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구 연무동 주민센터 건너편은 화성의 동북공심돈 맞은편이 된다. 이곳에 작은 동산이 하나 있으니, 이곳을 동공원이라고 부른다. 이 동산 북쪽에는 커다란 바위 한 덩어리가 솟아있다. 이곳과 마주하고 있는 수원 북중학교 뒤편에도 높지 않은 산이 있는데, 그곳에도 연무동의 바위와 마주하고 있는 바위를 볼 수 있다.

 

이 두 곳의 바위를 퉁소바위라고 부른다,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에 소재한 바위를 할아비바위라 하고, 북중학교 뒷산의 바위를 할머니바위라고 칭한다. 이 바위에는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퉁소바위는 할아버지 바위와 할머니 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데는 슬픈 전설이 전한다.

 

 

슬하에 자손이 없는 것이 화근

 

연무동 바위부근에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은 부부였는데도 불구하고 슬하에 자손이 없어 늘 근심거리였다는 것. 두 부부는 결심을 하고 백일치성을 드리기로 했다. 남편은 현재 할아버지 바위가 있는 동공원 바위에, 아내는 북중학교 뒷산에 있는 바위에 치성을 드리기로 한 것.

 

아내가 북중학교 뒤편에 있는 바위로 치성을 드리러 떠날 때, 남편은 퉁소를 하나 꺼내주었다. 서로 보고 싶으면 참고 이 퉁소를 불어 무사함을 알리자는 것. 그렇게 두 사람은 열심히 치성을 드리면서 퉁소를 불어 서로가 무사함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백일치성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내의 퉁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편은 열심히 퉁소를 불었지만 끝내 아내의 퉁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남편은 백일치성을 드리는 중이라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백일치성을 다 마치고 북중학교 뒤편 바위로 달려갔으니, 아내는 이미 기력이 다해 숨을 거둔 뒤였다. 아내를 잃은 남편도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로 사람들은 연무동 동공원의 바위를 할아버지 통수바위로, 북중학교 뒤편에 있는 바위를 할머니 퉁소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겨울에 바람이 세차게 불면 이 바위에서 퉁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지금도 득남을 기원하는 사람도 있어

 

7일 오후 천천히 화성 동문을 벗어나 길을 건넜다. 퉁소바위 아래로 가니 퉁소바위공원이라는 돌로 만든 조형물과, 전설을 쓴 벽화로 조성한 조형물이 서 있다. 몇 명의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뛰어놀고, 그 뒤편으로 퉁소바위로 오르는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다. 천천히 길을 따라 오르다가 보니 산 정상아래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바위 앞으로 다가선다. 할아버지 퉁소바위다. 양편으로 솟은 바위틈으로 길이 나있다. 그리고 그 뒤로 소로 길이 보인다. 그 길로 심호흡을 하면서 걸어본다. 이 작은 숲 속에 참 잘 꾸며진 길이 이렇게 있다니. 그 길을 벗어나면 시야가 환하게 트인다. 그리고 퉁소바위전망대로 오를 수가 있다. 전망대 위로 오르면 저 건너편에 할머니 퉁소바위가 보인다. 이렇게 마주보고 서로 그리며 퉁소를 불었다는 것이다.

 

 

전망대를 벗어나 동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보라색 꽃을 피운 맥문동이 길 한편에 늘어서있다. 오후에만 꽃을 피운다는 맥문동이다. 잘 정비된 길을 걷고 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운동을 하러 나오셨는지 뒷짐을 지고 계단을 오르신다.

 

어르신 이 퉁소바위에서 정말 소리가 들리나요?”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왜 바람이 부는 날 들린다고 하죠?”

나도 잘 모르지만 아마 바람이 불면서 바위틈에 있는 틈 사이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이 바위에 가끔 치성을 드리러 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래요 어떤 사람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는지 아세요?”

아이를 못 낳는 사람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이를 갖는다고 하네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갖기 위해 백일치성을 드리다가 세상을 떠난 부부가 아니던가? 그런 정성이 있는 바위이니 아이를 낳기 위해 간절히 빌면 하늘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약수터 방향으로 내려가 물 한잔을 받아 마신다. 시원한 물이 금방 갈증을 풀어준다. 작은 공원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 거기다가 전설까지 곁들였으니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으랴. 다시 한 번 천천히 돌아본 길을 되짚어 본다.

 

충북 충주시 단월동 455에 소재한 단호사. 단호사의 창건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여 약사(藥寺)라 하였고, 1954년에 단호사로 이름을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단호사 경내 대웅전 앞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인 충주 단호사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은 현재의 자리가 원래의 터로 보이며, 1층 기단 위에 탑신부가 놓여 있다.

 

단호사 삼층석탑은 늙은 노송 아래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 540년 정도가 되었으며 나무의 높이는 8.5m에 나무둘레는 210cm 정도이다. 현재 충청북도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가지가 옆으로 뻗어 많은 지줏대를 설치해 놓았으며, 한 겨울에 만난 노송은 가지에 눈이 쌓여 그 멋을 더하고 있다.

 

득남을 하게 한 단호사 소나무

 

단호사의 소나무는 전설이 있다. 이 소나무는 조선 초기에 심어진 것이다. 수령이 540년 정도 되었으니 당연히 조선 초기에 심어졌을 것이다. 강원도 지방에 문약국을 경영하던 사람이 재산은 많은데 슬하에 물려줄 자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손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한 노인이 충주 단호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면 득남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자손을 바라던 이 사람은 단호사에 와서 불당을 짓고 불공을 드리고 살다가 적적하여 뜰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아침저녁으로 불공을 드리면서 소나무를 지극정성을 돌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고향 집 마당에다 소나무를 심고 안방에 부처님을 모셔놓은 꿈을 꾸었다는 것.

 

더욱 기이한 것은 고향에 있는 부인도 꿈을 꾸었는데 단호사 법당이 자기집 안방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부인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같은 꿈을 꾼 것은 서로 모여 살라는 부처님의 뜻으로 생각이 들어 강원도의 재산을 정리해 단호사로 법당 옆에 살림을 차렸다. 그 후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런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소원성취를 하였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

 

소나무의 가지가 덮고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에는 양우주가 가운데에는 탱주의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이 탑은 일부가 약가 부서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인 양우주를 새겼다. 1층 몸돌은 제법 높직하며, 4층 몸돌의 일부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어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 지붕돌은 두껍고 투박한 모습으로 경사면이 급하게 처리되었고,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충주 지방의 탑들이 대개 산 위에 놓여 있는 것에 비해, 이 탑은 평지에 서 있어 눈길을 끈다. 규모는 작으나 격식을 충실히 갖춘 안정감이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과 지붕돌의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 답사 힘든 여정의 연속

 

단호사는 큰 절은 아니다. 하지만 대웅전에는 보물 제512호인 단호사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어, 단호사는 처음 고려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전하는 소나무 전설에 보아도 이미 이곳에 조선 초기에 절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이 내린 날 찾아간 충주 단호사. 비록 화려하거나 많은 전각이 있지는 않았지만 지방색이 강한 철불 등으로 보아, 철불과 석탑이 모두 옛 자리에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길은 늘 험난하다. 어느 곳 하나 편안하게 문화재를 만나지 못한다. 더울 때는 몸에서 쉰내가 나게 걸어야 하고, 땀을 비오 듯 흘려야한다. 겨울에는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애를 먹기도 한다. 장마철이 되면 카메라라도 젖을까 걱정을 해야 한다. 그야말로 사시사철 고된 여정이다.

 

하지만 그런 고된 여정을 스스로가 택한 것이니 누구 탓을 할 것인가?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모두가 문화재에 대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몇 사람만 더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을 갖는다고 해도, 우리 소중한 문화재들이 지금보다는 더 보전이 잘 될 것이기 때문이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에 소재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9년인 서기586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월형산 월악사’였다. 신라 경순왕을 마지막으로 고려에 패망한 뒤, 경순왕의 첫째 딸인 덕주공주가 이곳에 들어와, 높이 13m의 거암에 마애불(보물406호)을 조성했다. 신라의 재건을 염원하며 덕주공주가 일생을 마친 뒤로, 산 이름은 월악산으로 절 이름을 덕주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주사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찾을 수 있다. 「덕주사는 월악산 밑에 있다. 속설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절을 창건했으므로 덕주사로 이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충주 산수조에 의하면「동으로 45리에 있어 청풍 경계를 이룬다. 상, 하덕주사가 있다.」 고 하여 지금의 마애불이 있는 절터를 상덕주사라 하고, 이곳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있는 지금의 덕주사를 예전에는 하덕주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주사가 있는 곳을 ‘절골’이리 불렀다.

 

예전에는 하덕주사라 불렸던 현재의 덕주사를 절골이라 했고, 상덕주사인 마애불사지는 윗절이라 했다. 현 덕주사의 경내에는 남근석 3기가 서있다. 절 안에 이렇게 많은 남근석이 서 있는 곳은 매우 흐ㅟ귀한 현상이다. 그런데 왜 적주사에는 남아를 낳기를 기원한다는 남근석이 서 있는 것일까?

 

덕주사는 남아선호 신앙이 깃든 곳이다. 서쪽 언덕 산 밑에는 네 기의 부도와 장대석이 있다. 6.25 때 불탄 뒤로 1963년에 지암화상이 5칸인 법당을 중창하였으며, 1985년 성주화상이 현재의 법당을 다시 중창하였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고려시대에 조성 된 약사여래입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월악산은 명산 중 명산

 

산 정상을 ‘영봉’이라고 부르는 곳은 백두산과 월악산 밖에 없다. 그만큼 월악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월악산을 수산리 쪽에서 바라보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같은 형상이라고 한다. 하기에 월악산은 여산신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소산에는 모두 산신이 있는데, 영험한 산인 지리산, 계룡산, 월악산 등이 여산신이다.

 

 

산의 명칭에 ‘악(岳)’ 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산은 ‘큰산’이요, 음기가 강한 산이라고 한다. 그러한 음기를 누르는 것이 바로 남근석이다. 덕주사 경내에 남근석이 많은 까닭은 바로 그런 음기를 누르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음기가 강한 곳에 남근석을 세우고, 그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덕주사는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음기를 누르는 남근석에 정성을 들여 득남을 기원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였을까? 덕주사 경내에 있는 남근석을 바라보면서 혹 이 남근석에는 ‘덕주공주의 염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이 남근석에 치성을 드려 많은 여인들이 아들을 낳아 강한 신라를 기대한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다.

 

 

충주댐으로 수몰된 한수면 역리에서 모셔온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9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약사여래입상은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다. 대좌는 따로 만들었으며, 두발을 윗면에 조각하고 몸체를 얹었다. 옛 정금사 터라고 전하는 곳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봉안하였다고 한다.

 

 

명산 중 명산이라는 월악산에 자리하고 있는 덕주사. 그 경내에서 볼 수 있는 남근석들. 지금도 그 남근석에 비손을 하는 부인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덕주공주의 염원이 이루어지려는지. 속모를 새 한 마리 울며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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