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1222, 2012년에는 1221일이 절기로 동지(冬至)’이다. 일반적으로 동지는 대설이 지난 후 15일째 되는 날이다. 동지에는 동지추위라는 것이 몰려온다고 한다. 아마도 이 추위가 겨울 중 가장 추운 추위일 것이다. 동지란 말 그대로 하면 겨울에 이른다는 것이다.

 

동지에는 태양이 가장 남쪽으로 기울어져, 밤의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날이다. 동지가 지나면 낮의 길이가 하루에 1분 정도씩 길어진다고 한다. 옛 풍습에는 태양이 기운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여, 동지를 설날로 삼기도 했었다. 지금도 우리의 속설에는 설날과 정월 대보름, 추석과 동지를 4대 명절로 부르기도 한다.

 

 

농한기인 동지, 그러나 농촌은 더욱 바빠져

 

사람들은 흔히 동지가 되면 농촌에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동지 때가 되면 들로 일을 하러 나가지는 않는다고 하여도, 그보다 몇 배가 더 많은 일을 집안에서 해야만 한다.

 

우선 동지 때 아녀자들은 겨울 찬거리를 준비한다. 김장은 이미 해 놓았다고 해도, 이것저것 밑반찬 거리를 만든다. 채소 등을 자르고 말려, 일 년 찬거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남자들이라고 빈둥거리는 것은 아니다. 밭으로 나가 보리를 밟기도 하고, 내년에 사용할 새끼 꼬기도 해야만 한다. 집안에서 하는 일이 동지를 전후 해 다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동지팥죽은 왜 시작이 되었을까?

 

동지에 팥죽을 먹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 설화에서 기인한다. 신라 때 어느 가난한 선비의 집에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그 나그네는 선비에게 부자가 되는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 주었다. 선비는 나그네의 말대로 따라했더니, 정말 가세가 부흥이 되고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돈은 많아졌으나 선비는 날마다 말라만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던 스님이 선비에게 이르기를 그 나그네는 도깨비이다. 도깨비를 퇴치하지 않으면 당신이 죽는다.’고 하면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말을 잡아 그 붉은 피를 사방에 뿌리라는 것. 말을 쉽게 구할 수 없는 선비는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사방에 뿌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하는 설화 속의 팥죽의 유래이다.

 

이와는 달리 6세기경 중국 양나라의 종름이 쓴 연중 세시기인 형초세시기에는 또 다른 유래가 전하고 있다. 공공씨의 아들이 죽어 역질을 퍼트리는 귀신이 되었는데, 생전에 붉은 팥을 무서워 해 팥죽을 쑤어 역질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동짓날이 되면 집집마다 팥죽을 쑨다. 동지 팥죽은 먼저 사당에 올린 다음 집안의 대문, 장독대, 측간, 부엌, 뒤뜰, 마구간 등에 한 그릇씩 갖다 놓는다. 그런 다음 집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구석구석에 골고루 뿌린다. 이는 물론 잡귀들이 붉은 색을 싫어해서이다. 즉 붉은 팥으로 쑨 팥죽을 여기저기 뿌려 잡귀의 근접을 막는다는 것이다.

 

 

팥죽을 왜 이렇게 많이 쑤었지?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사는 고성주끼(남, 60세) 동지때마다 이웃과 함께 팥죽을 나누는 고성주씨는 팥죽을 몇 솥을 쑨다. 팥만 해도 가장 상품으로 세말이나 불렸다. 거기다가 새알이라는 찹쌀도 한 말이나 만들었다. 전날부터 사람들이 찹쌀로 새알을 만들고 팥죽을 쑬 준비를 한다. 그리고 동지 새벽부터 몇 개의 솥에 팥죽을 쑨다. 웬만한 사찰보다 양이 더 많다.

 

고성주씨가 이렇게 팥죽을 많이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평소 이웃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고성주씨는 팥죽도 이웃에 사시는 홀몸어르신들에게 나누어드린다. 연세가 드신 분들이 팥죽 한 그릇 해 드시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팥죽이 다 끓으면 용기에 담아 이웃에 나누어주고는 한다. 주민의 이야기에서 평소 고성주씨의 됨됨이를 알 수가 있다.

 

그 분은 언제나 찾아가 도와달라고 해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 분이 마을에 함께 산다는 것이 고마운 일이죠. 동지 날에도 수십 집의 어르신들께 팥죽을 나누어 드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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