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출연하는 명장 가운데 한 사람인 관우(關羽, 160년~219년)는 3세기경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무장이다. 유비, 장비와 더불어 도원결의를 맺고 수많은 공을 세운다. 삼국지에 나타나는 관운장은 청룡연월도를 빗겨들고 적토마에 올라 적군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다. 이 관운장이 우리나라에 와서 왜 무신(武神)으로 신격화되어 숭배를 받는 것일까?

 

임진왜란 때 진인이 세운 신상이 효시

 

관우를 우리나라에서 신성시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진인이 서을 남묘에 관우를 조각한 신상을 모신 것이 그 효시로 보여진다. 그 뒤 관우는 전국에서 관왕묘, 관제묘 등의 명칭으로 불리면서 신격화됐다. 관우를 가장 신성시하는 것은 역시 무속인들이었다. 무속에서는 관우를 무신으로 신성시하고, 집집마다 모셔둘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추앙을 받았다.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 안에도 주왕묘, 관성묘 또는 관제묘라 부르는 관우를 모신 사당

 

관우에 대한 전설은 많이 전해진다. 그것은 신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도 있고, 명나라 장수 진인의 활동이 관우와 혼동이 될 수도 있다. 처음에는 남묘에 모셔졌던 관우가 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소재한 보물 제153호 동묘(동관왕묘)로 옮겨졌다. 이렇게 동묘로 옮겨진 것은 관우의 영험이라는 전설이 한 대목 전한다.

 

전설 속에서 우리나라를 구한 관우

 

'임진왜란 때 한양이 왜병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한양 남대문 앞에 왜병들이 다다르자, 적토마를 탄 장수 한 명이 수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왜병들을 맞아 일전을 벌였다. 적을 물리친 장수는 남산의 한 굴속으로 사라졌는데, 나중에 그곳을 가보니 대나무 잎만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후에 한 조정 대신의 꿈에 관우가 나타나 '동묘로 가자, 동묘로 가자'라고 하였다. 그래서 관우의 조각상을 동묘로 옮겼는데, 그날 밤에 남묘에 불이 나 다 타버렸다.'

 

 

 

 관성묘 입구의 솟을대문과(위)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하)

 

대개 전설은 이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살펴보면 관우를 신격화하기 위한 전설임을 알 수 있다. 동묘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왜병에 의해 파괴가 되었다. 명의 신종은 친히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보내와, 1599년부터 새로 짓기 시작하여 1601년에 완성을 하였다. 이 때 서묘와 북묘가 함께 건축이 되었으며, 현재는 동묘만 남아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동묘로 가자'고 했다거나, 남묘가 불이 나 타버렸다는 것은 관운장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설화로 보인다. 정작 임진왜란 때 파괴가 된 것은 동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대문에서 관우가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는 것도, 남대문 밖에 남묘가 있기 때문에 나타난 설화로 볼 수 있다.

 

전주 남고산성 안에 자리한 관성묘

 

동남아 일대에서는 관우가 가장 추앙받는 장수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관우를 모셔놓은 사당이 보이는데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상 안에도 주왕묘, 관성묘 또는 관제묘라 부르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관성묘는 고종 32년인 1895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선문이 제안하여 건립했다.

 

 

 관우의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에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부귀공명과 자손들의 창성을 기원하고 있다

 

전주 '관성묘'를 찾았다. 남고산성 안으로 들어가 하마비를 지나면 주변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돌계단 위에 솟을대문이 보인다. 대문의 현판에는 '관성묘'라고 적혀있다. 솟을대문은 모두 5칸으로 축조되었으며, 중앙의 세 칸 밖으로 좌우에 한 칸씩이 더 달렸는데, 그 안에는 말을 끌고 있는 무장을 조각해 놓았다. 이 조각이 관우를 조각한 것인지, 아니면 사당을 지키는 무장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위로 오르는 돌계단에 또 하나의 중문이 보인다. 이도 역시 솟을대문으로 꾸며 관우가 신격화돼 있음을 짐작케 한다. 사당으로 오르는 좌측에는 사당을 지키는 사람이 사는 집인 듯, 한 채의 가옥이 있다. 돌계단에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신격화된 관우의 영험으로 안과태평을 기원한 것은 아니었을까?

 

 

 

 전각 안에 그려진 '관우의 적벽대전'과 그림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문화재

 

계단을 오르면 앞으로 부속건물을 달아낸 사당이 있고, 그 좌우에는 살창으로 앞을 막은 전각이 있다. 그 안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들을 포함, 관우의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사당은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을 볼 수가 없다. 안에는 관우의 상을 모셔 놓았다는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양편에도 조각상들이 보이고, 중앙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굳게 닫힌 사당안을 문 틈으로 보니 무신상들이 보였다

 

관우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은 그의 충정이다. 그리고 몸을 도사리지 않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이다. 그렇기에 무관들이 주축이 되어 지어진 관성묘가 아닐까? 아마 무관들에게는 관우가 그 누구보다도 숭앙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문화재는 보존이 중요하다. 문화재가 올바로 지켜질 때 그 가치가 높은 것이다. 주변을 말끔히 정리하고 누구나 찾아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사람들은 그 문화재의 가치를 더 높게 보지 않을까? 관성묘의 제대로 된 보존이 아쉽다.


벌써 두어 달이 지났나 보다. 이천시 율면에 있는 어재연장군 생가를 답사하기 위해 가보니, 한창 공사 중이었다. 안내판에 2009년 5월 29일부터 11월 25일까지 지붕보수를 한다고 적혀 있다. 복잡한 공사 중인 집을 촬영할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다. 12월 6일이니 공사를 마쳤을 것 같아, 다시 이천시 율면 산성리 74번지 중요민속자료 제127호인 생가로 향했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답게, 걷는 길이 쉽지가 않다. 어재연장군 생가가 보이는 소롯길로 접어들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지붕 위에 파랑색이 보인다. 공사기간이 10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마침 일요일이라 공사는 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이런 낭패가 어디 있을까?

 

 

공사 중인 어재연장군 생가, 멀리서 온 분들의 불평

 

어재연 장군 생가를 들어가니 멀리서 왔다고 하는 분들이 안을 둘러보고 계시다. 이분들도 나처럼 황당하다고 한다. "공기를 적었으면 책임지고 공사를 마쳐주어야지, 무엇하러 안내판에 공사기간을 적어요. 의미도 없는 기간을"이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이렇게 어지럽게 널려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제대로 촬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쩔 것인가. 여기까지 두 번이나 찾아왔는데, 볼썽 사납기는 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할 수 없이 몇 바퀴 집안을 둘러본다.

 

  
▲ 안내판 공사 안내판에는 2009년 11월 25일까지 공사를 한다고 적혀있다.

 

350년 된 안채, 평범함 속 돋보이는 미

 

어재연장군 생가는 초가로 지어진 조선 후기 살림집 형태이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사랑채와 헛간채가 - 자로 자리하고, 대문을 들어서면 문간방과 광채가 ∣자로 배치가 되어 있다. 사랑채와 광채를 마주 하고 ㄱ 자형 안채가 자리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 가옥구조다.

 

안채는 조선조 현종 1년인 1660년에 지어졌으니, 벌써 350년이나 되었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 마루, 그리고 안방이 일렬로 배치가 되었고, 꺾인 곳에 부엌과 광이 있다. 대청은 방에 비해 꽤 넓게 자리를 잡았다. 대청에는 두 곳 문을 내어 바람을 통하게 하였다. 그런데 건넌방 앞에 있는 문 위에, 세 개의 작은 창이 보인다. 무엇이었을까? 열어보니 다락이다. 이렇게 대청에 작은 다락을 만든 용도가 무엇일까?

 

  
▲ 대청의 창호 대청 뒤편에 난 문과 그 위에 작은 창호

  
▲ 다락 윗부분만 있는 다락. 대청에 있어 많은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윗문이 있는 곳이 돌출이 되어 있다. 밑은 나무로 지줏대를 만들고, 그 위 벽을 돌출된 다락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다. 여름에도 집 뒤쪽에 있으니 시원하게 바람이 소통될 듯하다. 대청에 있고, 습기가 차지 않는다는 점, 바람이 잘 통한다는 점에서 돌출된 작은 다락 용도를 생각해보면, 과일이나 습기에 약한 비싼 천 가지를 보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어릴 적 시골 친척집에 갔다가 이런 대청에 붙은 다락에서, 친척할머니께서 과일을 꺼내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 문틀 안채의 안방 뒤. 가로지른 문틀의 나무가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이다.

 

안채를 돌아보다가 안방 뒤쪽으로 돌아갔다. 안방은 길게 놓여있는데 뒷문이 두 개나 나 있다. 그 뒷문 문틀을 보고는 한참이나 서 있었다. 자연스럽게 휜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 문 밑에 틀인 가로기둥을 삼았다. 흙벽으로 바른 안방 벽에 가로지른 문틀. 그 하나의 여유가 이렇게 사람을 푸근하게 할 줄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다듬고, 자르고, 가꾸기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일까? 아마 성형미인이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자연 그대로 미인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그래서인지. 괜히 비교도 안되는 것을, 억지로 비교를 해가며 혼자 웃는다.           

 

사랑채와 대문간의 여유

 

어재연장군 생가의 사랑채는 6칸 규모다. 사랑방과 대청 앞뒤에 개방된 툇간이 있다. 그리고 4칸의 헛간이 연결되어 있어 전체적으로는 10칸 규모다. 사랑채 앞에 놓인 대청은 시원하게 만들어졌다. 문도 없고 그대로 개방이 되어 있다. 대문과 연결 된 곳에는 작은 골방이 있다. 방들이 전체적으로 작은 것은, 겨울철 방을 따듯하게 보온하기 위해서이다. 대개 민가의 초가집은 방이 작고 천정이 얕다.

 

  
▲ 사랑채 공사중으로 어수선하다. 대문과 연결된 사랑채의 대청은 문이 없이 개방이 되어있어, 시원하개 보인다.

  
▲ 문간방의 담 문간방 앞에 돌로 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한 가림벽이지만 바람벽의 구실도 함께 한다

 

광채 끝에 마련한 문간방 앞에는 돌담을 쌓았다. 안채를 직접 보지 못하는 가림벽 용도로도 사용했지만, 바람벽이기도 하다. 초가집의 이런 오밀조밀함이 고래 등 같은 기와보다 오히려 정겹다. 그런 돌담 하나를 두었다고 안채가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작은 것 하나를 갖고도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의 여유가 어느 정도인가 가늠이 된다.

 

돌로 붙인 담벼락이 투박하다고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광채 바깥벽 아랫부분은 돌로 담벼락을 만들었다. 기존 벽을 두고 그 위에 돌을 절반쯤 올려붙인 것이다. 진흙과 함께 바른 돌들이 그대로 문양이 된다. 높이는 어른 가슴 정도지만, 돌출된 돌 담벼락이 아름답다. 누군가 내가 우리 고택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했더니, 별걸 다 아름답다고 감탄을 한다고 한마디 한다. 그러나 난 이런 작은 것 하나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든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늘 생각을 한다.

 

  
▲ 담벼락 돌로 문양을 넣은 담벼락. 기존의 담벼락에 덧붙여 보온의 효과를 높였다.

 

이것이 단지 담벼락을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서 붙인 것일까? 아니다. 이렇게 이중으로 아랫부분을 만들면 그 담벼락의 두께가 두꺼워지고, 그만큼 찬 겨울에 보온이 된다. 외부의 바람과 맞닿는 곳에 이런 담벼락을 만든 것도, 알고 보면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재연장군 생가는 야산 기슭에 북서향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바람을 막을 구조물이 하나도 없다. 주변에도 집이 들어서 있지를 않아, 바람에 그대로 노출이 된다. 그런 집의 구조상 이중의 담벼락이 보온에 상당한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방한의 효과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돌담에 초가를 올렸다.

 

어재연 장군은 조선조 말기 무장이다. 순조 23년인 1823년 이 집에서 태어나 고종 8년인 1871년에 고아성보 전투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재연 장군은 신미양요 때인 1871년,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조선에 쳐들어오자, 4월 15일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600여 명의 각 영 포군을 이끌고 광성보로 나가 적과 대치를 하였다. 4월 23일과 24일,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한 미군은, 4월 25일 광성보를 공격해왔다. 미군이 수륙양면에서 광성보로 돌입하자,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며 적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 맞은편에는, 장군과 형제인 재순 등의 위폐를 모셔놓은 충장사가 자리하고 있다.

 

  
▲ 돌담 돌담 위에 용마름을 틀어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올렸다. 어재연장군 생가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이다.

 

어재연 장군의 생가에서 보는 또 하나의 색다름은 바로 담장이다. 안채 뒤편에는 돌로 축대를 쌓아 만든 밭이 있고, 담장을 둘러놓았다. 이 담장은 돌과 황토를 섞어 만들고, 그 위에 용마름을 엮어 초가를 올렸다. 용마름을 얹은 담장. 지금은 정비가 되지 않아 조금은 지저분하게 보이지만, 공사를 마친 후에는 이 또한 색다른 멋으로 다가올 것이다. 공사를 다 마치고 나면,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겨우겨우 촬영한 몇 장의 사진이 어재연 장군의 생가를 소개하는 데는 버겁지만, 그래도 이 초가로 된 고택의 아름다움은 조금은 소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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