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에서는 여자들은 항상 모든 것에 규약을 받아야만 했다. 고려 때의 여자들이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말을 달리는 것에 비해, 유교적 풍습에 의한 규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소재한 사적 제257호 운현궁은 대원군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는 경비업무를 맡은 병사들이 기거하는 수직당, 대원군이 집무를 보던 노안당,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노락당 등이 있다.


노락당 뒤편에는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이 된 또 하나의 부녀자들의 공간인 이로당이 있다. 이로당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입구(口)자의 형태로 지어졌으며, 외부에서 남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건물을 지었다.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구실을 한 이로당은 여자들만이 살 수 있도록 꾸며졌으며, 철저한 금남구역이다.



이로당의 안주인은 운현궁 안살림의 최고책임자


이로당은 노락당과 연결이 되어있다. 노락당 뒤편과 이로당의 건물의 동편이 서로 복도로 연결이 되어있어, 여자들이 이 복도를 통해 움직일 수 있다. 결국 노락당과 연결이 된 이로당은 남자들의 출입이 제한 될 수 밖에 없도록 꾸며져 있다. 이로당을 돌아보면 어느 곳이나 출입을 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없다.

ㅁ 형의 공간 가운데는 중정을 만들고 사방이 모두 막혀있다. 이로당의 현판이 걸린 정면을 빼고는 복도를 모두 안으로 둘러, 그 안에서만 이동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밖으로의 생활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노락당과 연결이 된 복도 한편은 높게 올려 그 밑으로 문을 내었다. 그 문으로 노락당과 이로당의 뒤편으로 출입을 할 수가 있고, 그 곳에는 우물이 두었다. 살림을 하기 위해서는 물을 길어야 하는데, 우물조차 안으로 숨겨놓아 밖으로의 출입을 제한 한 듯하다. 대원군이 기거하던 노안당과 안채인 노락당 사이에는 중문을 달아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 한 것을 보아도 부녀자들이 기거하는 곳을 철저하게 보호를 했다는 곳을 쉽게 알 수 있다.  

철저하게 제한 된 이로당의 동선

왜 이토록 여인들의 공간인 이로당은 외부에서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한 것일까? 이로당 주변을 돌아보아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노락당과 연결이 된 복도 밑으로 난 문을 통해 이로당의 주위를 돌아본다. 정면의 마루를 제외하고는 출입문이 없다. 



 노락당과 연결이 된 복도의 문과 뒤편에 있는 우물, 그리고 후원 


이토록 철저하게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 시킨 것은 어쩌면 명성황후와 끊임없이 다툼을 벌였던 대원군이기에 여인네들의 외부출입으로 인해 세상사에 참여하기를 바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뒤편을 한 바퀴 돌아보아도 출입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철저하게 출입이 제한이 된 철옹성 같은 곳이다.




이로당의 동선은 집 안에서만 이루어지게 구조가 되어있다.

이로당에 묵는 여인들은 다만 외부로 난 방문을 통해서만 비깥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운현궁 안의 안담장이 가로 막고 있어, 결국은 노락당과 이로당의 앞마당이 공간일 뿐이다.  이로당에 묵는 여인 중에는 운현궁 안살림의 최고책임자가 기거를 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 대원군은 여인들이 세상사에 참여 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던 것만 같다. 

며느리와의 서로 엇갈린 사고때문에 평생을 보내야만 햇던 대원군. 어찌보면 이로당은 그런 대원군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운현궁은 명성황후와 끊임없이 반복을 하기 이전에 지어진 별궁이지긴 하지만, 이로당을 돌아보면서 대원군의 마음이 이곳에 있는 듯하다. 여인네의 세상 참여를 원치 않는 대원군의 마음을.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지 114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아침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 앞에 있는 문예관에서는 명성황후 114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처음에는 행사를 크게 하기로 했으나 신종플루로 인해 대폭 축소해, 이기수 여주군수를 비롯한 300여 명의 내외빈 인사들이 모여 명성황후의 뜻을 기렸다.

 

명성황후는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이다.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 명성황후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에 모셔진 명성황후의 영정

  
▲ 생가 정면 여주읍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지

아침 일찍 서둘러 생가지로 향했다. 명성황후 생가지는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8세까지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생가지에 잇는 집은 숙종 13년인 1687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지어졌다. 당시의 건물로 남아있던 것은 안채뿐인데, 1995년 행랑체 사랑체 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이 생가의 우측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서 있다.

 

  
▲ 안채 명성황후 생가 안채. 이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내력을 기록한 탄강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것이다. 탄강이란 왕이나 성인 등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고, 구리란 고향이라는 뜻으로 탄강구리비란 명성황후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뜻이다.

 

  
▲ 별당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의 별당. 1895년 동학혁명 때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탄강구리비의 뒷면에는 광무8년인 1904년에 세워졌으며 '5월 어느 날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제27대 황제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황제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탄강구리비 뒷편에 위치한 별당은 명성황후가 1851년 음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가 8세가 되던 해에 부친인 어성부원군 민치록이 영천군수를 끝으로 감고당에서 세상을 하직했으니 명성황후는 그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명성황후 생가지 명성황후 추모를 하는 날 어린 아이들이 생가지를 찾았다. 명성황후의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1895년인 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가 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혁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맞섰던 명성황후는 그렇게 비극적인 생을 마쳤던 것이다.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가 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 황손 이석씨 추모제날 명성황후 생가지를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추모제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촬영을 하고..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생가 곁에 마련된 민가마을에서 간단한 점식식사로 국수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는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가 참여를 했다. 올해 69세로 전주 승광재에 기거하고 있는 이석씨가 외가를 찾은 것이다. 곱게 두루마기를 입은 황손 이석씨는 그동안 수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는 고종황제가 할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친왕이다. 결국 명성황후는 황손 이석씨의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긴 황손 이석씨. 영국이나 일본 같으면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겠지만 마땅히 터전을 잡지 못하고 방랑을 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가수를 비롯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다가 2003년 8월부터 태조 이성계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 김완주 전라북도도지사가 전주시장을 지낼 때 배려를 한 것이다.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하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나라에서 일본 천황을 초청한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질 않습니다. 할머니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장본인인 그들이 모든 것을 깊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은 격해진 마음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으면 아버님께서는 항상 칼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답니다. 심지어는 독약을 받을 것에 대비를 해 비상을 조금씩 마셨다고도 합니다."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라면서 말을 하는 황손 이석씨의 웃는 얼굴에 잠시 노기가 스민다. "그저 제가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마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사동궁에서 보냈다. 궁에서 나온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여기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 때가 힘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이후로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고,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갈곳이 있다면서 쓸쓸히 명성황후 생가를 뒤로하고 떠나는 황손 이석씨. 왜 그 뒷모습에 분노가 보였을까?   

 

  
▲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의 대화 명성황후 추모제장을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할머니댁인 외가를 찾은 황손 이석씨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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