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10만의 대도시 수원. 그곳의 의회를 대표하는 의장님께서 차가 없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몇 배 부지런하다. 그저 지역의 여기저기를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의장이 아닐 때는 지역구만 챙기면 되었지만, 이제는 수원시 곳곳을 다녀야만 한다. 34명의 의원이 있는, 수원시의회의 수장이기 때문이다.

 

9월 17일 오전 11시, 수원시의회 의장실에서 노영관 의장을 만났다. 그저 털털한 이웃아저씨 같은 노영관의장이 반갑게 맞는다. 사진을 찍겠다고 가운데 자리(상석)에 앉으라고 해도, 굳이 마다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겠단다. 그만큼 격이 없이 사람들을 대한다.

 

 

 

수원시의회 노영관 의장은 1967년 4월 10일에 출생을 하여,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지방자치 도시행정 석사과정을 마쳤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수원시의회 7, 8, 9대 의원으로 피선된 3선의원이다.

 

수원시의회 노영관의장 대담

 

- 먼저 이번에 경기도시군의장협의회 회장님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 힘들게 찾아주셨네요. 경기도시군의장협의회는 31개 시군의 의장들이 모여서 구성한 기구입니다. 서로가 정보도 교환하고, 상응해가면서 의정활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뜻에서 만들어진 협의회죠.

 

- 이번 9대 의회 후기 의장을 맡으셨는데, 무엇에 중점을 둘 것인지?

예, 아무래도 후기에는 의원님들이 지역에 대한 현안 등을 마무리하는 시기입니다. 의원님들께서 각 지역에서 주민들과 약속을 한 사업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할 생각입니다. 또한 110만 수원시민의 위상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 수원시민의 위상을 높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수원시는 경기도의 수부도시입니다. 인구 110만을 보유한 수원시는, 전국 230개 자치단체 중 최대 규모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수원은 사실상 홀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선거구가 비슷한 울산광역시에 비해 2석이 부족한 4석 뿐입니다. 또한 공무원 1인이 담당해야 하는 주민들의 수는 수원시가 428명이나 됩니다. 이는 창원시가 282명, 울산광역시가 247명에 비해 두 배 가량 많습니다. 이런 점들을 중앙에 이야기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겠다는 것이죠.

 

- 의회 운영을 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입니까?

우선은 의회사무직은 임명권을 의회에서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회 사무직까지 집행부에서 임명을 하니, 직원들이 의회 눈치도 보아야 하고, 집행부 눈치도 봐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일을 하면서도 이런저런 걸림돌이 많을 것 같아요. 그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회사무직의 인사권은 당연히 의회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의회에는 전문 인력들이 있어야 합니다. 법안을 다룰 때마다 정말 필요한 인원이 전문직이기 때문이죠.

 

- 기초의원 공천에 대한 견해가 남다르시다는 데?

이제는 중앙에서 공천하는 그런 공천제도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당에서 공천을 주는 방식은 유지하되,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거죠. 중앙에서 기초의원까지 공천심사를 하지 말고, 주민들이 공천권을 주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역주민들의 투표로 50%, 대의원들이 30%, 지구당위원장이 20%로 나누는 방식입니다. 정당공천제가 이런 쪽으로 바뀐다면 주민들이 더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의회와 집행부가 어떻게 앞으로 관계개선을 해 나가실 것인지?

사실 그동안 의회와 집행부가 서로 어긋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나 집행부는 모두 수원시민의 삶의 잘 향상과 지역발전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 9대 후기 의회는 집행부와 서로 대승적 차원의 협력과 긴밀한 의사소통 속에, 조화와 상생, 견제와 균형의 틀을 유지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집행부에 조례안 등을 상정할 때는 의원님들이 충분히 검토를 할 수 있도록, 미리 상정안을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회기에 임박해서 상정안 등을 제출하면 검토를 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집행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하고자 하는 뜻에서입니다.

 

- 지난 번 호우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돌아보는 등 많은 일을 하셨다는데?

우리 수원시민들이 34명 시 의원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후반기 의회에서는 새로 구성된 의장단과 호흡 맞추면서, 장애인과 소외계층, 다문화가정까지 먼저 생각하며 발로 뛰는 의정활동으로, 시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의회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시민들이 불편한 곳이 있으면 쫒아가 해결하고, 아픈 곳이 있다면 어루만져 주어야죠. 그것이 의회가 할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노영관 의장은 이 날 아침에도 호우로 인한 피해는 없었는지 지역을 돌아보았다)

 

 

- 전국시군구의장협의회 회장 출마를 결심하셨다는데?

그렇습니다. 이제는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많은 권한들을 지역에 넘겨주어야 합니다. 기초의회가 문을 연지 벌써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기초의회 의원이 2,922명이나 됩니다. 2005년 제8대 의회부터 소선거구제도에서 중선거구제도가 도입되어, 기초의원들의 의정활동 범위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주민들 요구도 점차 다양화 되어 가고 있고요. 그런데도 아직 기초의회에서 갖고 있는 권한은 미비합니다. 이제는 중앙에 이런 것을 강력히 항의하여 실제로 주민들을 위한 의회가 돨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이런 점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전국시군구협의회장에 출마를 생각한 것이고요.

 

- 차를 없애버리셨다고 들었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신지?

예, 사실 저희 기초의원님들의 활동비는 많지가 않습니다. 저희들은 지역 주민들의 많은 애경사에 일일이 찾아보아야 합니다. 또 생활도 해야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차까지 있으면 생활이 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저희 집 사람이 작은 소형차 한 대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건강을 생각해서도 자전거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죠. 집에서 의회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15~20분이면 충분합니다.

 

- 끝으로 수원시민들께 당부하고 싶으신 것은?

저희 34명의 의원들은 늘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집행부와 함께 시민의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시민의 곁에서 현장정치, 생활정치를 하면서 시민들의 의견이 수렴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수원시민여러분들께서는 수원시의회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또,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따끔한 질책을 부탁드립니다.

 

- 오랜 시간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지역을 취재하시다가 어려움에 처한 시민들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세요. 집행부와 함께 현안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원시의회 노영관 의장과 대담 중인 온누리

수원시립교향악단 신임악장 한경진.

“음악은 나에게는 인생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음악과 나는 별개로 떼어놓고는 생각을 할 수가 없죠.”

우리나이로 33세. 많지 않은 나이에 수원시림교향악단의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한경진. 2월 2일(목) 오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연습실에서 만나보았다.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들의 영향을 받아 접하게 된 바이올린이 인생의 반려자가 된 셈이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잡아

“부모님들이 모두 바이올린을 하셨어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음악과 접하게 되면서, 스스럼없이 바이올린을 선택하게 되었죠.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크지 않은 병원이지만, 그곳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도 없는 작은 병원의 무대이긴 했지만, 아마도 그런 연주를 통해 사람들에게 들은 칭찬이 오늘을 있게 한 듯합니다. 그 때 사람들이 ‘정말 잘한다.’, ‘감동을 받았다’ 혹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춘기에도 방황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말 잠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외에는 음악과 함께 생활을 했다.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영재로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독일의 베를린 국립음대, 라이프치히음대를 졸업하였다.

“독일로 건너가 바로 몸이 상당히 안 좋았어요. 그래서 한 일 년 정도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죠.”

어릴 적부터 영재로 소문이 나

한경진은 어릴 적부터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다. 7세 때 월간음악콩클을 비롯하여, 일본 시모노세키콩클, Nuri 바이올린 국제콩쿨, 세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부산음악콩클, KBS신인음악콩클 등을 석권하였다. 젊은 음악도의 등용문이라는 동아음악콩클까지, 이렇다 할 모든 음악콩클에서 수상을 하였다.

그녀는 9세 때 서울시향과의 협연으로 음악계에 데뷔하였으며, 그 후 KBS교향악단, 수원시향, 코리아심포니오케스트라, 부산시향, KNUA 오케스트라등과 협연하며 가는 곳마다 이슈가 되곤 하였다.

한국 최고의 명교수 김남윤의 지도하에 예원학교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입학 및 예술사를 졸업한 그녀는, 독일 베를린국립음대(HDK) Diplom 취득(최우수졸업), 라이프치히국립음대 최고연주자 과정을 교수 만장일치 만점 졸업하였으며, Meisterklassenexamen 을 전액 장학생으로 최우수 졸업을 하였다.

유학중 유럽의 교향악단들과의 협연기회도 많았다. 학교 내의 정기연주회는 물론이고, Jena Philharmonie , MDR(중부독일방송교향악단), Istanbul Chamberorchestra 와의 협연으로 이미 프로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실내악과 오케스트라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던 그녀는, 24세 때는 세계최고의 피아니스트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와 함께한 독일 방송교향악단(Deutsches Symphonie Orchester Berlin)에서 준단원을 역임하였다.


그녀는 Leipzighochschul orchester 악장을 역임,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과 유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모여만든 Berlin Soloistkammermusik orcherster 에서 부수석 주자로, Berlin 교수협회, 학회, 대사관주체 초청연주 등 활발한 활동뿐 아니라 Mendelssohnhaus, Schumannhaus, Maarkleeberg, Jardhaus 등 초청독주회와 금호아트홀 챔버뮤직 소사이어티의 객원단원역임, Prof.Meinel 과의 Leipzig Trio 등 수많은 실내악 연주로 탁월하고 집중력 있으며 매혹적인 소리를 가진 음악가라는 평을 받았다.

앞으로 최고의 교향악단을 만드는데 일조를 하고 싶어

“독일에서 10년 동안 생활을 하다가, 2010년 10월에 돌아왔어요. 귀국 후에는 예술의 전당 아티스트로 발탁이 되어, 2011년 4월 8일 예술의 전당에서 독주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금호 챔버뮤직소사이어티 연주와 앙상블 pan의 리더로도 활동을 했죠. 수원시향과는 협연을 하기도 했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는데, 공연을 관람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세계 어느 유수한 오케스트라와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번 수원시향의 악장으로 취임을 하게 된 것도 너무 기쁘다고 한다. 물론 심적인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란 다짐을 스스로에게 해본다.

“수원시향은 이미 정상의 위치에 있는 교향악단입니다. 역사도 30년이나 되었고요. 제가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을 때쯤인 1982년에 수원시향도 창단을 하였습니다. 저와는 참 많은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이제 이곳에서 제가 지금까지 다져왔던 모든 것으로, 주춧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남들과 어울리지를 못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본인은 잘 어울린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 한다.’고 웃으면서 대답을 한다.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악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한경진. 앞으로 그녀의 더 좋은 무대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0월 8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를 당한지 114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아침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 앞에 있는 문예관에서는 명성황후 114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처음에는 행사를 크게 하기로 했으나 신종플루로 인해 대폭 축소해, 이기수 여주군수를 비롯한 300여 명의 내외빈 인사들이 모여 명성황후의 뜻을 기렸다.

 

명성황후는 조선조 제26대 고종황제의 비로 본관은 여흥이다.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민치록의 외동딸이다. 8세 때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1866년(고종 3) 3월, 16세 때 부대부인 민씨(府大夫人閔氏)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 명성황후 여주 명성황후 생가지에 모셔진 명성황후의 영정

  
▲ 생가 정면 여주읍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지

아침 일찍 서둘러 생가지로 향했다. 명성황후 생가지는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이곳에서 8세까지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생가지에 잇는 집은 숙종 13년인 1687년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지어졌다. 당시의 건물로 남아있던 것은 안채뿐인데, 1995년 행랑체 사랑체 별당 등을 복원하였다. 이 생가의 우측에는 명성황후 탄강구리비가 서 있다.

 

  
▲ 안채 명성황후 생가 안채. 이 안채만 남아있던 것을 복원하였다

  
▲ 탄강구리비 명성황후의 탄생내력을 기록한 탄강구리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탄강구리비는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것이다. 탄강이란 왕이나 성인 등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고, 구리란 고향이라는 뜻으로 탄강구리비란 명성황후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뜻이다.

 

  
▲ 별당 명성황후가 어린시절을 보낸 생가의 별당. 1895년 동학혁명 때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탄강구리비의 뒷면에는 광무8년인 1904년에 세워졌으며 '5월 어느 날 두손을 맞잡고 공손히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조 제27대 황제인 명성황후의 아들 순종황제의 친필로 알려지고 있다.

 

탄강구리비 뒷편에 위치한 별당은 명성황후가 1851년 음 9월 25일(양력 11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났다. 명성황후가 8세가 되던 해에 부친인 어성부원군 민치록이 영천군수를 끝으로 감고당에서 세상을 하직했으니 명성황후는 그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명성황후 생가지 명성황후 추모를 하는 날 어린 아이들이 생가지를 찾았다. 명성황후의 아픔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1895년인 고종 32년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일본이 조선을 합병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김홍집 내각의 일부 세력과 대원군 세력, 그리고 해산하기로 예정된 훈련대와 일본 정치낭인으로 하여금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학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옥호루에서 살해가 된 뒤 황궁 밖의 송림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개혁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과 맞섰던 명성황후는 그렇게 비극적인 생을 마쳤던 것이다. 곧이어 세워진 친일정권에 의해 폐비가 되었으나 곧 복위되었고,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명성황후로 추책되었다.

 

  
▲ 황손 이석씨 추모제날 명성황후 생가지를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추모제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촬영을 하고..

명성황후의 추모제를 마치고 생가 곁에 마련된 민가마을에서 간단한 점식식사로 국수를 마련하였다. 이 자리에는 마지막 황손인 이석씨(본명 이해석)가 참여를 했다. 올해 69세로 전주 승광재에 기거하고 있는 이석씨가 외가를 찾은 것이다. 곱게 두루마기를 입은 황손 이석씨는 그동안 수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 황손이라는 이석씨는 고종황제가 할아버지가 되신다. 그리고 아버지가 의친왕이다. 결국 명성황후는 황손 이석씨의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명성황후 생가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상념에 잠긴 황손 이석씨. 영국이나 일본 같으면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겠지만 마땅히 터전을 잡지 못하고 방랑을 하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가수를 비롯해 이것저것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다가 2003년 8월부터 태조 이성계를 모신 경기전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 김완주 전라북도도지사가 전주시장을 지낼 때 배려를 한 것이다. 


"당연히 궁에서 살아야하지만 그렇지를 못합니다. 나라에서 일본 천황을 초청한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질 않습니다. 할머니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장본인인 그들이 모든 것을 깊이 사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나라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은 격해진 마음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으면 아버님께서는 항상 칼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답니다. 심지어는 독약을 받을 것에 대비를 해 비상을 조금씩 마셨다고도 합니다." 처음으로 밝히는 이야기라면서 말을 하는 황손 이석씨의 웃는 얼굴에 잠시 노기가 스민다. "그저 제가 태어난 곳에서 여생을 마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입니다"

 

1941년 음력 8월 3일 사동궁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시절을 사동궁에서 보냈다. 궁에서 나온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1979년까지는 그나마 박정희 대통령의 안배로 서울 궁정동 청와대 옆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5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여기서도 쫓겨나다시피 했죠". 그 때가 힘겨운 듯 잠시 숨을 고른다. "그 이후로 1년이면 12번도 더 이사를 다녔고, 중앙시장과 동대문시장에서 국수장사, 자장면 장사 등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갈곳이 있다면서 쓸쓸히 명성황후 생가를 뒤로하고 떠나는 황손 이석씨. 왜 그 뒷모습에 분노가 보였을까?   

 

  
▲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의 대화 명성황후 추모제장을 찾은 마지막 황손 이석씨. 할머니댁인 외가를 찾은 황손 이석씨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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