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동안 쇠를 다루면 산 정대봉 대장장이

 

수원시 팔달구 지동시장은 요즈음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러나 바로 곁에는 이름이 없어 무명시장이라고 호탕하게 웃는 장사꾼이 있는 시장이 있다. 점포라야 한 30여 곳. 그 중에는 문을 닫은 지가 오래인 상점도 있다. 지동시장에서 남수문 곁으로 터진 성 밑을 지나게 되면 만나게 되는 골목시장. 이곳은 남수동에 속한다.

 

327일 오후에 시장구경에 나섰다. 수원천 옆에 자리한 수원사라는 절집 담을 끼고 몇 개의 노점상이 줄지어 있고, 그 앞쪽으로 소망세광교회 앞으로 이어진 골목으로 점포들이 있다. 한가한 듯 한편에선 문 닫힌 점포 앞에서 윷놀이들도 하고 있다. 인구 120만의 대도시 수원에, 이렇게 한적한 시골의 장거리 같은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시장 이름이 없어. 그냥 무명시장이랄까!”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그래도 있을 것은 다 있다. 생선가게며 과일상회, 야채, 신발가게, 기름집에 옷 수선집도 있다. 허름한 식당도 있고, 열쇠집도 있다. 그야말로 어느 작은 면단위의 장거리 풍경이 그대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의 백미는 일방통행 길가에 있는 1960대의 점포들이다. 대장간, 솜틀집, 국수집들이 나란히 옛 간판을 간직한 채 자리하기 때문이다. 장을 느릿하게 걸으면서 구경을 한다.

 

이 장 이름이 무엇인지 아세요?”

이 장 모르지 이름이 없어. 그냥 무명장이라고 불러

무명장요?”

이름이 없으니 무명장이지

 

 

호탕하게 웃는 웃음을 뒤로하고 골목길을 빠져나온다. 대장간 앞으로 가니, 마침 시뻘겋게 불을 지피고 한창 쇠를 달굼질 하고 있다. 몇 번이고 달굼질을 하고 물에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가게 앞에 서 있는 손님에게 무엇을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이 산에 약초를 캘 때 쓰려고 주문을 했더니 호파라고 부른단다. 괭이처럼 캐는 것이 아니고 식물 밑으로 집어 넣어 그대로 떠 올릴 때 사용하는 도구라는 것.

 

70명 직원을 거느렸던 정대봉 장인

 

간판에는 붉은 글씨로 동래철공소라고 쓰여 있다. 화덕에는 뻘건 불이 연신 불꽃을 뱉어낸다. 올해 62세라고 밝히는 대장장이 정대봉씨. 이곳에 와서 풀무질을 한지 벌써 15년째란다. 원래 이 집은 처삼촌인 고 김달봉이 40여 년간 운영을 하던 철공소였다. 그것을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 본인이 맡아서 한다는 것.

 

 

저요 한 때는 부하직원을 70명이나 거느렸었죠. 용인 풍덕천 쪽에 있는 회사에 공장장이었는데, 일본도 자주 다녔고요. 그때 제 월급이 350만원에 공장장 수당 30만원을 더 받았어요. 그리고 차도 한 대 내주고요

그런데 왜 그만두셨어요.”

그곳에 물류창고가 들어왔거든요. 그 때는 좋았죠. 그래도 할 일은 다했죠. 아들 둘 다 대학 보내고 장가보내면서 아파트 한 채씩은 해주었으니까요. 원래 제가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있었나 봐요. 일본에서 기계를 들여와 세 번만 분해하면 바로 다 조작을 했거든요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공장에 들어가 공장장이 쇠를 다루는 것을 보고, 남들보다 먼저 실습을 마쳤단다. 남들보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을 한 덕분에 초등학교 졸업을 한 사람이 공장장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저 그래도요. TV에도 여러 번 나오고, 신문에도 자주 났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와요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아마 지난 세월이 생각나는가 보다. 요즈음은 직접 찾아와 주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단골들 때문에 열심을 낸다고 한다.

 

항상 부지런함이 몸에 밴 대장장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날은 하루 종일 서 있어요.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에 문을 닫죠. 음식점의 칼, 미장용 가위, 농사꾼의 낫, 심지어는 무속인들의 작두까지 만들어 보았다죠. 아마 나만큼 그동안 쇠를 많이 다룬 사람도 흔치 않을 겁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재미있느냐는 물음에 재미없었으면 이 날까지 쇠를 다루고 있겠느냐고 하면서, 지금도 오라는 곳이 있다고 한다. 50년 동안 자리를 지킨 동래철공소. 그리고 그곳에서 2대를 물리며 15년간 쇠를 다룬 대장장이 정대봉씨. 5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철공소의 모습에서, 옛 기억 하나를 끄집어낸다.

선소유적지. 사적 제392호인 선소유적은 여수시 시전동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원래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 선소유적은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하게 한 거북선을 최초로 건조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선조 24년인 1591년, 이곳 여수에 전라좌수사로 부임을 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인 여수는 선조 26년인 1593년 8월부터, 선조 34년인 1601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이곳은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수군이 왜적에게 대승을 거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다.


배를 만들고 숨겨두었다는 굴강

그리고 보니 벌써 선소유적을 다녀온 지가 꽤나 시간이 흘렀다. 10월 10일 여수를 답사하면서 다녀온 선소유적. 선소유적 입구에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시키는 표석으로 삼았다는 벅수가 나란히 한 쌍이 서 있다.

이곳 선소유적은 지도상으로 보면, 가막만의 가장 북쪽에 조선소가 있다. 현재 이곳 선소유적지 안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굴강’과 칼과 창을 만들던 ‘대장간’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칼과 창을 갈고 닦았다는 ‘세검정’과 수군지휘소였던 ‘선소창’, 수군들이 머물렀던 ‘병영막사’ 등을 돌아볼 수가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이 말은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 수군의 거점인지 알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곳 선소는 나라를 구하는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선소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바닷물을 돌로 쌓은 방파제가 있다. 입구는 좁게 만들어 놓아, 배를 숨겨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굴강’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조선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군사항만 시설이다. 여기에서 고장난 배를 수리하거나, 군사물자를 배에 싣고 내린 곳이라고 한다.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한 방파제를 흡사 작은 만처럼 조형을 한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선소주변에는 승리의 함성소리가

선소의 중심부에 마련된 직경 42m(면적 1,388㎡)정도의 굴강. 거북선 두 척이 들어갈 수 있었다는 굴강은, 깊이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서 바닥까지는 5~6m 정도가 된다. 북쪽으로 난 굴강의 입구는 폭이 9m 정도에 이르며, 방파제 역할을 하는 축대는 자연선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다.

이충무공 선소 유적지는 2차에 걸쳐 발굴조사를 하였다. 보고서에 의하면 1980년 1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7종에 94개, 자기류 2종에 13개, 기타 4종에 18점이 출토되었다. 1985년 2차 발굴조사 시 출토유물은 금속류 5종에 21개, 자기류 4종에 387개, 기타 4종에 44개가 발굴이 되었다.





이곳 굴강에서 서남방향으로 20m 부근에는 ‘세검정(洗劒亭)’과 군기고가 현재 복원되어 있다. 항상 검을 닦고 갈았다는 세검정. 그 마루에 앉아 앞으로 보이는 바닷물을 바라본다. 400여 년 전 해전에서 승리를 하고 난 거북선과 수군들이 이 세검정 앞을 지나면서, 승리의 환호로 이곳이 떠나갈 듯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선조들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던 이곳 여수 선소유적. 그곳 세검정 마루에 걸터앉아 자리를 뜨질 못하는 이유는, 그러한 함성이 그립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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