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의 정 중앙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위로는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고, 옆으로는 대광루가 자리하고 있는 중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한 기. 이 석탑은 신라시대 해인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에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석탑이란 원래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 놓은 곳으로, 부처님과 동일시하던 신표였다. 그러나 후에는 사리와 경전, 소물 등을 모셔두고 예경을 하는 곳으로 반전을 하게 된다. 이 해인사 중앙에 자리한 정중 삼층석탑은 불상을 모셔 놓고 있다. 9세기 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모형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소중한 탑이다.


공간 마련을 위해 한 옆으로 비켜서다

정중앙에 있다고 해서 ‘정중 삼층석탑’ 혹은 ‘정중탑’이라고도 하지만, 이 탑은 마당의 정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해인사 안마당의 중심축에서 6m 정도 동쪽으로 치우쳐 자리하고 있다. 이는 구광루를 지나 대적광전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시야를 확보하고, 공간을 넓게 보이기 위해서이다.

정중삼층석탑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정중삼층석탑은 2중 기단과 5단의 옥개받침을 둔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이지만, 1926년에 중수하는 과정에서 기단을 확장하여 높이를 높여놓았다. 1926년에 탑을 중수할 때 상층 기단의 석함 속에서 소불상 9구가 발견되었는데, 석탑을 중수한 후에 다시 석탑 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삼층석탑

이 정중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볼 때, 신라 석탑의 기본 형식이 잘 나타나 있다.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높이는 6m로 큰 탑에 속하며,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3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이 있고, 상륜부에는 노반, 앙화, 구륜과 보주가 남아있다.

원래는 이 석탑은 2층 기단이었으나, 1926년 중수할 때 1층이 더해졌다고 한다. 기단부는 상층 기단 양쪽에 우주와 장주를 하나씩 모각했으며, 탑신에는 우주 이외의 별다른 조각이 없다. 소박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는 해인사 정중 삼층석탑. 후대에 설치한 옥개석의 풍경이 달려 있어 옅은 바람에도 풍경소리가 울린다.



해인사 정중 삼층석탑. 보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석탑을 보존하기 위해 가장자리에 들러 친 석조물이 석탑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역시 우리 문화재는 있는 그대로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사람들은 흔히 국보나 보물이라고 하면, 아름다운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국보나 보물 중에는 상당히 많은 전각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로 지정된 전각들은 거개가 절이나 궁궐, 능 등에 자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사찰에 있는 전각일 것이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의상이 처음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이 귀신사의 처음 명칭은 ‘국신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사적기 등이 전하지가 않아서 정확한 창건 년대나, 창건주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 말에 도윤이 중창한 뒤, 귀신사라고 개칭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물 제826호 귀신사 대적광전

고려 때에는 원명국사가 중창을 한 귀신사는, 임진왜란 대 전화로 폐허가 된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 고종 10년인 1873년의 일이다. 귀신사에는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은 귀신사의 본 건물로, 현재 보물 제82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사찰의 대웅전 등에서 많이 보이는 팔작집이 아닌 맞배집이다.

2월 17일, 저녁 무렵에 갈음을 재촉한 귀신사. 2월 중순의 해는 짧다. 조금만 늦으면 해가 질 것 같은 길을 재촉해 귀신사에 들렸다. 겨울의 설원 속에 있는 대적광전을 보기 위함이다. 사찰은 여름과 겨울의 풍광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한 곳을 사계절을 모두 둘러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귀신사의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것을, 고종 때 다시 복원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뒤 1823년과 1934년에 중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듯 몇 번의 보수를 거치는 동안, 대적광전은 단청을 칠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처음부터 단청이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다.

맞배지붕의 멋을 느끼게 하는 건물

17세기에는 사찰의 불전이 맞배지붕으로 많이 지어졌다. 아마도 그 당시에 유풍일 것이다. 논산의 쌍계사 대웅전, 월성의 기림사 대적광전 등이 그 당시 지어진 맞배지붕의 전각이다. 귀신사 대작광전은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두는 구조가, 기둥 위에 하나씩 있는 주심포계가 아니다. 중간에 장식을 더 넣은 다포계로 구성이 되었다.

대적광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눈이 하얗게 덮인 지붕이나, 하얀색을 칠한 담벼락이 하나가 된 듯 조화를 이룬다. 역시 겨울에 보는 정경은 남다른 멋을 풍긴다. 귀신사 대적광전의 벽에는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내렸다. 죽죽 내려놓은 듯한 기둥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오히려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가 있다.




창호도 색다르게 조성을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은, 앞면의 세 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아냈다. 그리고 좌우의 퇴칸은 조금 좁게 구성해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다. 양편 측면으로는 문을 달아내고, 뒷벽으로는 중앙 하단 부에 문을 달아냈다. 우측으로 돌아보니 뒤편에 까치구멍이 나 있다. 왜일까? 환기를 시키기 위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사진촬영 하시면 안돼요’

대적광전 안으로 들어가 먼저 향을 피우고 삼배를 한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늘 하는 차례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대적광전은 원래 중층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제1516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존불은,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모셨다. 그리고 협시불로는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모셨는데, 모두 소조불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삼존불을 불단에 모시기 위해서는 중층으로 건물을 들였을 것이다. <귀신사중수기>에도 법당이 중층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눈에 발이 빠지는 것도 마다하고, 여기저기 눈밭을 뛰는 짐승처럼 빠르게 이동을 하며 돌아보고 있다. “사진촬영하시면 안돼요” 귀신사에서 일을 보고 계신분인가 보다. “예”라고 대답은 했지만, 이럴 경우 참 답답하다.

명색이 문화재를 답사하러 다니는데, 일일이 허락을 받기도 버겁다. 그러다가보면 시간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기는 했지만, 내내 아쉬움에 속이 아프다. 봄철이 돌아오면 다시 한 번 귀신사에 들려, 소조부처님들을 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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