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내가 생각해도 팔자소관이다. 어째 집구석에 가만히 붙어있질 못하는 것인지. 그저 가만히 앉아서 그동안 조사한 자료만으로도 얼마든지 글을 쓸 수가 있는데, 하루만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좀이 쑤셔 견디지를 못한다. 비가 오고 나더니 아침저녁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열어젖힌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부터 이리저리 궁리를 해댄다. 그동안 가고 싶었던 곳들을 정리해 놓은 수첩을 뒤적인다. ‘오늘은 이곳을 가볼까? 아니면 이곳이 더 좋을 듯도 한데, 여기는 한 번 다녀오면 너무 많은 경비가 깨질 것 같아 엄두가 나질 않네.’라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사실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면서 갈 곳을 따져보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답사에 꼭 지참하는 수첩. 일년이면 몇 권씩 사용을 한다.

 

화상을 입어 등이 다 까져지면서 한 답사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 찜통더위 속에서 몇 날을 답사를 다녔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이 등이 따끔거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여름철에 땀을 많이 흘려 땀띠라도 난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옷만 스쳐도 따끔거려 신경이 쓰인다.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움직이는 것도 쉽지가 않다.

 

등 뒤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니니 상태가 어떤지를 모르겠다. 손을 뒤로 돌려 피부를 만져보니 허물이 벗겨진다. 도대체 등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동료에게 등을 좀 보아달라고 했더니, ‘허물이 벗겨지고 상처가 났네요.’란다. 여름 더위에 햇빛을 쏘이며 돌아다니다가 보니, 모자 그늘이 지지 않은 등이 허물이 다 벗겨졌는가 보다.

 

올 찜통더위에 답사를 하다가 화상을 입은 등. 이런 일은 처음이다. 

 

세상에 해수욕장이나 물에 한 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체 등에 허물이 벗겨지다니. 올 여름 날씨 한 번 나에게는 참 고된 날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찜통 속에서도 답사를 다니고, 기삿거리가 될 만하면 무조건 사진을 찍어댔다.

 

내 아이들을 위해서 난 길을 걷는다.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여기저기 전화도 걸어보고, 날씨 등을 알아본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동료가 한 마디 한다.

 

“문화재답사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돈도 안 되는데. 차라리 연예나 연애기사를 쓰시면 돈이라도 될 텐데”

“글쎄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네...”

“등 좀 보세요. 까져서 다 벗겨졌는데, 또 나가신다고요”

“선선하잖아”

“암튼 누가 말리겠어요. 병도 아주 지독한 병인가 봐요.”

“그런가보지 그래도 이 병은 고치고 싶지 않네.”

 

찜통더위에 찾아간 문화재는 발굴을 하기 위해 금줄을 쳐 놓았다. 이럴 땐 정말 맥이 풀린다.

 

그냥 웃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동료들의 시선이다. 남들은 에어컨을 틀어놓고도 덥다고 난리를 피울 때, 나는 찜통더위 속에서 길을 걸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것은 오랜 나와의 약속이었다. 걸음을 걸을 수 있을 때까지는 답사를 계속하겠다는 약속.

 

물론 기사를 올려도 보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그리고 더 더욱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달 내내 답사를 하고 기사를 죽도록 써 보지만, 여기저기 들어오는 돈을 다 합해보아야 단 하루치 답사비도 되지 않는다. 그래도 계속해야 하는 것은 내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사죄를 하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시간 한 번을 보내지 못했다.

 

7월 25일, 40도를 육박하는 찜통더위에서 마애불에 치성을 드리는 여인. 저 분도 나와 같이 다급한 마음인지 이 더위에 쉴 새 없이 절을 하다니. 

 

그런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렇게 답사를 한 자료를 책으로 엮어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30권의 책을 채우겠다고 마음속에 다짐을 했다. 책도 책 나름이겠지만, 그동안 여기저기서 낸 책이 22권이나 된다. 남은 것은 몇 년 더 답사를 마치고 나면, 하나하나 정리를 할 생각이다. 그날 까지 힘들어도 견뎌내야만 한다. 오늘은 바람이 시원하다.

 

“아침저녁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네. 그럼 또 보따리 싸야지.”

설봉산을 오르다가 보면 이천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영월암이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있다. 영월암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625-702)가 창건하여, ‘북악사(北岳寺)’라 칭하고 산 이름도 북악(北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할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실증적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이 영월암에는 보물 제822호로 지정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마애여래불이라고 하지만은 그 모습은 오히려 나한상에 가깝다. 이 자연암석에 조성한 마애불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웅전에서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천시 향토유적 제3호로 지정된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가 보인다. 이는 통일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작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럼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영월암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영월암 창건 당시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화좌대와 광배

 

사람들은 꼭 국보나 보물이라야 문화재인줄로만 알고 있다. 물론 국보나 보물이 더욱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유형문화재나 향토유적 등도 같은 문화재이다. 그것을 어디서 지정을 한 것인지가 다를 뿐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지자체에서 지정한 향토유적이라고 해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은근히 울화가 치미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천시 향토유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영월암 석조광배 및 연화좌대는 영월암 창건 장시에 조상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당시는 이 광배와 연화좌대가 주불을 모시고 있었을 것이다. 주불은 없어지고 광배와 연화좌대만 도괴되어 있던 것을 마애불로 오르는 길목에 놓고, 그 위에 1980년에 새롭게 불상을 조성해 놓았다.

 

마모가 심한 광배

 

광배는 한 장의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였다. 배형으로 조성한 광배는 많이 마모가 되어 문양 등을 쉽게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2조로 된 융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다. 현재 좌불상이 있어 뒤편에 있는 복판을 촬영하기는 무리였지만, 원을 중심으로 단엽 8판을 연잎을 둘렀다.

 

중앙의 연잎 주위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화염문과 당초문을 조성하였다. 두광의 상부와 신광의 좌우에는 화불이 3구 조성되어 있으며, 불상을 주착했던 흔적이 나 있다. 광배의 전체높이는 156cm, 폭은 118cm이며 두께는 45cm 정도이다.

 

 

생동감이 넘치는 연화좌대

 

연화좌대도 대좌에 조각한 것들이 많이 마모가 되었다. 하지만 한 마디로 장엄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화좌대는 장방형의 지대석 위에 8각의 하대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8각으로 조상한 안상, 그 위편에는 앙련좌와 복련좌를 쌓아 올렸다. 4부분으로 조성한 좌대는 각각 1석을 사용해 조성하였다.

 

전체높이가 107cm인 연화좌대는 생동감이 넘친다. 앙련좌 위에 올린 팔각형의 석주에는 나한상을 조각한 듯하다. 그러난 심하게 마모가 되어 그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다. 이 광배와 연화좌대 주변에는 몇 개의 석물이 있는데,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이 영월암의 역사로 보아, 옛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월 23일, 한 낮의 더위가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오른 영월암이다. 그저 몇 발자국만 걸어도 땀이 비오듯 한다. 이런 날 답사를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하지만 문화재라고 해서 늘 좋은 날씨에만 찾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 더위에 올라 만난 수중한 문화재 한 점. 그래서 나에게는 더욱 소중하단 생각이다.

형님, 다음 뷰 관계자와 무슨 관계있어요?”


아침나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아우녀석의 전화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아니 그러기 전에야 어째 다음 뷰 베스트가 몽땅 형님 글이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모르겠거든 가서 봐요 문화베스트 23개 글 중에 형님 글이 21개나 되네요.”

“설마, 이 사람아”

“참 안 믿어주네. 가서 보라니까요”

 


다음 뷰로 가서 문화베스트 글을 보았더니, 정말 아우 녀석의 말대로다. 순간 생각을 해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그러고 나서 참으로 마음이 착잡해진다. 문화면에 이렇게 관심이 없는 것일까? 그래도 나름대로 꽤 많은 블로거들이 문화에 글을 송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문화에 대한 글을 안 쓰는 이유는?


이런 현상은 내가 글을 잘 써서는 아니다. 예전에는 나 역시 베스트에 선정되는 경우가 일 주일에 한 두 번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그래도 나이 먹은 사람이 열심히 답사를 다니는 것이 안되 보였는지, 꽤 많이 베스트로 선정이 된다. 아마 하루도 안 거르고 송고를 하고 있는 이유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착잡한 마음이 든 것은 다름이 아니다. 그레도 많은 분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글을 썼는데, 언제부터인가 문화에 송고되는 글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거기다가 문화쪽에서 그래도 상위에 있던 블로거님들이 하나, 둘 자리를 옮겨갔다. 어느 분은 여행으로, 어느 분은 드라마로, 또 어느 분은 요리로.

 

 

예전에는 그 많던 문화 블로거님들이 이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딴 것은 몰라도 나와 같이 문화재나 전통문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일이 발품을 팔아 글을 써야한다. 바로 답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답사를 하기가 수울하지가 않다. 우선은 물질적으로 많은 지출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 묵묵히 걷는 걸음, 이젠 버겁다


요즈음은 하루 종일 뷰에 송고된 글을 보아도, 하루에 불과 10여 편 정도의 문화재에 대한 글이 올라온다. 또한 카테고리가 세분화 되다보니, 딴 종목으로 나누어진 탓도 있다. 누구 말마따나 돈도 안되는 문화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경비를 써가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솔직히 버겁기도 하다.

 


술자리에 가면 가끔은 친구들이나 아우 녀석들이 한 마디씩 한다. “돈 안되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 문화재에 대한 글 집어치우지 그러냐?”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의 말이 백번 옳다. 아무리 줄기차게 써보지만 몇 사람 찾아오지도 않는다. 문화재가 메인에 뜨는 일은 전혀 없다. 그러다가 보면 열심히 쓴 노력에 비해서는, 대가가 아예 없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런들 어쩌랴. 나하고의 약속인 것을. 걸음을 땔 수 있을 때까지는 답사를 하겠다고 했다. 한 사람이 찾아와도 글을 쓰겠다고 했다. 돈이 안되도 그만이라고 했다. 그저 날이 더우나 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약속을 저버릴 수가 없다. 아마 다음 뷰 관계자들도 그것 때문에 베스트로 선정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나에게 욕심이 있다면, 더 많은 블로거님들이 우리 문화와 문화재에 대한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슬슬 지쳐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을 한다. 더 많은 분들이 이렇게 답사를 하고 글을 올린다면, 그저 슬며시 빠져나가 술 한 잔 마시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비가 오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후줄근하게 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정 반대다. 비만 오면 짐을 싸서 길을 나선다. 버릇치고는 참 희한한 버릇이다.

 

좋은 날은 방에 들어앉아 자료 정리를 하다가, 비만 오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서는 이유. 이런 나를 보고 비만 오면 살짝 이상해지느냐고 농담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좋은 날 두고, 하필이면 비가 오는 날 돌아다니니 말이다. 

 

비가 오는 날 모악산 용각부도를 보라

 

모악산에는 천년고찰 대원사가 있다. 대원사는 진묵스님이 술을 보고 '곡차'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절이다. 모악산 중턱에 있는 대원사는 금산사의 말사다. 금산사는 모악산 북쪽 김제에 있는데 비해, 대원사는 모악산의 남쪽 완주군 구이면에 자리하고 있다. 대원사는 매년 4월 둘째 주 토요일에, 수만 명이 모여드는 <진달래 화전축제>로 더 유명해진 절이다. 이 대원사 향적당 뒤편 산에는 부도 몇 기가 자리하고 있다.

 

 

평상시의 용각부도

 

그 중에 유난히 눈길을 끄는 부도가 한 기 있다. 용이 부도를 감고 올라가는 모습이 예사 부도 같지가 않다. 고려 때의 부도로 추정하는 이 용각부도는 정확한 조성 시기는 모르지만,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용은 이 부도를 감고 있다. 머리를 아래로 하고 있는 이 용은, 금방이라도 부도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비가 오는 날 승천하는 부도의 용

 

그런데 이 부도의 용 문양이 날이 좋은 날은 확실치가 않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용이 발로 여의주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러나 비가 오는 날 이 부도를 보면 전혀 다르다. 비늘 하나하나가 모두 들어나 보인다. 그리고 용은 금방 승천을 할 듯한 기세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 되면, 미친 듯 석조문화재를 찾아 달려 나가게 된다. 그 생생한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비가오는 날 용각부도

 

이 용각부도 역시 마찬가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섬세하게 조각을 한 용의 모습이 확연히 들어나 보인다.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용의 모습. 힘차게 비상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듯 하다. 용의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 고승의 부도로 보이는 이 용각부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용각부도의 문양이 드러나 듯,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석조문화재를 찾아 길을 나선다.

 

국보 진전사지탑도 비가 오면 부처님이 일어나신다

 

비가 오는 날 답사를 나서는 까닭은 맑은 날 선명하게 볼 수 없던 탑이나 마애불 등의 조각이 선명하게 들어나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런 나를 미쳤다고 한다. 아무리 선명한 조각을 볼 수 있다고 비가 오는데 길을 나서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라도 더 섬세한 모습을 담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비도 어쩌지를 못한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는 신라시대의 절이었던 진전사지가 있다. 이곳에는 국보 제122호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높은 2단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조성을 한 통일신라 8세기 후반의 작품이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그 조각 하나하나가 뛰어난 작품이다. 통일신라의 탑 중에서도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1층 탑신에는 여래좌상이 각 면에 한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 하단에는 연화좌 위에 광배를 갖춘 비천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기단부 상단에는 팔부중상이 역동적으로 표현이 되어있다. 높이가 5m인 이 탑은 볼 때마다 감탄을 하게 만든다. 그저 평범한 돌을 이용한 조성한 신라시대의 탑. 그 조각 하나하나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만나면 돌을 박차고 뛰어 나올 것만 같다.

 

비가 오면 난 짐을 싼다. 그리로 문화재를 찾아 떠난다. 오늘 비가 오려나? 하늘에 가득 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이제 비에 젖지 않게 갈무리를 잘한 짐을 싸 놓아야 할 때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 꼭 보아야 할 마애불이 있어서이다.

제천 청풍문화재단지 안을 돌아보면, 가장 눈에 띄는 전각이 있다. 밑으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는 정자 한벽루. 정자를 보지 않고도 '한벽루'란 말 한 마디로도,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다.

 

고려 충숙왕 4년인 1317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그 역사는 700년 가까이 되었다. 당시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이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다. 1972년 대홍수로 무너져 내린 것을, 1975년 원래의 양식대로 복원을 하였다. 현재는 보물 제52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익랑을 달고 있는 한벽루

 

 

한벽루가 특이한 것은 정자의 오른편에 익랑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익랑은 대문간에 달아 만든 방을 말한다. 이 계단식 익랑을 통해서 한벽루에 오를 수가 있다. 익랑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지어졌다. 익랑 하나만 갖고도 충분한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다. 거기에 한벽루가 더하여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단지 안편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강쪽을 바라보고 있는 현판

 

익랑은 뒤로 가면서 한 단계를 높였다. 누마루를 깐 익랑은 난간을 놓고, 한벽루에 오르기 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맛 볼 수 있는 예비 공간이다. 익랑의 주추는 1단의 주추 위에, 또 다시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석축을 사용했다. 주추가 이단으로 되어있는 익랑은 보기가 힘들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도 특이함을 보이는 것이 한벽루의 축조형태다.

 

한벽루는 익랑을 달고 있다. 익랑은 대문간에 덧내어 들인 방이다.

 

익랑의 주추는 특이하다. 일단의 주추 위에 마름모꼴 주추를 더 올렸다.

 

자연적 주초석 위에 서 있는 배부른 기둥

 

한벽루는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세워 운치를 더했다. 누마루를 깐 정자는 정면 4칸, 축면 3칸이다. 멀리서보면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밑의 기둥을 지나면서 마루를 올려다보면, 참으로 꼼꼼히도 지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복원을 했다고 하지만 기존의 자재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벽루의 가치를 새삼 느낄 수가 있다. 하나의 전각이 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아름다운 정자가 한 번의 아픔을 당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쉽다. 만일 홍수로 인해 무너지지만 않았다면, 지금보다도 더 아름다운 한벽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자연석 주추 위에 배가 부른 기둥을 놓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았다

 

사방이 트인 아름다운 정자

 

한벽루는 모두 3단으로 보인다. 앞에서 바라보면 익랑이 2단으로 차이 있게 만들었으며, 본 정자는 조금 더 높게 난간이 설치가 되어있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조금 높아진 익랑의 마루가 있다. 그리고 한벽루의 마루는 익랑보다 한 계단 높게 만들어졌다.

 

한벽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본다.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의 도도함과,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들이 아름답다. 이러한 곳에 서 있는 한벽루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일경이라 할만하다. 육각형의 기둥들이 나란히 줄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 쉽사리 발길을 떼지 못하는 것은 이 아름다운 주변 경관 때문이다. 아마 우리 선조들도 이곳에 올라 이렇게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돌계단을 올라 익랑을 들어서면 계단식으로 된 마루가 있다

 

익랑에서 본 정자로 오르는 마루는 또 다시 계단으로 되어있어 운치를 더한다

 

봄에서 겨울까지 한벽루의 아름다움은 어느 계절에도 빠지지 않는다. 누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 한벽루. 예전 같으면 이곳에 올라 글 한자 남기든지, 아니면 거나하게 취하도록 술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풍취에 젖어 찬바람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한벽루의 또 다른 흥취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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