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 한 선생은 한 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 소재한 모덕사 안에 자리한 고택에서 기거를 했다. ‘중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고택은, 1990년 4월 선생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제 113년이 된 이 한옥은 당시 선생이 일제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집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집에서 선생이 사신 것은 고작 6년 여. 190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왜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을 틈 타 떠나신 곳이다.

 

 

전국에 남아있는 선생의 사우

 

면암 최익현선생만큼 많은 사우와 유적 등에서 모시고 있는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선생은 현재 청양 모덕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경기도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전북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면의 영곡사, 전북 순창의 지산사, 전북 정읍의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호남의병 창의지인 무성서원 등에 선생의 영정과 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전북 고창의 도동사, 광주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전남 곡성의 오강사, 전남 구례의 봉산사, 전남 보성의 모충사, 전남 무안의 평산사, 전남 화순의 춘산사 등에도 선생의 영정과 위폐 등이 모셔져 있다. 전남 신안군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흔적이 보인다.

 

 

경상도와 제주도, 일본, 강원도 등에도 선생의 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북 울진의 아산영당에 영정, 경남 하동의 운암영당에 영정이, 제주도에는 선생의 유적비 등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선생의 글씨가,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있다.

 

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중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경에 나포가 되어 대마도에 구금이 되었는데,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발 속에 조국의 흙 한줌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물 한 동이를 갖고 배에 올랐는데, 일본 땅으로 끌려가서는 단 한 톨의 쌀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가, 1907년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면암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마지막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유소’라는 이 글에 보면 선생의 애국충정이 그대로 배어있다.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에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 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이리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 없는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또한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 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하략)‘ - 자료출처 모덕사

 

 

이등박문과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와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에 순국하시니, 제일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대한 왕께 절 올리며 임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고국명산 그 어느 곳에 임의 유택 정하올가?

그 좌향 묻지 마라 백이의 서산에서 노중연의 동해여라‘-이등박문

 

 

7월 14일 장마비속에 찾아간 청양군. 선생이 살다 가신 중화당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조상의 위폐를 모신 영모재로 구성되어있다. 중화당의 사랑채 앞에서 잠시 집을 바라다본다. 이 집을 한 바퀴 돌면서 집에 대해 곳곳을 소개한다는 것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이곳에서 살다가 타국땅에서 순국하신 선생의 뜻에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사랑채 툇마루 앞에 걸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전가(忠孝傳家)’, 충과 효를 대대로 물리는 집이라는 소리이다. 아마도 선생의 그 충정을 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차게 퍼 붓던 장맛비가 잠시 멈추었다. 중화당 앞 연못가에 조성한 선생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이 사시던 집조차 돌아보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다.

 

미쳐도 이렇게 미치면 남들은 아예 포기를 할 것만 같다. 14일(일)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인천방향으로 가다가 서해안 고속도로로 갈아탔다. 그리고 다시 당진 대전간 고소도로를 타고 가다가 예산을 거쳐 청양읍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40분. 관광안내도를 하나 받아들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청양군까지 가기 전부터 난관에 봉착을 했다. 장마전선이 북으로 올라갔다는 말만 믿고 나선 답사 길이다. 하지만 평택에 들어서 서해안대교에 진입하자, 10m 앞도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비가 퍼붓는다. 그냥 들이붓는다는 말이 적당할 정도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가는 날이 장날 맞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청양군청에서 멀지 않은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 15-37에 소재한 석조여래삼존불상. 보물인 이 삼존불상을 보기 위해 좁을 길을 몇 번이나 돌아서 찾아갔지만, 보호각 공사 중이라고 삼존불을 아예 막아놓았다. 어떻게 비집고 들여다 볼 틈도 보이지가 않는다. ‘가는 날이 장날’, 정말 딱 맞는 말이다.

 

그리고 청양군 일대를 샅샅이 비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힘들게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일반적으로 어느 지자체나 문화재 안내판이 큰길가나, 아니면 가로 안내판 등에 적혀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청양군 내의 거의 모든 문화재들은 길가에 안내판이 하나도 없다. 유일하게 도로표지판에 나타나는 것은 장곡사 등 몇 곳에 지나지 않는다.

 

 

비는 하루 종일 퍼붓고, 안내판은 찾아 볼 수 없고. 이런 답사라면 차라리 발길을 졸려버리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왕 나선 길이 아니던가? 그리고 얼마 만에 이렇게 1박 2일로 나선 답사인가? 도저히 뒤돌릴 수가 없어 빗길에 답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난 미친 문화재 답사가라네.

 

정말 그랬다. 어쩌다가 문화재를 찾다가 근처 주민들에게 문화재가 어디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웬 정신 나간 미친 인간이 이 장대비 속에서 문화재를 찾아왔느냐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어찌 놓칠 수가 있단 말인가? 조금은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고 해도, 하루 종일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답사를 계속하는 수밖에.

 

 

그렇게 몇 곳을 돌다가 보니 벌써 시간이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늦은 점심 한 그릇을 먹고 다시 답사를 시작했다. 향교, 고택, 석탑, 사찰, 그리고 연암 최익현 선생을 모신 ‘모덕사’까지. 거기다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어가 있는 길과, 옛 칠갑산 고갯길에 있는 ‘콩밭 매는 아낙네 상’까지 찾아보았다.

 

저녁 6시까지 그렇게 돌아본 청양군의 문화재 답사는, 악천후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상한 눈으로 본다. 도대체 제 정신이라면 이런 장대비 속에서 어찌 문화재 답사를 할 것인가? 장곡사를 들려 나오는 곳에 장승공원을 들렸다. 갖가지 표정의 장승들이 웃고 쳐다본다.

 

 

빗길에서 얻어 낸 짐 보따리, 이젠 풀어야지

 

1박 2일 동안 참 많이도 돌아쳤다. 자료만 해도 17곳을 뒤졌으니 정리를 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듯하다. 하지만 이 많은 자료들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그것을 글로 옮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를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문화재답사. 그리고 그 답사를 빗길에서 1박 2일을 보내고 돌아오면서, 괜히 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피식 웃고 만다. 언젠가 잘 아는 지인에게서 들은 소리가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미친 문화재답사가 한 사람이 참 여럿 즐겁게 만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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