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잔뜩 흐렸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와, 금방이라도 한 줄기 비를 쏟아부을 듯한 기세이다. 이런 날 문화재 답사를 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두 배는 어렵다. 그것도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다. 질퍽한 맨 땅을 밝고 다녀야 하니, 그 고통은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에 소재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경주구황동당간지주 (慶州九黃洞幢竿支柱)’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게 되는데, 이 깃발을 꽂는 높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 쪽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받침돌을 거북이인 당간지주, 이런 받침돌 처음이야

 

당간이야 절마다 볼 수가 있다. 대개는 절 입구에 세워 절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을 걸어둔다. 그런 당간은 특별한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거의 보편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 조형하는 방법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구황동 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의 것으로 보이는 이 당간지주는, 양 기둥에 별다른 조각을 두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다른 면이 있다. 훼손이 되어 처음에는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러나 기둥사이에 놓인 당간의 받침돌을 들여다보니 특이하게도 거북모양이다. 동편을 바라보고 있는 당간지주 사이의 간대가 돌거북이라니 놀랍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당간지주를 보았지만, 이렇게 받침돌이 거북의 형상을 한 것은 처음 만났다.

 

하긴 아직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재의 10% 정도나 보았을까? 20년이 넘는 세월을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였지만, 이제 겨우 눈을 떠가고 있는 정도이다. 그리고 그 많은 문화재들의 아주 작은 일부분을 보았을 뿐이다. 마음이 바빠진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많은 문화재들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분황사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

 

분황사 바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당간지주. 기둥의 안쪽 면에는 아래와 중간, 윗부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당간지주를 관통해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밋밋한 형태로 조성을 한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을 당간지주 한 기. 분황사당간지주는 아마도 숱한 신라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발길을 붙들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문화재들이 안고 있을 이야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화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한 맺힌 역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으련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해 당간지주를 떠난다.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뒤를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것은, 그 오랜 세월 저렇게 비바람에 씻기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기 있다는 굳건함 때문이다. 오늘 따라 조금만 더워도 답사를 미루고 있는 나 자신이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진다.

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 (석수동 212 - 1)에 자리한 보물 제4호인 중초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시기가 당간에 적혀있어, 조성연대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이다.

 

당간에 지주명이 명기되어 있어

 

당간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보력 2년(신라 흥덕왕 1년, 826년) 세차 병오년 8월 초엿새 신축일에 중초사(中初寺) 동쪽 승악의 돌 하나가 둘로 갈라져 이를 얻었다. 같은 달 28일 두 무리가 일을 시작하여, 9월 1일 이곳에 이르렀으며, 이듬 해 정미년(827년) 2월 30일에 모두 마쳤다. 이 때의 주통은 황룡사의 항창화상이다. 상화상은 진행법사이며, 정좌는 의설법사이고, 상좌는 연숭법사이다. 사사는 둘인데 묘범법사와 칙영법사이다. 전내유내는 둘인데 창악법사와 법지법사이다. 도상은 둘인데 지생법사와 진방법사이며, 작상은 수남법사이다.」

 

 

이로 인한 내용으로 보아 당시 중초사에는 많은 무리의 승려들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고작은 직분을 갖고 있는 승려만 보아도 10여명이 넘기 때문이다. 당시는 국통 밑에 주통과 군통이 있었는데, 중초사에 주통이 있었다는 것은 중초사가 작은 사찰이 아닌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에 절의 살림을 맡아하는 원주(정좌), 교육을 담당하는 교무(사사), 자금의 츨납 및 사무를 관장하는 재무(상좌) 등이 있었다는 것은 소임을 맡지 않은 승려들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중초사에서 승악(현재의 관악산을 뜻한은 것으로 보임)에서 8월 6일 돌을 취하여, 28일에 두 개의 돌을 두 무리가 나누어 중초사로 운반을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9월 1일에 중초사에 도착을 한 것으로 적고 있다.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불구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하기에 절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이 당간은 당과 당간, 그리고 지주로 구분이 되어있다.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양 지주가 원래 모습대로 85㎝ 간격을 두고 동서로 서 있다. 이곳을 중초사터라고 하는 것은 서쪽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기록에 따른 것이다. 현재 지주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고, 다만 지주 사이와 양쪽 지주의 바깥에 하나씩 총 3장을 깔아서 바닥돌로 삼고 있는데, 이 역시도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는 받침은 지주 사이에 돌을 마련하고 그 중심에 지름 36㎝의 둥그런 구멍을 뚫어서 마련하였다. 양쪽 지주에 장식적인 꾸밈이 없으며, 윗부분을 둥글게 다듬은 흔적이 있어 시대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멍을 각각 지주의 상·중·하 세 곳에 뚫었다.

 

굳게 닫힌 문, 한 바퀴 돌아오니 활쫙 열려

 

2012년 3월 3일 안양으로 향했다. 이것저것 석수동 인근에 있다는 문화재들을 촬영한 욕심에서이다. 먼저 중초사터를 찾아 들었으나, 당간지주와 석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철문에는 굳게 잠을통이 걸려있다. 한참을 밖에서 애를 태우며 서성거리고 있는데, 마을 주민들이 토요일이면 12시에 문을 걸고 담당자가 퇴근을 한다는 것이다.

 

근 30분 이상을 안양시청과 구청, 동사무소 등에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르겠음’이란다. 어딜 가나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는 것에 가장 분통이 터진다. 더욱 요즈음은 주말과 휴일이면 문화재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렇게 잠겨 있는 문화재를 볼 때마다 참 답답하다.

 

근처에 있다는 석수동 마애종을 먼저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있다. 걸음을 빨리해 쫒아가니 굳게 닫힌 철문이 열려있다. 아마도 그 안에 건물이 볼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밖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문화재를 만난 것이다.

 

 

 

 

중초사지 당간지주는 섬세하지는 않아도,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쪽 지주의 바깥쪽에 새겨진 명문은 모두 6행 123자로 해서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 30일에 건립이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은 희귀한 예로, 만든 해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국내에서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중초사가 어떤 절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변 가까운 것에 마애종들을 볼 때 아마도 당시 중초사란 절은 상당한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중초사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만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기록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 것이다.


당간은 절 입구에 세워놓는 깃대의 일종이다. 이 당간은 절에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것으로 장간, 찰간, 기간, 번간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 당간은 목재나 철, 동, 석재 등으로 간대를 만들며, 지주는 대개 석재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전역에는 많은 당간지주가 남아있으나, 당간의 간대가 남아있는 경우는 흔치가 않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통도사 솟을삼문 입구 하천변에 세워져 있는 당간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403호이다. 통도사 경내에는 수많은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지만, 통도사를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당간이다. 당간은 어느 절이나 절 입구에 세워놓기 때문에, 절이 폐사가 되었어도 당간의 위치를 보면 그 절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탑처럼 꾸민 높이 7.5m의 석당간

석당간은 우리나라에는 몇 기만이 남아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통도사 석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후대에 와서 중수된 것이다. 기단부는 전반적으로 후대에 중수를 하면서 개보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통도사 당간이 특별한 것은 마치 탑의 기단부와 같이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장대석으로 사방 하대의 윤곽을 잡고, 다시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았다. 기단석 남북 양편으로는 지주가 맞물릴 수 있도록 유구를 두었다. 지주의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두 개의 간공을 내고, 동서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하였다.




성호를 새긴 당간의 간대석

중앙에 간대는 옛 간대 그대로라고 하는데, 중앙에는 성호인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통도사 석당간은 후대에 이르러 보수를 하면서 약간 그 형태가 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석당간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7월 11일 이른 새벽부터 날이 우중충하다. 금방이라도 비가 퍼 부을 것만 같은 날씨에 양산 통도사로 향했다. 영축총림이라는 통도사는 벌써 10여 차례나 둘러본 곳이다. 하지만 갈 때마다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통도사처럼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절을 찾아간다는 것은 늘 마음이 설렌다. 아마도 한 곳에서 다양한 문화재를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답사를 한 통도사

3시간 넘게 차를 달려 도착한 통도사. 떠날 때와는 달리 날이 뜨겁다. 몸이 편치가 않은데도 주차장에 도착을 해 바로 당간이 있는 곳을 찾았다. 냇가 옆에 서 있는 당간을 돌아본다. 통도사 석당간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당간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사방에 네 개의 장대석으로 두른 후 그 안에 3층으로 기단을 놓았다. 기단 양편으로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지주를 양편에 놓고, 상하로 당간을 고정시키는 구멍을 뚫어 석재로 만든 비녀를 꽂았다. 당간은 원형의 돌로 세웠는데, 몇 개의 석재를 이은 듯하다.



당간을 둘러 본 후 솟을삼문을 지나 안으로 향한다. 무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 한다. 천천히 걷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숨이 턱에 찬다. 찬물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들어 마음이 더욱 바빠지는 것은, 갈 곳은 많고 시간은 자꾸만 촉박하다는 느낌이 들어서인가 보다. 그래도 이 많은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천근이나 되는 몸을 버티며 걷는다. 마치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당간이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놓은 장대를 말한다. 이 당간을 세우기 위해서는 양편에 지주를 세우게 되는데, 이를 당간지주하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조성 된 수많은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그러나 당간이 남아있는 곳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그 중에서도 철로 만들어 진 당간은 공주 갑사와 안성 칠장사, 그리고 청주 등이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번화가에는 철 당간이 한 기 서 있다. 국보 제4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철 당간은 그 모양부터가 웅장하며, 아직도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 철 당간이 서 있는 곳은 예전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에 창건된 용두사가 서 있던 자리라고 한다. 용두사는 고려 말의 잦은 전쟁으로 폐사가 되고, 남은 것은 이 당간 한 기뿐이다.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청주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나서 찾아간 철 당간. 앞으로는 젊은이들의 거리가 있다. 여기저기 젊은이들이 길을 메우고 있고, 예전 극장자리라는 곳에 철 당간이 서 있다. 철 당간은 길의 높이보다 조금 낮게 되어있으면 주변은 보호책을 쳐 놓았다. 아마 이렇게 깊게 서 있는 것은, 당시의 높이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인 듯하다.

용두사지 철 당간은 밑을 받치고 받침돌이 있고, 양편을 지탱하는 두 개의 지주가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바깥 면에는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선으로 돋을새김 하였다. 지주의 윗부분에는 빗장과 같은 장치를 쇠로 둘러 당간을 고정시켰다. 현재 남아있는 철 당간은 원통모양의 철통을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만들어 서로 맞물리게 20개를 쌓았다.



현재는 20개의 당간의 높이가 12.7m에 달하지만, 처음 이 철 당간을 제작했을 때는 30개를 연결하여 세웠다고 한다. 청주 용두사지 철 당간은 밑에서부터 셋째 번의 원형철통 표면에 <용두사철당기>라는 명문이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건립 년대가 준풍 3년, 곧 고려 광종 13년인 962년 3월 29일이라는 것이다.

홍수를 막기 위해 세운 당간이 용두사지 당간은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 온다. 예로부터 청주는 홍수가 잦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잦은 홍수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는데, 어느 점술가가 말하기를 ‘청주는 배의 형상이라 높은 돛대를 세워 놓아야 재난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단다. 그래서 돛대 구실을 하는 이 철 당간을 세웠더니, 그 때부터 재난이 닥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당간의 전체 높이 12.7m, 철제 원통당간의 높이는 63cm이며, 지주의 높이는 4.2m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원래 이 용두사지 철 당간의 높이는 19m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철 당간의 모습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용두사지 당간.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라 그런가, 이 당간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 옆에 앉아 침을 뱉고 담배를 피워대는 것을 보면.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이런 모습은 정말로 짜증이 난다. 더구나 요즘 젊은이들은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아니던가? 괜한 소리 한 마디를 해보지만, 미안한 기색도 없다. 가면 될 것 아니냐는 그런 표정이다. 그 잘 붙여놓는 금연문구 하나쯤 만들어 놓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꼭 그래야만 조심하는 사람들이 더 문제지만. 철에 매연은 상극이라는데 말이다. 주변에서 뿜어나오는 각종 매연도 당간에 영향을 줄텐데, 그 주위에 둘러앉아 억세게 담배를 피워대니 국보의 안전이 온전할까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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