 

문화재란 단순히 가치로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활과 습속, 그리고 환경까지도 알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전화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들이 훼파를 당한 것도 마음이 아픈데, 거기다가 종교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문화재 훼손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문화국민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눈길을 걸어 올라간 아산 인취사. 절 경내는 눈이 치워졌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에는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그저 한가롭게 널찍한 경내를 돌아보면서 극락전에서 만난 강한 인상의 삼존불이 자꾸만 생각이 난다. 그만이라도 만날 수 있었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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