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군 삼계면 학정리 36번지에 가면 성문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에는 전북유형문화재 제 87호로 지정이 된 석불입상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불상은, 발견 당시에는 성문안마을 밭 가운데에 있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하반신이 땅에 묻혀있고, 대좌와 광배가 각각 떨어져 있었단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에는 전설이

 

2002년에 석불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높이 245㎝, 너비 98.8㎝, 두께 35.4㎝의 석불입상으로 밝혀졌다. 석불입상의 얼굴은 넙적하고 크다. 귀는 볼 아래까지 내려와 있어 풍만하다. 얼굴의 전면과 길고 큰 귀에 비해, 가는 눈과 작은 입은 어딘가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 석불입상의 목에는 희게 붙여 놓은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다. 머리 부분이 6ㆍ25때 떨어졌던 것을 다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 석불입상의 코는 떨어져 나가 부자연스러운데, 그 이유를 마을 주민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한 농부가 소에게 풀을 먹이고 있는데, 소가 달아났다는 것이다. 화가 난 농부가 소를 향해 돌을 던졌는데, 그 돌이 하필 석불의 코를 맞혀 석불의 코 한쪽이 떨어져 나갔단다. 그런 연유에서인가 그 농부는 그날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그 길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부의 죽음이 석불에게 해를 입힌 벌이라고 하여, 석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부처인데, 그런 일로 인해 농부를 죽였을 리가 없겠지만, 그런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로 인해, 마을주민들은 이 석불입상이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는 갓이다. 전설이야 늘 그렇듯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나면, 더해지면서 전해지는 것이니 마을 주민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다가 과장이 된 듯도 하다.

 

 

어울리지 않는 광배가 오히려 문화재를 망쳐

 

현재 성문사 대웅보존에 모셔진 학정리 석불입상은 모습이 특이하다. 목에는 이어 붙인 밑으로 삼도가 보인다. 그리고 법의는 통견으로 했으며, 가슴부분에 U 자형의 주름이 잡혀있다. 두 손은 풍성한 법의 안에서 두 팔을 마주했다. 발밑까지 흘러내린 법의는 발목 부분에서 다시 U자형의 줄이 있고, 그 아래는 주름을 잡은 형태이다. 발은 법의에 가려 보이지가 않는데, 밑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법상으로 가려져 있어 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이 학정리 석불입상의 광배는 새로이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뒤에 하얀색으로 마련한 광배가 어딘가 어색하다. 발견 당시 대좌와 광배가 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 광배는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조성한 광배가 영 딴판이다. 물론 석불입상의 격에 맞는 광배를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하겠지만, 보기에도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목이 떨어진 석불좌상에 새롭게 조성해 올려놓은 머리가 영 딴판이라든가, 석불입상에 회칠을 해 문화재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등, 우리 문화재의 보존이라는 행위가 오히려 문화재를 망치고 있는 경우이다. 학정리 석불입상도 제 광배가 조금 쪼개지고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원래의 것을 함께 놓았다면 그 가치가 지금보다 나았을 것 같다.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는 일은, 새로 만들어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 것을 잘 지켜내는 것이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에서 406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공근면 상동리 496-3에 소재한 3층 석탑과 나란히 있는 석불을 도로 옆에서 만날 수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이 상동리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앞으로는 금계천이 흐르고 있고, 옆에는 상동리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머리 부분은 잘려나가 흩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려 다시 조성한 것이다. 현재의 머리 부분 이전에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 자비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의 신체부분을 조성한 실력으로 미루어 보아도, 신라 전성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당당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무릎 위에 올려 왼손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의 형태는 부처가 깨달음을 상징하는 상징이다.

 

남아있는 신체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런 손 모양과 당당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의 유려한 옷 주름 등에서도 역시 이상적 사실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에서부터 양어깨를 거쳐 무릎에 이르는 선이 유려하다. 이 석불좌상은 그 형태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경에 뛰어난 석공에 의해 조상된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8각 연화좌인데 하대는 안상을 새겨 넣었는데,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그 위로는 두장의 꽃잎이 아래를 향하게 조각을 하였으며, 연꽃을 새긴 원형의 상대와 각 면에 안상을 새긴 중대는 전형적인 9세기 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석불좌상에 비해 좌대가 조금 왜소한 듯하다. 이 석불좌상은 부드러운 옷 주름과 8각의 대좌 등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아, 8세기의 불상양식을 잘 계승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석탑과 함께 모셔져

 

석불좌상의 옆에는 성덕사의 옛터에 석불좌상과 함께 남아있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석탑의 기단은 이단으로 되어있으며, 아래기단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에 두 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위기단은 중앙에 탱주와 양편에 우주를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3층 몸돌은 잃어버려 없어진 것을 탑을 복원하면서 새로 조성을 해 끼워 넣었다고 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층과 2층은 4단씩, 3층은 3단으로 새겼으며, 낙수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살짝 위로 들려 있다.

 

 

이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붕돌의 너비가 좁고 두꺼워지는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일반적인 밋밋한 형식으로 조성을 한 삼층석탑은 상륜부는 남아있지가 않다.

 

두상을 잃어 새롭게 조형을 해서 올린 상동리 석불좌상. 뛰어난 조각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들어 조성한 머리로 인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했다. 흔히 요즈음 말로 ‘훈남’이 된 것이다. 문화재 답사를 할 때 만나는 이런 문화재로 인해 마음이 아픔이 가실 날이 없다.

출장을 나가면서, 그만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놓은 채로 나와 버렸다. 기차를 타고나서야 휴대폰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정신머리하고는 참. 이나저나 일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려면 전화를 해야 하는데,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다. 중간에서 아우를 만나 함께 동행을 했으니, 우선은 아우전화를 사용하는 수밖에.

그런데 요즈음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전화는 우선 받지를 않는가보다. 전화번호가 다르니 받지를 않는다. 몇 번을 계속 전화를 해야만 겨우 전화를 받아준다. 그만큼 쓸데없는 전화들이 걸려온다는 뜻이다. 하루에도 설문조사니 머니해서 오는 전화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모르는 전화는 안 받는 쪽이 편하기는 하다.

 

전화로 알아보는 정보, 없으니 답답해

요즈음은 휴대전화로 많은 정보를 알아볼 수가 있다. 고속도로의 정체는 물론, 문화재 답사를 하거나 길을 찾을 때도 전화를 이용한다. 아우의 전화는 길 안내는 되지만, 어디가 얼마나 막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주말이라 고속도로가 상당히 막히는 것 만 같다. 얼마나 막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고속도로 상에 전광판에는 20km정도가 정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 길을 벗어나 딴 길을 택했는데도, 막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휴대폰이 있으면 고속도로의 실시간 운행을 볼 수 있는 정보가 있는데도,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다행히 많이 돌아다녀본지라 대충은 차량의 흐름으로 짐작을 해 목적지로 가는 수밖에.

고속도로와 국도를 번갈아가면서 이용을 해, 그래도 늦지 않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 아마도 휴대전화가 있었다고 한다면, 더 빨리 도착을 했을 것이다.

답사 길에서 느끼는 답답함, 바보가 되어버린 나

답사를 한다고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휴대전화들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인가, 공중전화도 눈에 띠질 않는다. 연락을 해야 하는데 참으로 답답하다. 그렇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화를 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공중전화를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은 사람들이 전화나 내비게이션 등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 많다. 하기에 사람들은 머리를 쓰지 않는다고 누군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고속도로가 심하게 정체가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길을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길을 벗어나면 길 자체를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전화 없이 보낸 48시간. 한 마디로 세상과 격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 스스로도 이미 기계에 의존해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나 보다. 나는 절대 아니라고 늘 말을 해왔지만,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나를 보며 스스로 놀란다.

그리고 그 기계가 내 생활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에, 어느 땐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바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움이 앞선다.

오늘 낮 문자를 한통 받았다. 그런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문자의 내용은 이렇다.

“퍼너스피그어스여”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무슨 암호도 아니고, 내가 탐정도 아닌데 이런 문자를 왜 한 것일까? 들여다보고 또 보아도 참으로 아리송한 내용이다.


휴대폰을 보고 있으니 눈이 아프다. 종이에 크게 써 보았다. 그렇다고 해답이 나올 리도 없다. 문자를 한 지인이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지라, 혼자 궁리에 또 궁리를 해본다. 그래도 답답하기는 매한 가지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리를 하느라 종이를 들고 의자에 길게 기대어 고민을 해본다. 그러다가 전화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다가, 그만 종이를 놓쳐버렸다. 종이가 뒤집어졌는데 희미하게 비치는 글씨가 이상하다.


얼라, 이게 무슨 말이여. ‘오시요...’라는 글씨만 같다. 유리창에 종이를 뒤집어 갖다 대어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유리에 비친 종이에 적힌 글씨는 조금 이상하기는 해도 이런 말이다

“보고시프니오시오”

뒤집힌 종이에 나타난 글자. 세상에 이럴 수가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 긴 비 끝에 우울할까보아서, 웃으라고 보냈단다. 그러면서 머리가 무지 좋다는 칭찬이다. 머리가 좋긴 실수로 종이를 떨어트린 것뿐인데. 하마터면 이 글 갖고 밤새 머리에 쥐가 날 뻔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에 소재한 사적 제104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1573년에 다시 만든 비가 있는데도, 대첩비지라고 한 것은 두 가자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이곳에 비만 있던 것이 아니라, 보호각과 외삼문, 그리고 비를 보호하던 별장청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할 수 있다. 처음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인 황산전투의 승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에 대첩비를 세웠다. 그 후 현종 8년인 16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보호각을 고쳐지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첩비가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이 파괴된 비를 ‘파비각’을 지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원래의 비가 사라져 대첩비지라고 볼 수도 있다.



조선 개국의 태동이 된 황산전투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새겨 자시 세울 때, 원래의 좌대인 귀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1973년에는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과 홍살문, 삼문과 담장 등을 새로 조성을 하였으며, 파비각 등을 조성하여 일제에 의해 파손이 된 원래의 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다.

운봉읍 화수리를 찾아갔다가 들려 본 대첩비지. 이곳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목대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은연중에 비친다. 결국 이 황산의 전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한 곳이니 역대의 왕들이 이곳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선조의 명에 의해서 대첩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 받침인 귀부, 정말로 기이하네.

대첩비를 돌아보는데, 그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귀부를 제작한 것일까?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형태는 많이 달라진다. 신라 때까지만 해도 거북의 형태를 본 딴 귀부가 성행을 하였으나, 고려에 들어오면서 머리는 용에 몸이 거북이인 형태로 변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부는 도대체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 나라를 태동하게 한 전투지에 세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듯한 이유이다. 이 귀부를 보면 고려시대의 귀부와는 또 다른 힘이 느껴진다. 머리 부분은 용의 머리인 듯 뿔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 뿔 속이 비어있었던 것처럼 구멍이 나 있다.




용의 발을 가진 귀부와 콧구멍의 비밀

거북이 등의 문양은 같으나 그 다리부분을 보고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머리 부분이 용이라고 해도, 다리는 거북이의 다리를 조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지만 이 거북이의 몸은 다리가 용의 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뒤로 돌아보니 정말로 혀를 찰만큼 대단한 조각이다.

앞뒷발은 모두 용의 비늘로 덥혀있다. 그런데 뒷발을 보니 안쪽 발가락 하나가 위로 솟아있다. 왜 이렇게 발가락 하나만을 위로 추켜세웠을까?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니 그곳은 나란히 있다. 이렇게 추켜세운 발가락 하나가 이 조각이 어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입모양도 특이하다.




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콧구멍이 있던 곳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안이 움푹한 것을 보면, 콧구멍 안이 비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돌 안을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파낼 수가 있었을까?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대첩비의 귀부. 1시간여를 들여다보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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