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상월면 주곡리는 동주막리, 마근동, 술골, 용적골 등의 자연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곳이다. 옛 주곡리 앞으로 큰 길이 나 있었는데, 이 길가에는 술집이 많이 모여 있어서 '주막거리' 또는 '주곡(酒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이름을 따서 현재의 주곡리가 생겼다.

 

500년 역사의 주곡리 장승

 

주곡리에는 큰 장승들이 서있다. 마을 입구 좌측에는 '천하대장군'이 우측 건물 담벼락에 가까이에는 '지하여장군'이 있다. 주곡리 장승의 특징은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솟대와 함께 집단으로 모여 있다는 점이다. 매년 새로 장승을 깎아 솟대와 함께 새로 세우는데, 집단으로 뭉쳐있어 넓은 면적을 차지하지 않는다.

 

 

 

이 주곡리의 장승이 처음 세워진 것은 연산군 4년인 1498년이다. 청주 양씨 9세손인 첨정공 춘건이 낙향을 하여 이 마을에 정착을 한 후,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목적으로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매년 정월 14일 밤에 장승제를 지내고 있으니, 500년이 지난 전통을 지닌 마을이다.

 

마을주민을 살린 장승

 

이 주곡리의 장승은 임진왜란 때 마을주민들을 살렸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야습을 획책한 왜병들이 주곡리에 들어섰는데, 마을입구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를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시간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깬 주민들은 왜군의 침입을 알고 서둘러 피신하였다. 아무리 총을 쏘아도 물러서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사람들을 괴이하게 여긴 왜병들이 다가가 확인을 해보니, 사람이 아니라 장승이었다. 결국 장승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아 지성으로 정성을 드린 마을주민들의 목숨을 장승들이 지켜낸 것이다.

 

 

 

선조 32년인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선조는 '마을을 지킨 장승을 수호신으로 삼으라'고 했다. 그 후 논산지역에서는 각 마을마다 입구에 장승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주곡리의 장승은 논산시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었다.   

 

'로표장승' 역할을 하는 주곡리 장승

 

길을 가는 행인들이 먹을 것을 해결하고 피곤한 몸을 쉬기도 했던 주막거리에서 유래된 주곡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은 자연스레 길을 안내하는 로표장승의 역할을 했다. 주곡리의 장승은 남장군인 천하대장군과 여장승인 지하대장군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동방 신도내 20리, 서방 논산 30리, 남방 연산 20리, 북방 공주 40리라 적혀 있다.

 

 

 

 

주곡리의 남장승은 사모를 쓰고, 여장승은 족두리를 섰다. 나무의 면을 깎아 얼굴을 조성했는데 눈과 코는 돌출을 시키고 주변을 깎아냈다. 솟대도 매년 새로 깎아 장승군에 함께 묶어세우는데, 끝에는 새를 한 마리 올린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곡리 마을을 지켜 온 수호신인 장승. 장승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는 장승의 내력이 적힌 안내판을 세워 후손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 장승으로 인해 마을의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의 전통이 한낱 시시콜콜한 옛 풍습으로 치부 되어가고 있는 요즘, 바람직한 마을의 모습을 본 듯하다.

마을 입구,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대개는 마을 입구에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만,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시나 이정표의 구실도 한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나누어 세우고 있으며, 남녀 1쌍을 세우거나 4방위나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이나 12곳에도 세우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동제의 주신으로 섬기는 대상이 된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장승. 깎을때마다 세워놓아 집단의 장승군으로 변했다. 솟대와 함께 서있다. 2010, 3, 20 답사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의 모습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좌측은 충남 공주시 상신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장승(2007, 1, 25 답사) 우측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무갑리 목장승(2008, 12, 5 답사)

좌측은 전북 남원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2010, 11, 27 답사) 우측은 전남 여수 영등동 벅수(2007, 12, 6 답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 기록이 보여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엄미리 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지만, 밑 부분에는 거리를 알리는 로표장승의 역할도 한다. 2011, 1, 3 답사 

함양 벽송사 목장승. 목장승이 오래되어 훼손이 되었다.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2010, 12, 11 답사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해학적인 생김새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

마을 입구의 양편에 서서 마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서 있는 장승. 처음 장승이 대하는 사람들은 ‘무섭다’고도 표현을 하고, ‘흉측하다’고도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서 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승은 점점 마을 사람들을 닮아간다.

선암사 입구에 세워진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계표시 장승. 2011, 3, 5 답사

사람들은 목장승을 1년에 한 번, 혹은 3년에 한번 씩 깎아 마을입구에 세우면서, 자신들의 심성과 닮은 모습을 만든다. 석장승 또한 돌을 다듬는 장인의 마음을 닮는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장승이 무섭기도 하지만, 해학적인 요소를 많이 띠고 있는 것은 민초들의 삶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권력이나 물질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주는 험상궂은 얼굴 뒤에, 같은 민초들에게는 한 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란 생각이다.

오랫동안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남아있는 장승. 아마도 사람들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은,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함께 해 왔듯이.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