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공연의 계절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축제 중 상당수가 9월과 10월에 열린다. 수원의 경우 생태교통 수원2013’이 한 달간 행궁동 일원에서 열리기 때문에, 많은 행사들이 생태교통 기간 중에 열리고 있다. ‘9회 수원예술인축제 - 예술의 맛, 한눈에 즐기다역시 92일에 개막공연을 연 후, 915일까지 곳곳에서 가을을 즐기고 있다.

 

13() 참 억세게 비가 퍼붓는 날이다. 오후 730분부터 수원국악협회(지부장 나정희)에서 주관하는 가을 우리음악여행이 수원 제2야외음악당(만석공원) 무대에 오르기로 하였으나, 그 전까지도 비가 내려, 제대로 시작을 할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한 방울씩 내리던 비도 시간이 되자 멈추어 버린 것.

 

 

가을이 되면 춤과 소리가 땅에 붙는다.’

 

아주 오래전에 들은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공부를 마치고 혼자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지나던 선생님께서 연습을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아직도 연습을 하고 있나?”

, 며칠 안 있으면 전공시험이 있어서요.”

그래 가을이 되면 참 중간고사가 있지?”

가을이 되면 춤도 소리도 땅에 붙는단다.”

선생님 무슨 말씀이신지

가을은 모든 것이 땅으로 내려앉는 계절이지. 가지에 달렸던 모든 실과도 땅으로 내리고, 나뭇잎도 꽃들도 모두 땅으로 내려앉지. 그만큼 땅이 풍성한 계절이아, 땅에사는 사람들도 풍성해지는 것이지.”

, 선생님.”

 

그 때는 그 말뜻의 깊이를 잘 몰랐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니, 이제 그 말뜻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그런 가을에 춤과 음악, 소리의 한 마당이 만석공원에 내려앉은 것이다.

 

 

1시간 반이 흥겨운 무대

 

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 고성주)의 출연자들이 첫 무대로 한오백년을 무대에 올린 뒤, 국악실내악연주로 이어졌다. 어린 꼬마들이 부르는 소리가 초가을의 밤을 더 깊이 느끼게 한다. 비가 내린 후 한결 서늘해진 공원무대 앞에 300여명의 청중들도 함께 가을이 오는 소리를 느끼는 듯하다.

 

이효덕, 이슬 두 사람이 부르는 국악가요 쑥대머리배 띄어라를 들으면서 아주 오래 전 북 하나를 앞에 놓고 앉아 소리를 하는 제자들에게 장단을 쳐 주시던, 명창 고 박동진 선생님을 생각을 했다. 졸업 후에도 선생님과의 인연이 깊었지만, 처음으로 판소리를 접한 것이 바로 쑥대머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악가요로 거듭난 쑥대머리야 어디 깊은 판소리에 당할 수가 있으랴. 다만 판소리를 전공한 이효덕이라는 소리꾼의 성음에 귀가 솔깃해진 것이지.

 

 

이어서 무대에 오른 장타령과 재인청의 명인인 고 이동안 선생에게서 전해진 춤인 무녀도. 그리고 풍물판굿으로 무대가 달아올랐다. 하나하나 무대가 진행되는 동안 조금은 미숙한 면도 있었지만 그것이 무슨 대수랴.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의 밤에, 그것도 하루 종일 비가 억수로 퍼붓고 난 뒤 열린 가을이 내려앉은 무대가 아니던가.

 

한 시간 30여분 동인 관객들이 덩달아 즐거워하고, 무대에 오른 버나잽이의 재주가 사람들을 즐겁게 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가을은 어디를 가나 풍요로운가 보다. 오랜만에 옛 기억을 되새겨볼 수 있는 무대에, 마음 한 자락을 남겨두고 싶기만 하다.

 

‘재인청’, 한 때는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의 모든 부문을 총 망라한 예인들의 집단이었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던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재인청은 ‘무부(巫夫=화랭이)’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무기(舞技)들의 예인 집단인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삼도 예인집단 재인청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있었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각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과 도대방의 선출은 재인청 인원 중에서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 당시에도 상당히 민주적인 방식의 선거를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까다로운 규제 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지금도 경기도 내의 여러 곳에 보면 광대마을, 혹은 재인마을로 불리는 곳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난 날 군 재인청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 재인청이라는 곳이 춤을 추거나, 단지 소리를 하거나 하는 예인의 집단이 아니다. 재인청이란 한 마디로 3도에 있던 모든 예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거대 기, 예능조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제인청의 춤을 잇는 사람들

 

7월 16일(화).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있는 재인청 춤을 추고 있는 곳을 찾았다. 창밖으로는 화성이 보인다. 그곳에서 5명의 춤꾼들이 땀을 흘리며 열심히 춤을 추고 있다. 바라춤, 무녀도, 재인청 기본무, 재인청 살풀이 등이다. 근 두 시간 정도를 땀을 흘리며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김성용(여, 66세. 조원동), 김현희(여, 58세. 영통동), 박옥희(여, 48세. 매탄동), 유미녀(53새. 용인 고매동), 박영옥(여, 50세. 용안 동백동) 등이다.

 

재인청의 춤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이 행궁 옆 화령전에 기거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전수를 시키면서 그 맥이 이어졌다. 이동안 선생은 어린 나이에 재인청에 속한 예인으로, 많은 재인청의 기, 예능을 학습한 예인이다. 이날 재인청의 춤을 전승한 사람들은, 그러한 재인청의 춤을 어려서부터 배운 고성주의 춤 맥을 잇고 있는 춤꾼들이다.

 

 

춤을 추는 이유는 각양각색

 

이들은 대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을 춤을 추어온 사람들이다. 30년이나 춤을 추었다는 김성용씨는

“그동안 춤을 추면서 여러 가지 춤을 다 배워보았어요. 그러나 재인청 춤은 나름대로 독특한 면이 있어요. 아무래도 무부들의 춤이다보니 남성적이고. 딴 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춤사위가 많아요. 그래서 재인청의 춤은 매력이 있죠.”라고 한다.

 

이제 춤을 추기 시작한지 5년이 되었다는 김현희씨는

“어려서부터 춤이 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어요. 이제는 아이들도 다 컸고 해서, 무엇인가 나만의 즐길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죠. 그래서 찾은 것이 재인청 춤이었고, 이제는 이 춤을 추면서 나름 건강도 찾았고요”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 했던가? 한 자리에서 춤을 추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녀들의 춤을 추는 이유는 나름대로 특색이 있다. 재인청 춤을 학습하는 사람들 중 막내인 박옥희씨.

“저는 원래 운동을 좋아해 운동을 열심히 해왔어요. 그러다가 좀 더 색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우리 춤이 저한테 맞는 것 같아서 춤을 추가 시작했어요. 이제는 춤을 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하죠.‘라고.

 

어려서부터 춤을 추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춤을 추었다는 유미녀씨는

“재인청 춤은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춤사위가 있어서 어렵지만, 그래도 춤을 추다가 보면 정말 매력이 있어요. 재인청 춤을 배우고 그것을 무대에까지 끌고 올라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성취욕을 느낄 수도 있고요.”라고 한다.

 

시골에서 공부를 하면서 춤이 추고 싶었지만 무용학원이 있는 도시로 나올 수가 없어, 무용과를 들어가지 못하고 일반 학과를 지원했다는 박영옥씨.

“시골에서 살다가 보니 고등학교까지는 열심히 춤을 추었어요. 그런데 많은 학원비를 감당하기도 어렵고, 무용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부모님들께 이야기를 못했죠. 이제 재인청 춤을 추면서 그동안 가슴에 맺힌 한을 푸는 것 같아요”란다.

 

춤을 추는 이유는 같지가 않다. 하지만 그녀들이 무대에 올라 춤을 춘다는 것은 한결같다. 독특한 재인청의 춤에 매료가 되어, 이제는 춤을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재인청의 춤은 그렇게 맥을 이어가고 있다. 3만 여명이나 되는 예인집단에서 추어지던 많은 춤들이, 오늘도 수원 화성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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