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는 보물 제97호로 지정된 거대한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12m 높이의 자연 암벽 가운데 약 6m 정도의 네모 난 크기의 방형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두 구의 불상을 나란히 배치했다. 이렇게 쌍 좌상으로 조각을 한 예나, 자연 암벽에 감실을 조성한 경우는 극히 희귀한 예로 주목받고 있다.

 

연풍에서 충주 방향으로 새로 난 3번 도로를 이용해 나가다가 보면, 조령교를 지나 조령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신풍삼거리 지방도로 내려 3번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내를 끼고, 좌측 계단 위 암벽에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눈이 채 녹지 않았을 때 찾아간 원풍리 마애불 가는 길은 그야말로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올라야 했다. 쌍 좌상으로 조성된 마애불을 바라보고, 눈이 쌓인 계단을 오르니 염불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마애불 앞에 천막을 치고, 안에서 염불을 하고 있다. 무슨 염원이 있기에, 추운 날 저리도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마애불 조성 누가한 것은 나옹조사일까?

 

원풍리 마애불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가 설법을 할 때 다보탑과 함께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와 다보여래를 함께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주 불국사에 조성된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을 상징한다는 이러한 쌍 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 예이다.

 

 

 

자연암벽을 움푹하게 파서 자연적인 감실을 만든 것도 그러하지만,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두 분의 여래와 작은 화불을 조각한 것은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 범어사에 묵고 있던 고승 여상조사가 조성했다고도 하고, 고려 때 나옹선사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인근 지역의 거대마애불의 한 형태로 보아, 고려중기인 12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전설에 보이는 나옹선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란 유명한 글을 남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분이다. 1320년에 태어나 1376년에 입적한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왕사이며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여상조사는 신라 말에 범어사에 묵었던 고승이라는 점을 보아도, 원풍리 마애불을 조성한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시대가 맞지를 않는다. 과연 누가 이 거대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이여송이 두 부처님의 코를 망가트렸다?

 

감실 안에 조성된 두 분의 여래상을 보면 넓적한 얼굴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이 마애불은 가늘고 긴 눈과 큰 입, 평평한 가슴 등 형식화된 면이 많이 보인다.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 힘든 광배에는 작은 화불들이 5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식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현재 어떠한 장식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두 분 마애좌상을 보면 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높은 곳에 조성한 마애불의 코가 어떻게 떨어져 있는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온 중국의 이여송이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그 마애불의 모습이 장사와 같다고 하여 코를 떼어갔다고 한다.

 

 

아마도 이여송은 이 마애불로 인해 주변에 장사라도 태어날 것을 염려했는가 보다. 또 일설에는 인근 마을에서 사는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코를 떼어갔다고 하지만, 그 높은 곳을 올라 코를 떼어갔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내려오면서 도로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니, 자연 바위 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작은 폭포처럼 보인다. 저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올려다 본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우는 듯하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많은 얼굴들. 그 온기 없는 얼굴이 오히려 더 따듯하게 느껴진다. 아마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느끼고 싶음인가 보다.

7월 15일. 이틀간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멈춘 듯하더니, 이번에는 날씨 몸을 무겁게 할 정도로 덥다. 구례 사성암.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인 사성암은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오산 꼭대기에 있는데 도선굴에는 원효와 의상, 도선과 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대가 있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봉성지』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셔틀버스로 운행하는 사성암 가는 길


현재 사성암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인 몇 채 바위 틈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돌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전각 안에는,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음각마애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초반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마애상이 보호하는 이 적각 앞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구비진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네 분의 고승이 도를 깨우쳤다는 도선굴로 오르다가 보면, 800년이 지났다는 고목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괴목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소원바위. 그 앞에는 명패를 적은 나무들을 가득 걸어놓았다.

 

 


지금은 밑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로 사람들을 사성암 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왕복요금은 3,400원이며, 언제라도 사람들이 차면 출발을 한다. 예전에 이곳을 걸어 올랐을 때 3시간이 넘었던 기억을 하면, 이제는 답사도 참 편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굴을 지나면 절경이 펼쳐져


산왕전에 들려 참례를 하고 도선굴로 들어선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축축한 것이 습기가 가득하다. 예전 고승들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참선을 한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 곳에서 더욱 더 인간의 힘든 것을 이겨내며 스스로 달굼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굴을 나오면 절벽에 붙들어 매듯 만들어 놓은 나무로 짠 길이 나온다. 그 앞으로 펼쳐지는 섬진강의 모습.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그러나 붉은 섬진강만 보일 뿐, 흐린 날이라 그 앞 절경이 감춰져있어 아쉽기만 하다.


돌아내려오는 길에 보니 젊은 사람들이 괴목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저 나무처럼 그리 오랜 세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늘 다녀보지만 좋은 절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찾아가는 것이지만.


사성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한 장 촬영을 하려고 하니 문화재라서 사진을 찍으면 인된다고 한다. 요즈음 답사하기가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사진촬영금지 때문이다. 그래도 허락을 받고나서 대개는 촬영을 하지만, 어떤 곳은 아예 딱 잘라 거부를 하는 곳도 있다. 그럴 때면 참으로 씁쓰레하다. 사진촬영을 막는다고 문화재보호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말이다.

 

 

7월 23일, 30도를 훌쩍 넘은 살인적인 더위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이런 날 이천에 있는 설봉산 영월암에 올랐다.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822호 마애여래입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남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문화재라는 것을 한 번만 보면 되지 않나?’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한번 답사를 한 문화재라도 갈 기회가 있으면 다시 들리고는 한다. 그것은 문화재란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바위를 누가 떠 매고 갈 것도 아닌데’라고도 한다. 그래도 지켜보아야만 할 것이 바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이다.

 

 

이천 설봉산 영월암(위)과 자연암석에 새긴 보물 마애불(아래)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도 없는데


주차장에서 영월암까지의 거리는 1.5km이다. 그리 높지 않은 설봉산이지만, 차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길이다. 거기다가 그 무더운 날에 한 어깨에는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있다. 돈을 준다고 오르라고 해도 마다할 산행이다. 하지만 절집을 찾아 참선을 하는 마음으로 주변 경치를 보면서 걸음을 옮긴다.


옷은 모두 젖어버렸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버린 몰골은 꼭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그렇게 오른 영월암. 대웅전을 비켜 뒤로 오르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마애불은, 머리 부분과 손 부분은 얇게 돋을새김을 하였고 나머지는 선으로 음각하였다.

 

 

 

 

고려 초기에 조성한 거대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여인이여 무슨 사연이 있길래


마애불 앞에 한 여인이 절을 하고 있다. 이 복중에 어찌 그리 애를 닳는 것인지. 수도 없이 절을 하는 모습으로 보아, 아마 천배를 하는 듯하다. 물을 마시면서 해도 자칫 탈진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저렇게 이 복중에 절을 하다가 보면, 자칫 탈진이 올 수도 있는데. 나도 더운 복중에 천배를 해보았기에, 그 진한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저렇게 간절할까? 아마도 이렇게 자신을 던져 기원을 하는 것이라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곁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것조차 죄스럽다. 그저 마음속으로 함께 기원을 하는 수밖에.

 


“천년 세월 이곳을 지켜 오신 설봉산 마애불님. 저리 간절히 비는 것이라면, 꼭 들어주세요. 세상엔 나쁜 사람들도 잘 사는데, 저리 땀을 흘리는 사람의 사연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세상을 지켜가는 것일 테니.”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게 만나는 것은 역시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그 특성상 낮은 지역보다는 산 정상 부근의 암벽에 많이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마애불은 나에게는 특별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마애불을 따로 한 권의 책으로 엮고 싶은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번지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호인 ‘삼막사마애삼존불(三幕寺磨崖三尊佛)’이 소재한다. 조선조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마애삼본불은 삼막사의 칠성각 내에 봉안되어 있다. 마애불은 암벽을 얕게 파고 조성하여, 칠성각이 전실 역할을 하고 있다.

 

 

걸으면 지쳐버릴 듯 높은 마애불

 

지금은 삼막사까지 차로 올라갈 수가 있다. 물론 절집의 관계자들이 아니고는, 쉽게 그 길을 차를 몰아 갈 수가 없다. 아래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으면 한 시간 30분 정도가 소요가 된다.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 이곳을 걸어 올라가다가 보면 지칠대로 지친다. 땀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그저 얼굴 전체에서 샘이라도 솟는 듯하다.

 

그렇게 산 정상부근에 있는 마애삼존불이다. 삼막사 대웅전에서 이 마애불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지금은 계단으로 길을 잘 만들어 놓아 오르기가 수월하다. 삼막사 남녀근석을 앞에 두고 바위에 붙여 조성을 한 칠성각. 전각의 앞에 걸린 현판에는 ‘칠보전’이라고 적고 있다. 그 안에 마애삼존불이 바위에 부조로 조각이 되어있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본존불

 

이 마애삼존불은 조선조 영조 39년인 1763년에 조성이 되었다. 삼존불을 모신 칠성각이 영조 40년인 176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볼 때, 이 본존불은 칠성각의 주존인 치성광여래로 볼 수 있다. 삼존불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보살을 거느린 삼존불로 모두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본존불은 소발의 머리에 작은 육계가 있고, 전면에는 계주가 표현되었다. 그 은은한 얼굴에 미소가 후덕하게 보인다. 이런 상은 마애불 중에서도 그리 흔치가 않아, 이 마애불을 조성한 장인이 기능적으로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에는 눈두덩이 부푼 눈과 보수한 삼각형의 짧은 코, 작은 입 등이 묘사되었다. 어깨에 닿는 긴 두 귀와 얼굴에 연이어 어깨가 시작되어서 목은 달리 표현되지 않았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에는 내의의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불신의 전면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표현되었는데, 양 손은 복부에 모아 여의주를 들고 있다.

 

좌우의 협시보살은 일광, 월광보살

 

보존불의 좌우의 보살상 역시 머리에 쓴 삼산관과 가슴에 모은 수인을 제외하면, 본존불과 같은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인 모습을 볼 때, 얼굴과 당당한 어깨 등 상체의 표현에 치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렇게 마애삼존불로 치성광여래가 남아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6월 16일, 오랜 가뭄으로 인해 대지는 더욱 뜨거웠다.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산길을 걸어 만난 삼막사 마애삼존불. 처음 만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한 자료가 이제는 CD로 3,000장이 훨씬 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을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으니, 아마도 김정호 선생만큼은 안되도 이제는 구석구석 꽤 돌아다닌 듯하다. 하지만 아직 우리 문화재의 10분지 1도 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꼭 쓰고 싶은 책이 4권 정도이다. 하나는 정자요, 또 하나는 고택이다. 그리고 마애불에 대한 책도 한 번은 내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성곽이다. 성곽은 가는 곳마다 힘든 것을 마다하지 않고 한 바퀴를 돈다. 그것은 언젠가 성에 대한 역사이야기가 아니라, 성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쓰고 싶어서이다.

 

 

덕주공주가 청건했다는 덕주사를 가는 길

 

성을 보면 그 성곽이 얼마나 견고하게 쌓여졌는지 알 수가 있다. 월악산에 있는 덕주사를 오르다가 만나는 덕주산성.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의 남쪽에 있는 이 산성은 돌로 쌓은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덕주공주가 신라 말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덕주사를 오르는 길목에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이 덕주산성은 문경과 충주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이다. 덕주공주는 이곳 덕주사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은 고려 고종 43년인 1256년에 몽고군이 충주를 공략하자, 갑자기 구름, 바람, 우박이 쏟아져 적군들은 신이 돕는 땅이라 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덕주산성의 동문인 덕주루의 밖과 성안

 

월악대왕의 가호가 있다고 전하는 덕주산성에는 얽힌 이야기가 많다. 조선조 말기에는 명성왕후가 흥선대원군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할 것을 예상하고, 은신처를 마련하려고 이곳에 성문을 축조하였다고 전한다.

 

3개의 성문이 남아았는 덕주산성

 

덕주산성은 둘레가 32,670척(9,800m)에 이르렀던 성이다.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조선시대에 쌓은 남문인 월악루, 동문인 덕주루, 북문인 북정문의 3개 성문이 남아 있다. 한창 복원을 하고 있는 덕주산성의 남문은, 동창으로부터 문경으로 통하는 도로에 무지개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으로 되어있다. 아름답게 조성을 한 월악루는 좌우를 막은 석벽은 내외 겹축으로 길이가 100간이나 된다.

 

 

덕주루 성문의 안편 무지개아치와 덕주산성의 성벽 외부

 

덕주골 입구에 서 있는 동문인 덕주루는 남문과 비슷하며, 새터 말 민가 가운데 있는 북문은 내외에 홍예가 있으며 홍예 마룻돌에는 태극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덕주산성은 내외 5겹의 성벽으로 쌓여있다. 아는 축조연대가 각기 달라 시대에 따른 성을 쌓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5겹으로 된 철옹성에는 슬픈 사연이 많아

 

상덕주사의 외곽을 둘러싼 상성(내성으로 제1곽), 상, 하 덕주사를 감싼 중성(제2곽 동문주변), 그 외곽으로 하성이 있으며(제3곽) 송계 계곡인 월천의 남쪽을 막아 쌓은 남문과 북쪽의 북문을 이루는 관문형식의 외곽성(제4곽) 등 첩첩히 쌓여진 철옹성이다. 이러한 성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하여, 성문을 축조한 것일까? 권력이 무엇인지 참 슬픈 우리 역사의 한 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덕주루라고 현판이 붙은 동문. 보기에도 견고한 성이다. 문루 위로 올라가면 주변으로 쌓여진 성곽이 얼마나 첩첩이 쌓았는지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쌓은 성곽이 어떤 일로 다 무너져 내렸을까? 역사란 이렇게 모든 것을 피폐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북문인 북정문과 문 위에 복원한 문루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를 돌아보고 명오리를 지나 나오면 새터 말 도로변에 북문인 북정문이 있다. 최근 보수를 한 북정문은 평지에 있어서인가 동문인 덕주루보다 더 견고하게 축조가 되어있다. 북정문 곁에 놓여진 돌들을 보면 그 크기가 2m 가 넘는 것들이 있어, 이 덕주산성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북문 주변에 놓인 옛 성돌의 크기를 보면 덕주산성의 견고함을 알 수가 있다(위) 아래는 돌 축대를 쌓기 위해 사용한 석주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 역사의 훼손된 부분을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를 가나 온전히 보존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역사들. 그 안에는 우리 선조들의 땀과 피와 한이 맺혀져 있다. 그런 것 하나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과연 먼 후대에 우리의 자선들에게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 그러한 역사의 죄인으로 남지 않는 길은, 우리의 것을 온전히 보존하여 전해주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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