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80에, 70년을 못골에서 살았지” 못골 경로당 신현구 회장

 

“내 나이 올해 80이야. 지금 생각하면 그 동안 살아온 세월이 꿈만 같지. 그래도 아이들 잘 키워서 대학 졸업시키고 결혼해서 실림을 났으니, 이제는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야”

 

11월 16일(금) 지동 못골경로당에서 만난 신현구 옹은 못골노인회의 회장님이시다. 마침 못골경로당을 찾았을 때는 방안에 어르신들이 30여명이나 계셨다. 일주일에 4번 정도 점심을 노인장에서 함께 드시는데, 이날이 점심에 국수를 드시는 날이라고 한다. 신문사에서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고 나서, 신현구 회장님께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당신이 아니라도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화성 태안에서 지동으로 이사를 오신 것은 벌써 70년이나 되셨단다. 지동의 한 맺힌 역사를 세월과 함께 지켜보신 분이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화성과 못골

 

“아버님이 경찰관이셨지. 그래서 아버님이 전근을 갈 때마다 이사를 하고는 했는데, 화성태안에서 수원으로 발령이 나시는 바람에 못골로 이사를 왔지. 70년 전에는 이 동네 아이들도 모두 신풍초등학교에 다녔어. 나도 그 학교를 38회로 졸업을 했거든. 그 때는 아이들과 어울려서 할 수 있는 놀이가 작대기를 들고 하는 병정놀이였어. 지금 제일교회 자리와 화성이 우리 놀이터였지. 그리고 저편에 연못도 그대로였고. 당시는 이곳이 다 논이었던 곳이야. 드문드문 논을 매워 지은 초가집이 한 채씩 있었고”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신현구 회장은 잠시 눈을 감는다. 아마도 그 당시를 회상하시는 듯하다. 신풍초등학교를 나와 수원중학교를 들어갔지만, 3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경찰관이던 부친은 한국동란 때 그만 적에게 학살을 당하셨단다.

 

“아버님이 빨갱이들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신 후, 집이 풍비박산이 난거여. 갑자기 내가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니겠어. 할 수 없이 태안으로가 농사를 짓다가 다시 돌아왔지. 그리고 나서 지금 살고 있는 지동 366-3번지에 국수공장을 차렸어”

 

당시는 배급이 밀가루로 나와, 처음에는 그 포대를 가져다가 검게 염색을 해서 옷의 안감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수 공장을 차리게 되었다고. 처음 국수공장을 차렸을 때는 손으로 일일이 기계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이 시작하면서 분식 장려를 했잖아. 새벽 3시부터 집사람과 함께 일어나 하루 종일 국수를 만들어야 했어. 회사에 국수며 칼국수를 생산해 납품을 하면서 생활이 조금 나아졌지. 국수공장을 하면서 번 돈으로 아이들 대학까지 다 졸업을 시켰으니까, 꽤 질 번 것이지.”

 

그렇게 직원도 없이 두 내외분이 새벽 3시부터 일어나 국수를 생산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험하게 살아오신 옛날 생각이 나시는지, 잠시 말씀을 멈추신다. 지금 사람들이야 어찌 당시를 가늠이나 할 것인가? 80년 세월을 살아오시면서, 그래도 자녀들을 잘 가르친 것이 큰 재산이라고.

 

모범경로당을 만들고 싶어

 

지난해에 못골경로당 회장으로 피선이 되시고 난 뒤, 못골 경로당 십계명을 만드셨다. 1. 모범 못골 경로당이 되자. 2.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3. 즐겁게 기쁘게 살자. 4. 회원끼리 미워하지 말자. 5. 회원끼리 욕하지 말자. 6. 항상 웃음으로 지내자. 7. 회원끼리 단결하고 뭉치자. 8. 회원끼리 다트지 말자. 9. 건강검진을 2년에 한 번씩 하자. 10. 99, 88, 2, 3, 4 용어가 있다.

 

그런데 10번은 그냥 십계명이라고 하기 보다는, 어르신들의 인생을 마감할 때를 숫자로 표시를 해 놓으셨다. 그것은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 ~ 3일 아프다가, 4일 후에 영원한 고향으로 가자’라고 적어 놓으셨다.

 

신현구 옹이 경로당의 회장 소임을 맡은 뒤로, 못골경로당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심심하면 다투고는 하시던 어르신들이 다투는 것이 없어졌다고. 또 매달 1일에는 전 회원이 경로당 주변 청소를 해서,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도 한단다. 경로당 운영도 민주적이라고 한다. 매달 27일에는 정기월례회를 가져 50명 회원들의 의사를 반영시키기도 한다는 것.

 

“우리 못골경로당을 내가 회장을 맡고 있는 동안에 꼭 모범경로당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지. 처음에는 회원이 30명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회원이 50명이 넘어. 그리고 회비도 한 달에 3,000원씩 걷어서 필요한 곳에 사용을 하고 있지. 이젠 모범경로당 지정을 받아도 될 만큼 많이 변했어.”

 

점심을 먹고 가라고 굳이 손을 잡아 이끄시는 것을 마다하고 경로당을 떠났다. 다음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을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시는 어르신들. 십계명의 10번처럼 그렇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동의 순 우리말 이름은 ‘못골’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 큰 연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동새마을 금고에서 못골어린이 놀이터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좌측으로 이발소 하나가 보인다. ‘조원이발관’이라는 이 이발관은 이순재씨(남, 65세)가 운영을 하고 있는 이발관이다.

 

탤런트 이순재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사람들은 이름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농을 해대고는 한다. 한국동란 때 부모님과 함께 월남을 하여, 못골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이발 기술을 배워 이발관을 시작한지가 벌써 40년이 지났다. 숱한 세월을 못골 사람들과 함께 애환을 달래면서 살아온 이순재 사장이다.

 

 

“그 땐 제일교회가 판자집이었지”

 

이순재 사장이 운영하는 이발관은 마을 어르신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꼭 이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소일을 하기 위해서 들려가고는 한다. 찾아오신 어르신들이 머리가 단정치 않으면 그냥 머리 손질을 하기도 한다.

 

“처음 이발관을 열었을 때는 마을에 어르신들이 한 150여 명 정도였는데, 40년 세월동안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젠 한 열 분이나 남았나 봐요. 그 땐 이발소에서 위편으로 제일교회 있는 곳까지 집이 없었어요. 모두 밭이고 지금 앞으로 난 길 건너편은 논이었으니까요. 그 때는 제일교회도 판자였었어요. 그러다가 이렇게 지금처럼 큰 대형교회가 되었지만.”

 

사람이 좋아 그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이 이발관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하지만 안을 들어가면 40년 전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다 그렇게 40년 세월의 손때가 묻어있다.

 

 

40년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조원이발관

 

“예전에는 손님들도 참 많았어요. 많을 때는 혼자서 하루에 20명을 이발을 한 적도 있었고요. 그 때는 정말 젊어서 그런지 정신없이 일을 하고는 했는데. 이런 적도 있었어요. 제가 낚시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낮에는 이발을 하고 밤에는 낚시를 다니고는 했죠. 그러다가 보니 낮에 이발을 하러 손님이 오셨는데, 그만 졸고 있었나 봐요. 어르신이 피곤하면 잠시 들어가 눈을 붙이고 나오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방으로 들어가 잠시 눈을 부친 것이 두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발을 하러 오신 어르신은 그 자리에 앉아 계시더라는 것. 그만큼 못골의 옛 어르신들은 정이 넘쳤다고 이야기를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동이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지동에는 어르신들 중에 남자가 별로 없어요. 모두 다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마나님들만 남아 계시죠.”

 

 

40년 세월을 많은 사람들과 접하다가 보니, 마을의 집집마다 그 속을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조원이발관은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 속내를 풀어내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이발을 하러 오거나, 그저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이곳을 찾았거나 아무래도 좋았다는 것.

 

“어르신들이 오시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시기 때문에, 마을 사정을 잘 알고는 했죠. 어느 날부터인가 어르신들이 한 분씩 보이지 않는 거예요. 세상을 떠나신 것이죠.”

 

한 자리에서 40년 세월을 남의 머리를 만지며 살았다. 그리고 어르신들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아직 못골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는지. 이발소 안에는 나무로 열을 내는 난로가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40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나 있는 셈이다.

 

“저희 집에는 아직도 220V 전기를 쓰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선풍기고 무엇이고 다. 40년 동안 함께 이 이발관을 지켜 온 것들이죠. 그래서 쉽게 바꿀 수도 없고요”

 

그랬나보다. 곁에서 대담을 듣고 있던 마을분이 한 마디 거든다. 그 말에서 40년 세월을 못골 사람들의 머리를 만지며 그 애환을 함께 한 것이 아닐까?

 

“참 오래되었죠. 저 의자도 아마 처음 문을 열 때 그대로인 것 같아요. 타일을 붙인 저 세면대도 그 때 그대로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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