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소재하고 있는 내소사. 년 중 아무 때나 찾아가도 아름다운 절집이다. 하지만 난 굳이 내소사를 가려면 가을에 가라고 권하고 싶다.

 

내소사의 가을은 보종각 앞 수령 1,000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이 된다. 이 나무의 나이를 볼 때, 내소사가 얼마나 오래 된 고찰인가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령이 천년이라니. 아마도 1982년도에 부안군의 보호수로 지정이 되었으니, 자금은 지정을 받은 후에도 벌써 30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나무의 둘레가 7.5m에 높이가 20m나 되는 거목이다. 가을이 오기 시작하는 내소사의 이 보호수는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황홀해진다. 하물며 단풍으로 물든 나무를 본다면 오죽할까?

 

틀어진 기둥,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소사에 가면 또 한 가지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설선당과 요사이다. 이 전각을 바라보노라면, 그 기둥에 눈길이 멈춘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제대로 된 절집 한 곳을 찾아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기둥이 참으로 사람을 뿌듯하게 만든다. 올곧지 않고 뒤틀어진 기둥. 그 기둥에는 정말로 부처님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세상에 쓸데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기둥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멋대로 휘어진 이 기둥에서 우리는 참 답답한 세상에서 행복해 질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음에 감사를 하게 된다.

 

돌담 위에 돌탑들

 

누가 그랬을까? 네모난 막돌로 가지런히 쌓은 돌담 위에 누군가 작은 돌탑들을 쌓아놓았다. 아마도 저 돌들을 하나씩 올리면서 마음속으로 간구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지런한 작은 돌탑들이 돌담 위에 죽 늘어져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지 않은지. 내소사는 그렇게 경내를 돌아보면 어디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듯 보인다.

 

 

그 돌담 안에 무설당(無說堂)’ 이라니. 구태여 설법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염화시중의 미소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는 뜻인지? 그저 세상 살아가면서 저렇게 미소 하나만으로도 모든 속내를 알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이 어디 있을까? 내소사가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절집

 

내소사, 참 희한한 절이다. 왜 내소사는 아무리 많이 보아도 질리지가 않는 것일까? 아마 전생에 이곳과 깊은 인연이 있었는가도 모르겠다. 하기에 현생이 이렇게 수도 없이 절집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전생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을 것만 같다. 그저 이 곳에서 한 생을 보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부안 내소사. 봄도 오지 않았는데 무슨 가을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지난 자료를 뒤적이다가 문득 발견한 내소사의 사진첩. 그 안에 한참이나 잊고 있었던 능가산 내소사가 마음에 들어와 있었음을 왜 몰랐을까? 올 가을은 필히 능가산의 불타는 단풍과, 가을이 주절주절 열려 떨어지는 내소사의 천년 느티나무를 보러 가야겠다.

기온이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산을 오르는 행위는,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이다. 그것도 무슨 돈벌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날이 좀 선선해 진 다음에 해도 될 텐데 말이다. 늘 새로운 것을 써야 하는 문화재 답사는, 웬만한 정성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연 8일 째 찜통더위라는 8월 4일.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소재한 ‘고달사지’를 찾았다. 꼭 고달사를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위 해목산 중턱에 있는 상교리 석실묘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경기도 기념물 제198호인 상교리 고려 석실묘는, 고달사지 느티나무에서 800m 정도를 해목산으로 오르면 된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길을 걷다가 보니 옆으로 차들이 지나간다. 팍팍한 여름의 길은 차가 천천히 지나가도 뿌옇게 먼지가 인다. 그 또한 참기 힘든 일이다. 차 한 대가 지나가면서 소리가 들린다.


“이 찜통더위에 미쳤군, 미쳤어. 이런 날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미치지 않고서야 33도가 넘었다는 시간에 멀지 않은 길이라고 해도,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을 오를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잘 정리가 된 고달사지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국보 제4호인 원종대사 승탑을 만날 수가 있다. 그 못미처 해목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안내판에는 ‘여주 상교리 고려 석실묘 500m'라고 적혀있다. 그동안 산으로 오르면서 이 500m에 대한 아픈 기억이 생겼다. 몇 곳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다가, 500m 안내판을 보고 길을 나서 더위에 몇 번인가 탈진이 오는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벌써 3번 째 오르는 곳이다. 처음 100m 정도만 가파를 뿐, 그 다음부터는 평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8월 복중에 오르는 길이다. 그리 만만치가 않다. 산을 오르면서 만난 나무들도 찜통더위에 지쳤는지, 모두 잎들이 기운없이 늘어져 있다. 며칠만 이 더위가 계속되면 농작물에도 심각한 정도로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한다.

 

 


 

주변 정리가 잘 되어있는 석실묘


석실에 도착하니 주변이 말끔히 정리가 되어있다. 세 번째 오른 석실묘이지만,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모습은 처음이다. 사실은 며칠 전에 누군가 전화를 했다. ‘여주 고달사지 뒤편 석실묘에 잡풀이 자라 엉망이다’라고. 그래서 오른 해목산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가 된 것을 보니, 이 더위에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석실로 조성한 이 고분은 1983년 11월 ~12월에 한양대학교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서 완료가 되었다. 발굴 당시 상감청자 파편 등의 유물로 보아 고려 때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실은 고려 때의 묘제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발굴 전에 석실의 기단부는 완전히 흙더미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불탑의 기단을 연상케 하는 방향기단


석실의 지상 위에 쌓인 돌로 조성한 방향기단과, 그 밑에 연도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석실로 구분이 되어있다. 하부의 원형의 석실에는 연도가 달려 있고, 상부에는 방형의 이층으로 된 기단이 쌓여있어 ‘상방하원 석실묘’라는 명칭을 붙였다. 지하의 석실은 원형으로 돌 축대를 쌓고, 그 앞으로는 연도를 조성해 열쇠모양의 형태처럼 조성하였다.


석실의 위편은 큰 돌 두 장을 놓아 석실을 덮고 있으며, 그 위에는 이층으로 제단 모양으로 된 기단이 있다. 1층 기단은 동서가 442em, 남북이 280cm, 높이가 46cm 정도의 장방형이고, 2층 기단은 그보다 조금 적지만 높이는 50cm 정도이다. 현실 벽의 높이는 167~175cm 정도이다.

 


고려 말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실묘는, 아래편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로 미루어보아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위에 돌탑처럼 방형기단을 조성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33도를 웃도는 날씨에 찾아간 상교리 고려 석실묘. 말끔하게 정리한 문화재의 주변이, 잠시 그 찜통더위를 잊게 만든다.


장수군의 산서면은 태백정간 중 소백산맥의 일맥이 무룡궁재에서 시작하여, 장안령봉을 병풍처럼 펼쳐 놓고 있다. 다시 서쪽으로 뻗어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수분치를 이룬 뒤, 줄곧 서쪽으로 뻗어내려 성적산을 이룬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노령산맥)에서 남북으로 뻗은 양 줄기가, 마치 암탉이 양 날개로 알을 품은 듯한 분지가 있어, 옛 부터 명당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 산서면의 오산에서 임실군 성수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침재로 가다가 보면 마을이 나타난다. 초장마을이라고 하는 이 마을은 산서면 오산리의 안마을로 입구 길가 양편에 두 개의 돌탑이 서 있다. 마을을 바라보면서 우측에 있는 탑은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고, 좌측 소나무 아래에 장승 곁에 있는 탑은 할머니 탑인 여탑이다. 탑 위에 뾰족한 돌을 세워 놓은 것이 할아버지 탑인 남탑이다. 맨 위에 돌은 남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권이종이 태어 난 초장마을

오산리 초장마을은 교육자학인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다. 권이종 박사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독일에 파견한 광부 2기에 지원을 했다. 소를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를 한 권이종 박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마을 앞 석비에는 ‘초장마을’ 이란 글씨 밑에 권이종 박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써 놓았다. 권이종 박사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딴 후 귀국하여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2006년 정년퇴직했다.


권이종박사가 태어난 초장마을 석비(위). 위에 뾰족한 돌을 새긴 것이 바로 할아버지 탑이다.
   
길가 양편에 있는 누석탑은 오랜 흔적이

초장마을은 마을의 형상이 ‘초중반사형’이라고 한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곳이다. 이는 풀숲에 뱀이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이름을 ‘초장마을’이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 마을 인근에는 고인돌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나타난 최초로 이 마을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약 5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원주이씨와 상산이씨가 들어와 살다가 상산이씨는 모두 이주를 해버리고, 현재 원주이씨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안동권씨들이 마을에 이주를 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누석탑이 언제부터 전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마을 안에 있는 정자인 ‘만취정’ 앞에서 만난 어르신은 “저 탑은 우리 어릴 적에도 있었는데 오래된 것인지만 알지, 언제 적부터 있었는지는 몰라” 라는 대답이시다. 첫눈에 보기에도 남탑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탑은 아마 최근에 새롭게 쌓아 올린 듯하다.

마을 공동체를 창출하는 돌탑

돌로 탑을 쌓아 마을 어귀에 놓는 탑은 누석탑, 혹은 할아버지·할머니 탑이라고 부른다. 누석탑이란 돌을 쌓아올려 봉분처럼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 탑은 강원도 일대서부터 태백산맥을 따라 내려가면서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으로 쌓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다.


돌탑 앞에서는 정월 초에 길일을 택해 마을주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거나, 정월 대보름에 제를 올리기도 한다. 대개는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을 가려 제관을 뽑아 제를 올리게 한다. 이 돌탑은 원시형의 신앙물로 추정하고 있다. 돌을 쌓을 때는 시멘트 등은 섞지 않으며, 단순히 돌만 갖고 위로 올라 갈수록 뾰족하게 쌓아올린다.

명당이기에 명사가 배출된다는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초장마을. 산림청과 유한킴벌리가 주관한 녹색마을 찾기에서 선택이 된 것도 다 돌탑 덕분이라고 한다. 마을주민들은 돌탑이 있는 한 마을에는 어떠한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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