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은 1900년대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흔히 유랑집단(流浪集團)의 한 류파로 본다. 남사당이란 소리와 술, 몸을 팔던 여자들의 집단인 사당패에 비교하여 꼭두쇠(우두머리) 밑으로 연희자 십 수 명이 있는 유랑예인집단으로, 일정한 거소가 없는 독신 남자들만의 남색사회이다. 간혹 여자 1∼2명이 낀 적도 있으나 이것은 남사당패 말기에 들어와서야 있었던 일이다.

 

남사당패들은 풍물․버나․살판․어름․덧뵈기․덜미 등 6가지 놀이로 일정한 보수 없이 숙식만 제공받으면 마을의 큰 마당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였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서운면 청룡리 인근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하였다. 안성남사당패가 유명해 진 것은 〈바우덕이〉라는 여자꼭두쇠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성남사당패의 꼭두쇠인 바우덕이는 사내 마음을 사로잡는 뛰어난 미모와 옹골찬 소리가락, 줄타기 재주가 당내 최고의 경지에 달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자면 당대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최고 스타였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예인 바우덕이

 

남사당 최고인 꼭두쇠 바우덕이(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기 때문에 岩을 바위로 풀어 바우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는 남사당패의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로 안성 서운면 청룡리 불당골에서 염불, 소고춤, 풍물, 줄타기 등 온갖 남사당 기예를 익혔으며, 뛰어난 기량으로 세상에 나가 판놀음을 걸판지게 떨쳐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타고난 천부적 재능과 미색을 겸비한 총기로 남사당패의 꼭두쇠로 추앙받은 바우덕이는 꼭두쇠로 활동하며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여 남사당패의 전성기를 이루어냈다. 남사당패의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 뜬쇠, 가열, 삐리, 저승패, 동짐꾼 등 40~50여명으로 구성되어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의 놀이를 행하였다.

 

남사당패의 조직

 

꼭두쇠는 패거리에서 대내외적으로 책임을 지는 우두머리로서, 그의 능력에 따라 단원이 모여들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조직된 패거리는 획일적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일사불란하고 엄격하였다. 50명 안팎의 인원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그 충원방법으로 고아나 가출아 등을 받아들였고 빈곤한 농가의 어린이를 부모의 승낙을 얻어 받아들이거나 유괴하는 경우도 있었다.

 

곰뱅이쇠는 꼭두쇠를 보좌했는데, 곰뱅이란 남사당패 은어로 <허가>란 뜻으로 어느 마을에 갔을 때 놀이마당을 열어도 좋다는 사전승낙을 받는 일을 맡아 보았다. 뜬쇠는 각 연회분야의 선임자로서 그들이 노는 놀이의 규모에 따라 해당놀이의 예능을 익힌 몇 사람씩의 가열을 두게 되며, 가열 밑에 초입자인 삐리를 두게 된다. 삐리는 뜬쇠들의 판별에 의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연회에 배속되어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1가지씩 기예를 익힌 뒤에 가열이 되는데 이들은 가열이 되기 전까지는 여장(女裝)을 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남사당패는 숫동모와 암동모라는 이름으로 남색조직을 이루고 있었는데, 예외도 있었지만 숫동모는 가열 이상이며, 암동모는 삐리들이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한마당의 놀이판을 벌이는 데는 일정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을 제공받고 하룻밤을 놀고는 다음날 마을을 떠날 때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주는 노자와 이밖에 머슴이나 한량들에게 자기 몫의 암동모를 빌려주고 해우채를 받는 것이 수입의 전부였다.

 

 

안성 남사당의 맥은 조선조 말기의 바우덕이로부터 시작해 김복만 - 원육덕 - 이원보 - 김기복으로 이어졌고 해체와 결성을 거듭하면서 끈질긴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본래 남사당패의 풍물놀이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하여 진풀이, 무동, 벅구놀이, 채상놀이, 선소리 등의 몸재주와 묘기에 소리(산타령, 새타령, 모찌는 소리, 논매는 소리등)까지 곁들이니 훌륭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풍물이란 우리나라 특유의 민중 음악이며, 남사당패에 의하여 떠돌이 판굿 모임에 맞게 놀이판이 풍부하게 짜인 것이다. 안성의 남사당 풍물놀이는 남도 농악에 비해 무동의 수가 많고 5무동을 비롯한 3무동, 4무동, 단무동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펼쳐지며 최고의 기량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7무동이 있어 뛰어난 기량을 떨치고는 했다. 현재 안성의 남사당은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단장/김기복)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남사당의 연희종목

 

남사당 놀이판에는 놀이 전에 줄타기의 줄을 매고 꼭두각시놀음의 포장막과 마당 한가운데에 버나․살판․덧뵈기 등을 연희할 멍석을 5∼6장 깐다. 여기서 벌어지는 <남사당놀이> 6종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⑴ 풍물 : 첫 번째 놀이인 풍물은 웃다리가락을 주축으로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무동(새미)․채상(열두발 상모) 등을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를 더하였다. 인사굿부터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터․당산벌림․양상치기․허튼상치기․오방(五方)감기․오방풀기․무동놀림․네줄백이 등의 판굿을 놀고, 판굿이 끝난 다음에는 상쇠놀이․징놀이․북놀이․장구놀이․시나위․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을 한다.

 

 

⑵ 버나 : 버나는 쳇바퀴·대접․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를 말하는데, 단순히 묘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서로 주고받는 재담과 소리가 있어 극성(劇性)이 짙었다. 돌리는 물체에 따라서 대접버나․칼버나․자새버나․쳇바퀴버나 등으로 분류된다.

 

 

⑶ 살판 : 오늘날의 덤블링을 연상케 하는 살판은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자반뒤지기․팔걸음․외팔걸음․외팔곤두․앉은뱅이․팔걸음․수세미트리․앉은뱅이․모말되기․숭어뜀 등의 순서로 논다. 살판쇠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잽이의 장단에 맞춰 정해진 차례대로 곤두질을 치는 것이다. 살판이란 말은 곤두박질을 할 때 불을 가득 담은 화로를 안고 재주를 넘다가 죽는 수도 있어 ‘살판이냐, 죽을판이냐’를 가늠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도 전한다.

 

 

⑷ 어름 : 어름이란 줄타기를 말하는데, 남사당패의 어름놀이는 초청에 의해 관가나 양반집에 불려 다닌 <광댓줄>과는 달리 일정한 보수 없이 서민을 상대로 순연했기 때문에 민중 취향으로 짜였다. 어름산이와 매호씨가 재담을 주고받으며 줄 위에서 가창(歌唱)하고 잽이의 장단에 맞춰 진행되는 것으로 버나․살판의 경우와 같다.

 

 

⑸ 덧뵈기 : 덧뵈기는 다른 지역 탈놀음에 비해 의식성(儀式性)이나 행사성(行事性)에 관계없이 그때그때 지역민의 갈구와 흥취에 영합하였다.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의 4마당으로 짜여 있는데, 먼저 첫째마당에서 놀이판을 확보하고, 둘째마당에서 외세(外勢)를 잡고, 셋째마당에서는 내부 모순을 불식하고, 끝마당에서 외래문화를 배격하는 내용이다.

 

 

⑹ 덜미  :맨 마지막 순서이며, 한국에서 유일하게 전하는 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남사당패들은 <덜미>라 부르고 있다. 이는 <목덜미를 쥐고> <몽둥이를 쥐고> 놀린다는 장두인형(杖頭人形)을 뜻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지배층의 지배구조와 그 횡포에 대한 저항,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통해 외래종교의 비판, 서민들의 우직한 염원(念願) 등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으로 40여 개의 인형과 10여 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각기 독립적으로 연관된 2마당 7거리를 놀았다. 2마당 7거리는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 짓고 하는 거리) 등인데, 채록 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평택이 판소리의 고장이다’ 라고 한다면 거개의 사람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판소리사에서 평택이란 곳은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는 곳이다. 평택이 판소리사에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더욱 이 곳은 판소리와 함께 예술적으로 뛰어난 경기시나위의 한 류파가 발생을 한 곳이며 풍물의 본거지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의 전승에 중요한 구심점이 되었던 평택이기에 자연 많은 소리와 민속이 전승이 되었으며 그만큼 지금까지도 많은 민속이 전승이 되고 있기도 하다.

 

평양 능라도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명창 모흥갑의 그림 - 적벽가에 능한 모흥갑은 덜미소리를 내면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초기명창 모흥갑의 고장 평택

 

소리의 고장 평택. 일찍 우리는 조선 판소리사에서 평택 출신의 명창인 모흥갑을 만날 수 있다. 모흥갑(1822~1890)은 진위 출신으로 조선조 순조, 헌종, 철종 삼대에 걸쳐 전국의 소리판을 풍미한 명창이다. 모흥갑의 소리는 흔히 통상성이라고 하여서 고음처리가 그 누구도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였으며 강산제와 춘향가, 적벽가 등에 능하였다.

 

평양 모란정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며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적 성격을 띠며, 첫소리를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끝을 다시 낮추어 끊는 것이 특징이며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성행하였다.

 

우표로도 발행이 된 모흥갑의 판소리그림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 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나 ‘무숙이타령’ 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그림속에 남아있는 모흥갑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광대가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하도 유명해서 판소리학회지인 『판소리연구』 표지를 위시해서 여러 판소리 관계 문헌의 표지 그림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그림이 소리하는 광경을 직접 보고 그린 그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른 시기에 명창들이 야외에서 소리를 할 때 어떻게 했는가를 알려주는 아주 귀중한 그림이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모흥갑이 어디 사람인지조차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경기도 진위출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전주 난전면 귀동(지금의 구이 부근)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 하나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흥갑은 고음으로 이름을 날렸던 모양이다.

 

 

 

소리꾼들은 득음을 얻기위해 폭포독공이나 동굴독공 등 힘든 학습에 열중했다. 남원 운봉에 있는 '국악의 성지'에는 동굴독공을 익힐 수 있도록 조성을 해놓았다. 겉으로 본 동굴독공 학습장(위) 입구(가운데) 북 등이 놓여있는 동굴 안 학습장소(아래) 

 

그래서 모흥갑의 소리는 학이나 봉황의 울음소리에 비유되었다. 다만 모흥갑의 덜미소리나 그 청이 동, 서편제보다는 당대의 전해지는 중고제의 명창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서 모흥갑은 평택 진위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신재효는 그의 ‘광대가’에서 모흥갑의 소리를 ‘설상에 진저리친 듯’하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모흥갑이 고음을 잘 내어 그것으로 이름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모흥갑은 ‘적벽가’를 잘했다고 하나,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하는 이별가 한 대목이다. 지금도 조상현이나 성창순 등이 부르는 보성소리 ‘춘향가’에는 이 대목이 들어 있는데, “여보, 도련님. 날 다려가오”를 반복하면서 점점 음정을 높여, 마지막에는 거의 숨이 막힐 정도까지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평택은 명창들과 인연이 있는 고장

 

더욱 평택은 조선조 말 명창 이동백(충남 서천군 종천면 출생)이 이곳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내다가 영면한 곳이다. 이동백은 판소리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창’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록 광대의 족건을 완벽하게 갖춘 소리꾼이었다. 처가인 평택의 한 야산에 올라 소리를 한 후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동백명창.

 

이렇듯이 평택은 우리나라 판소리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기 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의 초기 대명창과 말기 대명창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영면을 했다는 것은 평택이 우리소리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에 평택 진위에 모흥갑 기념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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