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명물이 있다. 명물이라고 하니 무슨 상품이나 장소 등을 생각해선 안된다. 그 명물은 바로 사람이다. 수원시 팔달구 창룡문로 58번길에 거주하는 고성주씨(, 60). 이 사람을 굳이 명물이라고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남자이면서도 여자가 하는 일을 한 가지도 못하는 것이 없다. 오히려 여자들보다 더욱 여성다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41일 오후. 고성주씨의 집안 마당이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인가 해서 가보았더니 열심히 기름에 무엇인다를 튀기고 있다.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약과란다. 집에서 약과를 만들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보던 약과와는 다르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큰 행사가 집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음식을 직접 준비해

 

고성주씨는 신을 모시는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단골들의 안녕을 빌러주는 굿이 있다. 비로 진적굿이다. ‘맞이굿이라고도 하는 이 진적굿은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 하는 굿중에 가장 큰 굿이다. 보통 3년에 한차례씩 하지만, 고성주씨는 매년 봄, 가을로 이 굿을 한다. 그만큼 단골들에게 정성을 쏟아 붓는다.

 

이 약과도 그 맞이굿을 하는 날 상에 올릴 음식 중 하나이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준비를 하더니 기름을 튀겨내는 것으로 완성이 된다고 한다. 고성주씨는 큰일을 앞에 놓고 늘 이렇게 며칠씩이나 준비를 한다. 이 약과도 아침부터 몇 사람이 준비를 한 것이다. 어떻게 만드는 것인지가 궁금해 하는 방법을 물었다.

 

 

갖은 재료로 만들어 진설해

 

밀가루와 맵쌀가루를 섞어 만드는 약과는 모양새도 특이하다. 파는 것은 동그랗지만 이 집의 약과는 길에 반죽을 자르고 그 가운데에 칼집을 낸다. 그리고 양편을 가 칼집이 난 곳으로 집어넣어 뒤집는다.

 

처음에 내림을 받고나서 바로 이렇게 배웠어요. 10년간은 굿을 할 때 모든 굿거리 제차와 음식을 하는 방법 등을 배웠죠. 참 힘들게 배웠어요. 신을 모시는 사람이 신령께 음식을 올리면서 어떻게 사다가 할 수가 있어요. 하나같이 직접 준비를 해야죠. 그러다가 보니 며칠 전부터 준비를 시작해요.”

 

 

기름에 약과를 튀겨내면서 하는 말이다. 그 방법은 약과를 만든 밀가루와 멥쌀가루를 섞어놓고 계란노른자. 생강, 기름, 조청, 정종 등을 적합한 비율로 집어넣고 반죽을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방망이로 밀어서 넓게 편 다음 길게 잘라 모양을 만든다는 것이다. 모양이 완성되면 기름에 튀겨낸다.

 

단골들이 다 챙겨간다는 약과

 

기름에 튀긴 것을 다시 조청에 담가 골고루 조청이 속에까지 배어날 수 있도록 놓아둔다. 마지막으로 통깨를 뿌려 식히면 완성이 된다는 것. 준비하는 양이 워낙 많다보니 아침부터 하루 종일 매달려 있다.

 

 

예전에는 색을 입히기도 했어요. 그런데 본 맛이 가시는 것 같아 올해는 색을 입히지 않았어요. 진적이 끝나고 나면 단골네들이 다 싸갖고 가세요. 그래서 많이 준비를 해야 돼요.”라고 한다. 함께 준비를 하고 있던 단골 한 사람은

정말 엄청난 양을 준비해요. 진적굿을 할 때는 단골네들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거든요. 어림잡아도 수백 명이 이 날 오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까지도 일일이 다 준비를 하세요. 아마 보통 사람들 같으면 병이 날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손수 준비를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아요.”란다.

 

본인을 믿고 따르는 단골들이 잘 살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진적굿. 신령을 제대로 위해야 단골들이 복을 받을 것이 아니냐면서 음식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 사람이 못하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라는 생각을 든다.

 

9일 오전부터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 소재한 고성주(, 60)씨의 집 앞에는 화환이 즐비하게 놓였다. 그리고 연신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간다. 이 날은 매년 음력 3월과 107일에 행하는 진적굿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진적굿이란 맞이굿이라고도 부르며, 단골이 자신을 따르는 수양 부리들을 위해 안녕을 기원하는 굿이다. 봄에는 꽃맞이, 가을에는 단풍맞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진적굿이 계절에 따라 그만큼 큰굿이기 때문이다.

 

굿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무격들에게 있어서는 이 진적굿이 가장 장엄하고 큰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 보존회 고성주 회장의 전안(신령을 모셔놓은 신당)은 우리나라의 무격들의 집 가운데서도 가장 넓다고 한다. 그만큼 신령들을 위한 곳을 하기 위해 차려놓은 재물도 만만치가 않다. 진적굿을 올리기 며칠 전부터 직접 다식과 약과들을 직접 만든다.

 

 

널려놓은 굿 상만도 몇 개

 

신령들의 화분을 걸어놓은 앞에 상을 진설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외에도 산거리 상, 제석상, 천궁맞이 상과 뒷전 상까지 차려놓았다. 고성주 회장은 경기도의 전통 안택굿을 지켜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하고 있다. 진적굿을 할 때마다 이 집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4대를 이어오면서 경기도의 굿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숱한 신문기사와 방송 등에 출연을 했지만, 정작 아직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고성주 회장의 굿을 아는 학자들은 늘 그것을 안타까워한다. 이제 4대째 집안으로 대물림을 한 경기도의 전통 안택굿이, 고회장이 제대로 전수를 시킬 수가 없으면 그 대가 끊어지질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문전 앞 지신밟기로 굿을 시작해

 

과거 경기도에서는 안택굿을 하기 전에 풍물패들이 문 앞에서 한바탕 마당굿을 펼쳤다. 이는 사람들에게 굿을 한다는 것을 알리는 효과도 있지만, 그보다는 풍물을 울려 신령들에게 감응을 해주십사 하는 의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대문 앞에서 풍물을 치던 일행은 마당 안으로 들어가 천궁맞이 상 앞에서 한바탕 울리고 난 뒤 절을 하고 물러선다.

 

전안에서는 무녀 임영복(, 54)의 앉은부정이 시작되었다. 앉은부정은 무녀가 장구를 치면서 집안의 모든 부정과 사람들의 부정을 풀어내는 부정풀이 무가를 구송한다. 그리고 중간에 굿상의 부정을 가시기 위해 향물과 고춧가루를 푼물로 둘러낸다. 뒤이어 소지에 불을 붙여 굿상을 한 바퀴 들러내는데, 이는 모두 부정을 가시게 하는 의식이다.

 

 

고성주 회장의 굿을 보고 있노라면, 그 누구도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재주면 재주, 춤이면 춤, 소리면 소리, 그 어느 것 하나도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18세에 내림을 받고 벌써 43년이라는 세월을 굿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해 경기도의 전통굿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하였다.

 

굿은 축제이다. 특히 경기도의 굿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이다. 굿판에는 악사 4명과 무녀 5명이 동참을 했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이 모여 굿판을 함께 즐긴다. 안택굿이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기 위한 굿이기 때문이다. 굿을 열린축제라고 이야기 하는 것도, 모두가 빈부의 구별이나 노소의 구별이 없이 함께 웃고 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고성주의 질펀한 대감굿

 

바깥마당에서 하는 천궁맞이는 모든 신령들을 굿판으로 청하는 굿거리이다. 이때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의 옷을 차례로 입어가면서 축원을 한다. 대신할머니 거리에서는 자신의 점상을 펼쳐놓고 사람들을 점을 보아주기도 한다. 이래저래 굿이 재미있어 진다. 이 집의 수양 부리들이 대물림 신도가 되는 것도, 이렇게 지극히 정성을 다해 봄가을로 진적굿을 열기 때문이다. 남들이 1년에 한 번 하는 것도 버거워 하기 때문이다.

 

안마당에서 천궁맞이를 마치고 난 다음, 진적굿을 하는 중간에 고성주의 문하생들이 추는 재인청 춤도 함께 곁들여졌다. 고성주 회장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재인청 춤을 어릴 적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 춤 역시 굿판에서 꼭 함께 무대를 만들어주고는 한다.

 

 

고성주 회장의 진적굿의 백미는 대감거리이다. 대감거리를 할 때는 신도들에게 술잔을 나누어주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각 신도들마다 대감시루를 받아간다. 진적굿을 하는 날이 되면 이른 새벽부터 각 신도들의 몸주대감(각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지키는 몸주가 있다고 한다)의 시루를 직접 찐다.

 

시루는 많은 때는 100여 개가 넘는다. 그리고 이 신도들은 모두 대감쾌자를 한 벌씩 준비를 해놓았다. 고성주 회장은 그 쾌자를 한 번씩 입어가면서 대감시루를 머리에 이고 놀린다. 그리도 그 시루를 신도들에게 모두 나누어준다. 신도들은 그 시루를 신주 모시듯 하는 것도, 자신의 몸주대감 시루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택굿을 지키고, 수양 부리들의 안녕을 위해 일 년에 봄가을로 두 차례씩 열리고 있는 고성주의 진적굿. 그 굿을 보고 있노라면 장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대에 누가 이렇게 굿을 할 수 있을까? 굿판에 동참해 함께 어깨를 들썩일 수 있는 것도, 아마 이 장엄함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장엄함은 고성주 회장만이 할 수 있는 굿이었다.

 

신을 모시는 사람들을 흔히 ‘기자(祈子)’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통칭할 때는 ‘무격(巫覡)’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무(巫)’란 여자를 말하고, ‘격(覡)’이란 남자를 말한다. 즉 무격이란 여자 무당인 만신(=많은 신을 모신다는 뜻이다)과 남자 무당인 박수를 통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신을 모시는 무격들은 일 년에 한번, 혹은 3년에 한번 정도 자신이 모시는 신령들을 위한 굿을 한다. 이를 ‘맞이굿’ 혹은 ‘진적’이라고 한다. 맞이란 신을 맞이하는 의식이라는 뜻이고, 진적이란 아마도 좋은 음식이나 맛있는 음식을 쌓아 놓은데서 붙여진 명칭이란 생각이다.

 

 

무격들의 굿판 중 가장 큰 굿인 맞이굿

 

11일(화) 수원시 인계동에 거주하는 승경숙(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이수자)씨의 맞이굿이 열렸다. 맞이굿은 처음에 ‘천궁맞이’라고 하여서 밖에서 굿을 한다. 고깔에 장삼을 입고하는 천궁맞이는 신령들을 맞아들이는 의식이다.

 

천궁맞이가 끝나고 나면 안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굿이 시작된다. 맞이굿은 자신이 모시는 신령들을 모셔 놓은 전안에서 하게 된다. 맞이굿이란 자체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많은 신령들을 위하는 굿이기 때문이다. 맞이굿은 무격들이 하는 의식 가운데 가장 큰 의식이다. 이때는 자신들의 단골들을 다 초청을 하기 때문에, 굿판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도 맞이굿의 특징이다.

 

 

또 무격이 맞이굿을 할 때는 혼자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 친분이 있던 무격들을 초청하고, 악사들을 초청해 한바탕 신나는 굿판을 벌이기 때문이다. 이날 맞이굿을 한 승경숙씨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의 이수자이자, 경기남부지부장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도당굿을 배우는 전수생들까지 합세를 했다.

 

경기도당굿도 볼 수 있는 즐거움

 

대개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무격들이 맞이굿을 할 때는 ‘선거리굿’(서서 굿을 진행하기 때문에 선거리굿이라고 한다. 이와 대비되는 말로 충청도 지역의 송경(誦經) 위주의 굿을 ‘앉은거리굿’이라고 부른다)으로 진행한다. 선거리굿은 신령을 나타내는 신복(神服)을 거리마다 갈아입으면서 진행을 하게 된다.

 

경기도당굿은 과거에는 신복이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화랭이 위주의 굿이었기 때문에, 주로 등걸잠방이에 남쾌자 하나를 걸치고 굿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맞이굿은 전안에 모셔진 신령들을 위하는 굿이다보니, 각 거리마다 신복을 갈아입고 굿을 한다. 이 날 맞이굿의 특별한 점은 경기도당굿의 절차와 선거리굿의 절차가 복합적으로 나타나,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냈다는 점이다.

 

 

무격이 신령들을 위하는 맞이굿을 할 때, 단골들이 모여드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각 거리마다 신탁(神託)이라는 ‘공수’를 주기 때문이다. 공수란 무격의 입을 빌어 신령이 단골들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행위를 말한다. 즉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을 조심하라’는 등의 말을,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달에 좋은 일이 있다’ 등의 이야기이다.

 

신탁인 공수는 맞이굿을 할 때 가장 영험하다고 한다. 그래서 단골들은 맞이굿을 할 때는 앞 다투어 몰려든다. 무격들이 공수를 할 때 단골들에게 겁을 주는 행위는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올바른 무격이라는 단골들에게 수도 없이 ‘도와주마, 생겨주마’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전수생들도 한 거리씩 기량을 보여

 

맞이굿에서는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그것은 어린 애동(내림굿을 하고 무격이 된지가 오래지 않아 굿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들도 한 거리씩 굿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맞이굿에서 한 거리씩 익히면서 굿을 배우는 것이다.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해요”

 

이날 애동으로 대신(대신할머니를 상징하는 노랑색 몽두리 신복) 신복을 입고 굿판에 들어서면서 최남수(내림굿을 한지 5년이 된 애동)씨가 한 말이다. 굿판에 흔히 큰 만신이라고 하는 선생과 단골들이 줄을 지어 앉아있는 곳에서 굿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애동들이 굿을 할 때는 선생들이 일일이 대꾸를 하면서 맞장구를 쳐준다. 그렇게 해야 애동들이 편하게 굿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밤새 상차림을 준비를 하고 오전 9시에 시작한 맞이굿은 밤 9시가 되어서 끝났다. 꼬박 12시간이 걸린 굿이다. 우리 굿은 직설적이다. 그 자리에서 공수를 주면서 수도 없이 ‘도와주마’라고 이야기를 한다. 하기에 굿판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기분 좋게 돌아갈 수 있는가 보다.

9월 24일(월) 낮, 화령전 앞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서 피리를 불고, 장구와 제금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화령전 솟을삼문 앞 길 건너편 2층집 ‘용궁아씨당’이라는 간판을 건 무속인의 집에서 울리는 소리다. 굿판이 벌어졌다. 한 때 굿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던 내가 아니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나는 곳을 찾아들었다. 진적굿이 막 시작되었다. 진적굿이란 ‘맞이굿’이라고도 하는데, 신을 모신 기자(祈子)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을 위하여 벌이는 잔치판이다. 봄에 하면 ‘꽃맞이 굿’이라고 하고, 가을에 하면 ‘단풍맞이 굿’이라고도 부른다.

 

 

 

유독 수원에 무속인이 많은 까닭은?

 

수원에는 유난히 신을 모신 무녀들이 많이 거주한다. 이렇게 수원에 무녀들이 많은 것은, 역사의 한 단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조선조 때는 유생들로 인해, 도성 안에 있는 많은 무녀들이 성 밖으로 쫓겨나고는 했다. 성 밖으로 나온 그들은 무녀(巫女)들은 노량진을 건너야 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던 악사 등 남자들은 뚝섬을 건너야만 한다.

 

이런 연유로 인해 ‘노들만신’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한강을 건너 노들로 모여 든 도성의 만신들은, 먹고 살 길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을 터. 이들은 몰려든 곳은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드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하기에 이들은 화성 축성을 위해 수많은 노역자들이 몰리는 곳으로 찾아왔을 것이다.

 

 

 

또한 화성 축성을 마친 후에는 수원에는 장안문 밖인 영화역 인근과, 팔달문 앞에 커다란 장시가 형성이 된 것을 알고 수원 화성 인근에 보금자리를 틀었을 것. 매향동을 비롯하여, 지동, 매교동, 남수동 등 화성의 안과 밖에 이렇게 무녀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원에 큰만신들이 대거 포진한 것도, 이렇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과 장시는 함께 역사의 길을 걸었던 것.

 

“정조대왕 수위에서 놀구나가오”

 

“해동은 대한 국 수원이라 대목 안에 팔달산 내린 줄기 이 터전에 들었으니, 오늘 애동제자 단풍맞이 이 마전에 정조대왕 수위에서 정성 덕 입사와....”

 

스승인 승경숙 선생(여, 58세)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를 하는 용궁아씨 정현옥(여, 43세)이 천궁맞이 굿 상 앞에서 소리를 한다. 이렇게 신령을 위한 진적굿은 일 년에 한 번 , 혹은 3년에 한 번씩 하게 되는 굿이다. 또한 이 진적굿은 무녀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정성을 드려 제물을 차리고, 어느 때보다도 신경을 써서 펼치는 굿판이다.

 

 

 

 

우리는 흔히 ‘굿은 굿(Good)이다’라고 한다. 그것은 ‘굿판은 열린 축제의 마당’이기 때문이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올 수가 있다. 그리고 함께 웃고 울며 시간을 보낸다. 굿판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많다는 것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이런 굿판은 많은 것을 나누는 곳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도 나누고 복도 나눈다. 나누어 주는 문화, 그것이 바로 굿문화이다.

 

그런 굿판이 요즈음은 자꾸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고 있다. 사람들과 함께 밤새 즐기던 굿은, 이제는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고가 들어간다. 한 낮에도 조금만 시끄러우면 신고를 해댄다. 그것이 우리의 전통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던 한 마당인 굿이, 자꾸만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게 만든 이유이다.

 

그 선생에 그 제자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용궁아씨 정현옥을 만났다. 내린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물었더니, 이제 4년이란다. 4년 밖에 안 된 애동(내린지 얼마 되지 않는 무녀들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이 천궁맞이 한 석을 이렇게 걸판지게 해 낼 수 있다니, 그도 놀라운 일이다.

 

 

 

“어머니(스승 승경숙을 말한다. 승경숙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의 이수자이다)에게서 제대로 학습을 받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언제나 정말 열심히 학습을 시키시기 때문에 이만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무속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굿은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다. 내림을 받았다고 해서 굿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굿은 선대의 무녀에게서 배워야만 한다. 굿을 배울 때는 상 차리는 법, 옷 입는 법, 지화 만드는 법 등 많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을 다 배우려면 적어도 10년 세월이 필요하다는데, 정현옥은 그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밖에.

 

“내리고 난 뒤 올해 세 번째 맞이굿인가 보네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작게나마 신령님들을 위하는 굿을 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처음에 신병이 왔을 때는 정말 어려웠죠. 재물은 재물대로 손해를 보고, 잠을 자도 자는 것 같지가 않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고요. 눈만 감으면 환청이 들리고, 눈을 뜨면 무엇이 보이고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제가 내림을 받지 않고 있으니, 동생들과 내가 교대로 신병을 앓았고요. 할 수 없이 제가 내림을 받았습니다.”

 

무녀들이 신병을 앓을 때는 대개 세 가지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 첫 번째는 정신적인 것이다. 남들은 듣고 볼 수 없는 것을 본인은 보이고 들리기 때문이다. 병원을 찾아도 아무런 증세가 없다. 다음은 물질적인 신병이다. 재산이 이유도 없이, 주위 사람들이 사고가 나거나 해서 다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병은 육체적인 신병이다. 대개는 중병에 걸리는데도 이들은 죽지를 않는다. 이 세 가지는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내림을 거부하면 가장 무섭다는 ‘인다리( =人橋)’ 현상이 나타난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한 사람씩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무녀 중에서는 가족 5명을 보내고 난 뒤, 내림을 받은 사람도 있다.

 

“힘든 것은 말도 못하죠. 그러나 어차피 이렇게 제자의 길로 들어섰는데 어쩌겠어요. 지금은 오히려 담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골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죠. 학습에도 더 열심을 내야 하고요”

 

긴 시간 붙들고 있을 수가 없다. 아직도 그 많은 제차를 다 하려면 시간이 바쁘기 때문이다.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걸어야만 하는 무녀의 길. 이제 이들이 하는 굿 행위도 우리는 하나의 역사 속에서 창출된 문화로 인정을 해야만 한다. 굿은 총체적인 예술이다. 흔히 악가무희(樂歌舞戱)가 그 안에 다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굿은 우리 전통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이제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하기에 ‘신들린 사람’으로 그들을 대하기보다는, 우리의 한 문화를 이어가는 사람들로 설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또 얼마 뒤 더 많은 재주를 배운 정현옥의 굿판을 기대해 본다.

태평소 소리가 골목 안을 찢어놓게 울린다. 징과 바라가 그 소리에 더해진다. 빠른 박자로 두드려대는 소리에, 사람들이 골목 안으로 모여들었다. 대문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무슨 일인가하여 집안을 들여다본다. 4월 8일(일)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274-36호, 이정숙의 봄맞이 굿이 열리고 있다.

 

맞이굿이란 신을 모시는 기자(祈子 : 흔히 무속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과 수양부리(자신의 신자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혹은 삼 년에 한 번씩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봄에는 ‘꽃맞이 굿’. 가을에는 ‘단풍맞이 굿’이라고 부르는 이 맞이굿은 기자들에게는 가장 큰 굿이기도 하다.

 

 

굿은 마을의 축제였다.

 

부천 원미구 도당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강남시장 뒤편의 주택가 골목이다. 이층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 건 오색의 천이 바람이 흔들린다. 마당에는 상이 차려져 있다. ‘천궁맞이’가 시작되었다. 천궁맞이란 하늘에 굿을 하는 것을 알리고, 모든 신령들이 굿청으로 좌정을 하라는 ‘신맞이 의식’이다.

 

이 날의 당주 이정숙이 불사제석의 신복을 걸치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거성을 한다. 좁은 집안을 감안해 골목길에도 마을 주민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과거 우리네 풍습에 어느 집에서 굿이 있다고 하면, 그 날은 온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누구나 굿을 하는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나누고, 굿판에 함께 동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어른도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 전체의 축제였던 것이다.

 

 

인간의 서열보다 진한 신의 서열

 

굿판에서 사람들은 굿을 하는 무녀들의 신탁이라는 ‘공수’에 울고 웃고를 반복한다. 조상거리라도 할 냥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다 알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날 이정숙의 맞이굿에서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기자들은 내림굿을 해준 사람들을 ‘신의 부모’리고 하고, 내림을 받은 사람들을 ‘신의 자식’이라고 한다.

 

이 신의 부모나 신의 자식은 인간세상의 부모자식과는 또 다른, 신으로 인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다, 나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부모와 자식이 이루어진다. 이정숙은 수원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의 ‘신딸’이다. 이날 이정숙은 자신의 맞이굿을 하면서 고성주에게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함께 거행했다.

 

무당들은 작두를 탄다. 그러나 아무나 작두를 타는 것은 아니다. 작두별상 등 작두신령이 모셔져야 작두를 탄다. 이런 작두를 타는 형태는 내림을 주관한 신의 부모가 작두를 탈 경우 ‘작두물림’이라는 절차를 통해 ‘신의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 작두물림을 하는 의식은 상당히 성스러운 행위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대물림을 해야 하는 작두신명

 

“저는 신어머니인 최씨어머니에게서 작두물림을 받았습니다. 제 신어머니는 신딸 5명에 신아들 저 하나가 있었는데, 누나들은 아무도 작두물림을 받지 못했죠. 저 하나만 작두물림을 받았어요. 제가 내림을 받고 난 뒤 한 2년 정도 있다가 작두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받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당시는 마을에서 작두를 타는 만신이 왔다고 하면, 인근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고는 했다. 그만큼 작두를 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것도 작두물림을 한 작두만신이라야, 무당으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요즈음처럼 작두를 그냥 내림을 받았다고 타는 것이 아닙니다. 작두는 꼭 신의 부모에게서 작두내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올바른 신명이 신의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죠. 우리 신딸들도 작두를 모셔놓고 있고, 그동안 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작두물림을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한 신명 줄을 가진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죠.”

 

우리네들이야 이런 영적인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찬찬히 설명을 듣다가 보니,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옛 말에는 ‘영험은 신령이 주나, 재주는 배워야 한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으면 영험은 신령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굿을 하고 굿거리 재차를 익히고, 음식을 만들고 하는 등, 이런 모든 굿에 관한 것은 신의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저는(이정숙) 아버님(고성주)에게서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이 나면서 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의 신의 자식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작두물림을 받으므로 해서, 이제야 비로소 이버님의 신딸이 되었다는 것을요.”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잘못하면 눈물이 날 장도로 꾸지람을 하고, 그런가하면 포용을 하는 마음이 너무 커, 오히려 누가 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고성주의 신딸들은 작두물림을 받던 날 당의를 입었다. 그것은 고성주가 모시고 있는 작두별상이 남별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먼저 고성주가 작두를 갖고 논다. 그리고 작두를 신딸인 이정숙에게 넘겨주자, 작두를 갖고 마당에 마련한 작두를 탈 곳으로 나갔다.

 

작두를 잘 못 타다가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다. 부정이 타 발을 잘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작두 위에 오를 수 있어야, 영험한 만신으로 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작두공수’가 제일이라고 한다. 즉 신탁인 공수 중에는, 작두위에서 주는 공수가 제일 영험하다는 것이다.

 

작두 위에 오른 이정숙이 오방신장기를 받아들고 단골들에게 공수를 준다. 그리고 작두공수를 마친 후 작두위에서 내려섰다. 다음 날인 9일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이곳에서는 역시 고성주의 신딸인 박현주에게 ‘작두물림’이 있었다. 올 봄 맞이굿에서 두 명의 신딸에게 고성주가 작두물림 의식을 행한 것이다.

 

“이제는 이 아이들이 제 신명을 따라 작두를 탈 때가 되었죠. 대개 작두물림은 맞이굿에서 전해지는 것이 정상적인 물림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두 명의 신딸들이 비로소 제 신명을 이어받은 것이죠. 이런 의식은 저희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박현주가 작두 위에 올라섰다. 순간 일갈을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그리고 오열을 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 작두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신도들은 눈물을 흘린다. 작두는 왜 눈물을 흘리게 만들까? 누가 그 서슬이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기를 좋아할까? 어찌 보면 신령의 사람들이라는 징표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듯도 하다. 그런 작두물림을 받았으니 어찌 슬픔이 밀려오지 않을까. 이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령의 여인이 된 것이다.

“아버님의 손을 잡는 순간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저에게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 나는 이제 신령님에게 시집을 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바람이 불지를 않았으면 작두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부천 도당동에 거주하는 고성주의 큰 신딸인 이정숙의 말이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 거주하는 작은 신딸이라는 박현주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작두를 어떻게 타지’ 하면서 걱정을 했는데, 아버지가 손을 잡고 작두를 넘겨준 후에는 그런 걱정이 싹 달아났어요. 얼른 작두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이틀 동안 두 명의 신딸들에게 작두물림을 해준 고성주는 이렇게 말한다.

 

“작무물림을 핼 때는 제 속은 숯검뎅이가 다 됩니다. 작두 위에 제대로 오르기는 할까라는 걱정부터, 과연 잘 불리는 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죠. 작두날을 밟고 서는 것만 보아도 잘 불릴 것인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틀 동안 두 명의 여인이 작두신령의 아내가 되었다. 그 작두신령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같은 신명을 가진 무한한 힘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신의 부모와 신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맙다고 큰절을 하는 신딸들. 아마도 고성주의 마음은 시집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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