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의 아름다움 미국사회에 알린다.

 

우연한 기회에 좋은 사람을 만나면 밤새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16일 오후에 만난 신미미(, 59)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21세에 미국으로 가족이민을 간 신미미씨는, 15세에 가수로 데뷔를 한 재원이었다. 아마도 피는 못 속인다라는 말은 바로 신미미씨를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신미미씨는 현재 중요무형문화재의 기, 예능보유자인 외할아버지와, 옛 권번의 행수기생을 한 외증조할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끼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15세에 가수로 정식 데뷔를 했어요. 그리고 1969년에 한국연예인협회에 등록을 했고요. 21세 때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달라스 한인모임에서 혼자 1시간 30분 동안 노래를 했어요. 미국으로 건너 가 첫 무대를 21살에 혼자 가진 것이죠.”

 

 

어려서부터 추고 싶었던 우리 춤

 

그 뒤부터 신미미씨는 한인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어려서부터 추고 싶었던 춤을 잊지 못했다고. 더욱 외할아버지가 인간문화재인데도 할아버지에게 춤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할아버님께 춤을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하지 말라는 것을 왜 굳이 하느냐고 하세요. 그러면서 저 혼자 알아서 배우라고요. 한 마디로 퇴짜를 맞은 것이죠.”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는 서운하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부터 한국을 드나들면서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현재 미국시민권자인 신미미씨는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인 승무, 살풀이 이수자이기도 하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점 우리 전통이 좋아지는 거예요. 마치 묵은지 같은 깊은 맛이 있잖아요, 우리 전통이라는 것이. 아마도 그런 것은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미국사회에 한국을 알릴 수도 있고, 제 자신도 어려서부터 그토록 추고 싶었던 춤을 마음껏 출 수 있으니 좋고요.”

 

 

우리문화를 알릴 공간도 마련해

 

우리문화를 미국사회에 알리기 위해 궁중의상쇼도 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궁중의상을 한인사회와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면 상당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나올 때마다 궁중의상을 매입하고는 한단다.

 

미국에서는 우리 국기인 태권도가 가장 유명해요. 그래서 우리 문화를 잘 접하지 못하는 미국사람들은 한국은 그저 때리고 맞는 그런 것 밖에는 없는 것으로 알아요. 궁중의상쇼는 그런 미국인들에게 우리의 아름다움을 선보일 수 있어서 좋죠. 제가 우리 춤을 배워서 공연을 하는 것도 다 우리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싶어서예요.”

 

현재 신미미씨가 살고 있는 달라스시의 거주지는 예전에 목화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 목화공장을 하던 곳을 6년 전쯤에 매입했단다. 현재 구조변경을 하고 있는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3층 건물이지만, 안은 단층이라는 것이다. ‘한국전통문화공간으로 이름을 붙이고 싶다는 이곳에서, 춤도 추고 여러 가지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수원시의 문화 미국으로 초청할 수 있도록 노력할 터

 

저는 올드 한 것이 좋아요. 이 건물도 아주 오래된 공장이었는데 5살에 이곳에 부모님을 따라 왔던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서 다시 찾아왔어요. 이 건물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어서 너무 고맙다고 하데요.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이죠.”

 

달라스에서 멀지 않은 폴워즈(Fort Worth) 지역 한인회장이 제자인데, 지난 해 1214일 이곳에서 17명 정도가 참여하는 궁중의상 쇼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궁중의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고.

 

폴워즈시는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수원은 우리 문화를 지니고 있는 곳이라 좋아요. 519일에는 달라스 다운타운에서 축제가 열려요. 거기서 한국음식과 한국무용 등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 음식은 김치, 불고기, 잡채 등을 선보이려고요. 또한 628일을 달라스 한인회에서 한국의 날을 지정한다고 공연 청탁이 와서 준비하고 있어요.”

 

신미미씨는 수원과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는 폴워즈에서도 한국의 날을 지정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수원의 문화를 잘 소개할 수 있도록 자료를 부탁하기도. 미국으로 이민을 간지 벌써 40여 년. 신미미씨가 살고 있는 미국 땅에 더 많은 한국의 아름다움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으로 기대한다. 연습을 해야 한다면서 자리를 뜨는 신미미씨는 지난해의 감동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면서 이야기를 한다.

 

지난 해 525일 달라스 파이어 파크에서 달라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 열렸었어요. 그 자리에 3살 때 미국으로 입양을 온 한 분이, 제가 추는 진도북춤을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요. 한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역동적인 진도북춤을 보고 감격스럽다고 했데요. 그 지역 신문에까지 기사가 나왔어요.”

 

2002219일부터 1년이 넘는 시간을 경기, 인천 지역을 돌아다녔다. 지난 자료를 정리하다가 만난 경기 옛소리 기행자료라는 파일을 찾아낸 것이다. 이 파일에는 1년이 넘는 시간을 매주 경기, 인천 지역에 거주하는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생활을 하고 소리에 젖은 사연을 소개를 한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경기일보에서 매주 1회씩 문화면 한 면을 통째로 내주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는 동안 55회에 걸쳐 소개를 한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이 되어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렇게 정리를 했지?’ 싶을 정도로 정리를 한 것이다. 55회에 걸쳐 만난 소리꾼만 해도 근 100여 명에 이른다.

 

 

사진과 자료, 신문까지 스크랩

 

사실 이 자료 속에 소리꾼 중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2002년이면 벌써 10년이 지난 세월이고, 당시에 소리꾼들의 연세가 70세가 넘은 분들이 상당수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 자료를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당시에는 참 피곤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주 지면을 채우기 위해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소리꾼을 찾아 길을 나서야 했다. 그 이전에 이미 방송에서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옛소리 소개를 했기 때문에, 소리꾼을 찾아 길을 나서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나 있던 참이다. 하지만 정해놓은 기간 동안 빠트리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자료를 하나하나 들추어본다. 지금 같으면 사진을 찍어 외장하드에 보관을 하고, CD에 정리를 하면 끝이 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찍은 사진을 모두 현상을 해야 하고, 자료를 모두 받아 와 파일에 저장을 해 놓았다. 그리고 신문까지 빠트리지 않고 저장을 했으니, 자료치고는 완벽한 자료가 되었다.

 

 

좋은 자료의 보관은 큰 재산이 된다.

 

자료 맨 앞에 보니 당시 썼던 기획서가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들춰보니 기획의도부터 예산까지 일일이 적은 것이 보인다. 그 기획의도에 보니

경기 인천 지역은 오래 전부터 많은 소리가 전승이 되고 있는 곳으로 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경기도는 과거 판소리의 한 유파인 중고제가 전승이 되던 지역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속요(俗謠) 또한 중고제의 음률로 불러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있어 그 중요성을 알게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조 말까지 이 지역에 전해지던 재인청은 각 기예인들이 모인 집단으로 대단위 숭신조합(崇神組合)이었으며, 그들의 소리가 이 지역에 전승이 되고 있는 속요에 많은 영향을 끼쳐서 이 지역의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이하 하략)고 적고 있다.

 

기획의도 말미에는 한 지역에 전승이 되는 속요는 그 지역민의 심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그 지역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속요는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된다. (중략) 속요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도출시켜 경기도민의 전통예술에 대한 우수성을 고취시키고,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고 적고 있다.

 

 

10년이 지난 세월이다. 하지만 지금 보아도 참 자료정리를 잘했다고 스스로 감탄을 한다. 55회에 걸친 사진과 관련 사진, 그리고 신문기사까지 있으니 완벽한 자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료가 생명이다. 한 번 쓰고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사용해야 할 자료가 있는 밥이다. 이렇게 정리를 한 자료는 강산이 한 번 변한 세월, 지금은 더욱 가치가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된 셈이다.

 

자료정리의 중요성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자료가 생명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명언이라고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소중한 자료 덕분에 경기도의 역사 한 페이지를 찾아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슴 뿌듯한 것은, 그 자료 속에 소리꾼들의 소리가 몇 개가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55회에 걸친 기사내용을 사진과 함께 틈틈이 게재하겠습니다)

 

단 두, 세줄의 색색의 끈만 있다면 아름다운 매듭으로 거듭난다. 우리나라는 매듭에 관한 많은 작품들이 있다. 하기에 매듭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매듭장이란 끈목(=多繒)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끈으로 노리개나 주머니끈에 주로 쓰이는 동다회와, 넓고 납작한 끈으로 허리띠에 자주 사용되는 광다회가 있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 혹은 결자라고 한다.

 

 

원시시대부터 전해진 매듭

 

매듭의 기원은 원시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 전승되어 오는 장식과 실용으로 삼았던 고유의 매듭 기법이나 염색법은 삼국시대에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소속된 매듭장이 있었을 정도였다. 매듭의 재료로는 명주실, 모시실, 닥나무실, 삼베실, 털실 등이 쓰인다. 끈의 색감, 굵기, 맺는 방법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며 지방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매듭의 이름은 생쪽, 나비, 잠자리, 국화 등 우리가 쉽게 보고 사용하는 온갖 물건과 꽃, 곤충에서 따왔다. 끈이나 매듭의 하단에 다는 것을 술이라 하는데 각종 악기, 교통용구, 불교 도구 등의 장식에도 사용하였다. 술 또한 쓰임새에 따라 딸기술, 봉술, 호패술, 선추 등 다양하다. 같은 종류일지라도 궁중과 지방에 따라 그 품격이 달랐다.

 

요즈음은 매듭이 실용에서 많이 사용한다. 가방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많은 양의 형태로 매듭을 사용한다. 매듭과 규방공예를 운영하고 있는 매듭공예사 이미영(, 50, 정자동 거주)씨를 만나보았다.

 

 

고등학생 때 매듭에 빠져

 

이미영씨는 고등학생 때 우연히 동네 수예점에서 매듭과 인연을 맺은 후 30년 이상을 매듭과 함께 살아왔다고 한다. 어릴 때는 그저 취미생활로 시작하였으나, 그 아름다움에 빠져 6년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예기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원래 한국사를 지도했어요. 화성박물관 전시 해설사로 봉사도 했고요. 그런데 아이들의 체험실에서 봉사를 하다보니 무엇인가 아이들과 함께 할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간단한 것을 만들다가 보니, 아이들이 집중력도 생기고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아이들에게 매듭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동안 화성박물관 평생학습축제 등에서 체험교실을 운영했다. 아이들에게 예절교육을 가르치다가도 매듭을 함게 만들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매듭은 두 줄의 색끈을 갖고 다양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어 아이들도 좋아하더라는 것.

 

매듭은 단 두 줄의 끈을 갖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이죠. 매듭은 앞뒤는 똑 같고 상하좌우는 대칭이 됩니다. 두 줄 끈을 갖고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품 등 다양한 것들을 만들 수가 있죠.”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는 매듭공예

 

매듭의 쓰임새는 다양하다. 실생활에서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라고 한다. 벽걸이는 물론이려니와 가방, 벨트, 귀걸이, 목걸이, 심지어는 핸드백 등 모든 것에 매듭을 인용할 수가 있다고 한다.

 

요즈음의 매듭은 실생활에 이용을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요. 심지어는 벽걸이만이 아니라 팔찌, 휴지걸이, 노리개 등 무한한 상품이 가능해 실생활에 인용을 할 수 있죠. 저는 주로 주부들에게 강의를 하는데, 주부들의 경제력이나 시간을 감안해 강의를 들으로 오실 때 강의료와 재료비를 그때마다 받고 있어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손놀림을 계속하고 있는 매듭공예사 이미영씨, 8월 정도에는 작은 개인전을 열고 싶다고 조심스레 욕심을 낸다. 화성박물관과 화서동 청소년문화원, 정자3동 청솔마을 공예교실 등에서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매듭공예사 이미영씨. 8월 전시장에거 만날 작품들을 미리 기대해 본다.

 

뚫어라 뚫어라 물구멍을 뚫어라. 물줍쇼 물줍쇼 사해용왕 물줍쇼

 

거북이를 몰고 나온 질라래비가 우물 앞에서 하는 덕담이다. 놀이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한다. “물주쇼 물주쇼, 사해용왕 물주쇼거북놀이는 우리나라 한수 이남의 놀이로, 추석에 연희되던 놀이이다. 수수잎과 짚 등을 이용해 만든 거북놀이의 거북이는 두 사람이 그 안에 들어가 연희를 한다.

 

거북놀이는 거북이를 몰고 다니는 질라래비가 거북을 몰고 다니면서 간절하게 기원을 한다. 한가위에 이집저집을 돌아다니면서 축원을 해주는 것이다. 거북놀이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0호인 이천 거북놀이로 지정이 되어있다.

 

 

정월 대보름과 추속에 즐기던 놀이

 

본인이 이천 거북놀이를 직접 이천시(당시 이천군) 전역과 근동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발굴을 해, ‘이천의 민속 거북놀이라는 책을 펴낸 지가 벌써 30년이 지났다. 아마 이 조사보고서 형식으로 꾸며진 소책자가, 그동안 써온 20여권의 책을 엮게 된 기폭제가 되었는가 보다. 그러한 거북놀이를 이천이 아닌 수원시 영통구에서 만났으니 참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거북놀이는 기원성민속이다. 가내의 안과태평과 풍농 등을 기원하는 놀이이다. 거북놀이는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날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짚과 수수깡으로 거북이 모양을 만들어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즐기던 놀이이다. 이천지방에서는 대월면에서 이 놀이가 전승이 되어왔다. 거북이는 장수동물이요 부귀를 상징하기 때문에, 놀이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다.

 

거북놀이는 대개 정월 대보름 밤이나 추석날 밤에 하는 놀이로, 수숫대와 짚 등을 이용해 거북이 모양을 만든다. 거북이의 앞에는 2~4명 정도가 안에 `들어가는데, 앞 사람이 주기능자가 된다. 거북이를 몰고 다니는 질라래비도 옥수수 잎과 짚 등으로 머리에 쓰는 모자와 허리에 두르는 치마를 만든다.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놀이

 

거북놀이는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연희를 하는데, 집 대문 앞에서는 문굿을 먼저 치고, 마당에 들어서면 우물굿(용왕굿)과 마당굿을 한다. 마당에서 굿을 하는 도중 거북이가 쓰러지면 사람들은 거북이 곁으로 몰려들게 된다. 이때 질라래비는 이 거북이가 동해를 건너(지역에 따라서는 서해를 건넌다고도 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배가고파 쓸어졌으니, 먹을 것을 좀 주십쇼하고 소리를 치면 주인이 먹을 것을 내준다.

 

그렇게 밤새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원을 해준다. 대개 정월에 하는 거북놀이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가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한다고 하면, 추석에 하는 거북놀이는 풍농에 대한 감사로 행해진다. 경기도 이천군 대월면 초지리에서 전승이 되는 거북놀이는 한 때 중단이 되었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재현을 하여 전승이 되고 있다.

 

 

이천거북놀이 조남걸(, 59)보존회장은

우리 거북놀이는 한수 이남과 금강 이북의 마을에서 주로 연희가 되어왔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거북놀이는 풍농과 안과태평을 위한 놀이였지만, 결국에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동의 놀이였습니다. 거북이를 놀이의 주체로 삼은 것도 알고 보면, 농사에 가장 필요한 물 때문은 아닌가 생각이듭니다. 거북이는 용왕의 심부름꾼으로 늘 등장을 하기 때문이죠. 오늘 이 거북놀이가 연희가 된 다음 비라도 뿌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농촌이 다 망가질 것 같습니다라며 간절한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연희를 한다고 한다.

 

풍농과 가내의 안과태평을 위해 축원을 하는 기원성민속인 거북놀이’. 오늘 한가위를 맞이하여 우리의 전통놀이인 거북놀이를 소개하는 것도,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만 가고 있는데 이렇게 마음이 풍요로운 거북놀이 하나가 세상을 따듯하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어정 7월, 동동 8월’이라고 했던가? 시골에서는 7월이 되면 세벌매기가 다 끝나고 잠시 농사일이 한가로움을 맞이하게 된다. 이때는 논에 나가 물꼬를 보고, 봄부터 사용한 호미 등 농기구를 잘 닦아 말려둔다. 하지만 8월은 다르다. 모든 농산물이 수확을 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부지깽이도 뛴다.’라는 표현을 했을까.

 

그런 농사일에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역시 판굿(농악)이다. 질펀하게 한바탕 들판에서 벌어지는 판굿은 절로 어깨춤을 추게 만든다. 그런 흥겨운 무대가 7월 4일(목) 오후 7시 30분부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 소재한 청소년문화센터 온누리아트홀에서 열렸다. 수원시와 고창군이 예술문화교류로 마련한 걸 판진 무대이다.

 

“속이 다 뻥 뚫린 것 같습니다”

 

 

공연을 보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성기되어 있다. 1시간 30분 동안 참 신나게 박수치고, 소리를 쳐Tek고 한다. 말이 ‘추임새’라지만, 차라리 함성에 가깝다. 그렇게 한 시간 30분동인 소리치고, 박수치며 신바람이 나게 흥겨워했다.

 

“손바닥이 다 얼얼합니다. 속이 다 뻥 뚫렸어요, 모처럼 좋은 공연을 마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역시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마다하고, 왜 만날 서양 것에 목을 매는지 알 수가 없네요.”

 

 

역시 우리 것이 최고라고 말하는 한 시민의 말이다. 함께 온 일행들도 모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다. 그만큼 속 시원하게 박수치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정말 좋았어요. 단순히 풍물 공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악가무희가 함께 어우러진 무대를 본다는 것이 신이 났거든요.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만 고함치고 살면 스트레스도 받지 않을 것 같아요”

 

아이들과 함께 왔는데, 생각 외로 아이들도 좋아하더라는 정아무개(여, 38세)의 말이다. 아이들도 덩달아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6호 고창농악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창농악은, 고창, 무장, 영광 등지의 해변을 끼고 형성된 농악이다. 호남 우도 농악의 일반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잡색놀음이 다양하게 발달한 점과 고깔소고놀음이 잘 정리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고깔소고놀이는 머리에 고깔을 쓰고 삼채가락에 맞추어 춤을 흥겹게 추는 것으로서, 가락의 진행과 상황전개에 따라 즉흥적인 동작을 유연하게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는 고창농악을 무대공연화 시킨 것이 바로 ‘풍무(風舞)’이다. 풍무는 모두 4개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처음에는 ‘각각치배 문안이요’로 풍물의 문굿을 극화한 대목이다. 즉 연초에 마을의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신밟기 등을 할 때, 문을 열어달라는 문굿을 무대공연화 시킨 것으로 치기배들의 기량을 선보이게 된다.

 

 

두 번째 과장은 ‘어화들레 아리싸구나’로 농사일을 할 때 세벌매기를 마친 후 농사군들이 한바탕 놀이판을 벌이는 것이다. 세 번째 과장인 ‘내 꽹매기 어디갔소?’는 고창농악에서 등장하는 잡색들의 놀음을 마당극화한 대목이다. 네 번째 과장인 ‘판을 거닐다’는 꽹매기를 찾은 풍물패가 걸 판진 판굿을 벌이는 과정이다.

 

지난 1월 수원시립교향악단이 고창을 찾아가 고창군민들을 위해 공연을 가진 것에 대한 답례로 이루어진 고창농악 한마당. 수원에는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있다고 하면, 고창에는 역시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군이 있어, 서로가 세계문화유산이 있는데다, 수원화성과 고창읍성이라는 성곽을 도심 안에 품고 있는 것까지 닮은꼴이다. 고창농악보존회가 마련한 이번 공연은 수원시의 초대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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