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재 서울 경기지역에 첫 눈이 내렸다. 첫 눈이라고 하지만 눈이 온 표시도 나지 않게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그쳐버렸다. 한 겨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은 가급적이면 고택답사는 피하고 있다. 그것은 눈에 덮힌 고택의 정취는 아름답지만, 곳곳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오리 고가를 찾아 간 날은 눈이 발목까지 빠지게 쌓여있는 날이었다.

 

제천시 한수면 소재지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한수면에 있는 덕주사를 찾아가기 전, 좌측으로 보면 도로에서 조금 들어가 한송초등학교가 있다. 그 학교 교문 옆에는 초가 한 채와 기와 한 채가 나란히 보인다. 이 초가가 충북 민속문화재 제5호인 한수 명오리 고가이다. 이 명오리 고가는 초가로 꾸며졌으며, 원래는 한수면 명오리 303번지 풍무골에 있었던 것을, 충주댐의 건설로 1983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눈밭에 집 주위를 몇 바퀴나 돌아

 

명오리 고가를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가는 집이지만, 갈 때마다 문이 잠겨 있었다. 대문 안으로 보면 슬리퍼 등도 보이고, 패널을 여기저기 쌓아 놓은 것이 사람이 사는 집 같은데 항상 문이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다. 이곳도 눈이 꽤나 내렸는지 집 뒤편으로 돌아가니, 밭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 쌓여있고 담장의 초가위에도 눈이 쌓여있다. 할 수 없이 눈밭을 몇 바퀴를 돌면서, 집의 구석구석을 촬영하는 수밖에. 고가를 찾아다니다가 보면 이렇게 문이 잠겨 있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명오리 고가는 튼 ㅁ 자형의 집이다. 대문을 사랑채로 삼아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에는 두 칸 방을 드렸고, 대문을 지나 남쪽으로는 방과 외양간, 방앗간, 광으로 배열하였다. ㄴ 자형의 이 대문채는 사랑과 대문채를 겸한 집이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민가의 형태를 갖고 있는 명오리 고가는 특별한 점은 없으나, 나름대로 중부지방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고가이다.

 

 

건넌방에 낸 까치구멍의 용도는?

 

명오리 고가의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대문채와 마주하고 있다. 삼단의 돌로 쌓은 기단위에 지은 안채는, 안방을 기준으로 하여 정남향을 하고 있다. 안방의 좌측으로는 부엌이 있고, 우측으로는 윗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는 한 칸 대청과 건넌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의 부엌 앞에는 누군가 패널을 가득 쌓아 놓아, 밖에서는 부엌문을 확인할 수가 없다.

 

밖을 몇 바퀴를 돌았지만, 안방이 있는 곳은 가려서 보이지를 않는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안방의 뒤편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고가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름대로의 답사방법이다. 이제는 웬만한 집은 밖에서 한 바퀴만 돌아보아도 집안 구조를 알 수 있으니, 그도 다행이랄 수밖에.

 

 

안채는 평범한 민가의 꾸밈이다. 그런데 안채의 건넌방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건넌방의 앞쪽에는 툇간으로 달아낸 한데 아궁이를 두었는데, 그 아궁이 우측에 까치구멍이 있다. 바람을 막으려고 종이로 발라 놓았지만, 이렇게 건넌방에 까치구멍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 까치구멍의 용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냥 작은 쪽문이라면 이 문을 통해 음식물 등을 들여보낼 수 있다고 하지만, 까치구멍이라니.

 

건넌방의 옆문 밖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다. 뒤로 돌아가니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이 있다. 옆과 뒷면을 보고나서야 이 까치구멍의 용도가 이해가 간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도 뒷벽에 문을 하나정도 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건넌방은 툇마루를 놓은 곳과, 대청에서 드나드는 곳 밖에 문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작은 까치구멍을 한데 아궁이쪽에 하나 내어놓음으로써 환기를 원활하게 한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서도 느낄 수 있는 지혜다.

 

 

판자굴뚝이 아름다운 집

 

명오리 고가는 굴뚝이 모두 판자굴뚝이다. 이 판자굴뚝이 이 초가집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판자굴뚝은 네모난 판자로 길게 사각의 연기통을 만들고, 그 중간에는 역시 나무로 움직이지 않게 고정을 시켰다. 그리고 맨 위에는 사방을 트이게 해, 위를 꺾은 판자로 마감을 하였다. 흡사 고깔을 쓴 것처럼 만들었는데, 모든 방의 뒤편에는 이 판자굴뚝이 서 있다. 이 판자굴뚝이 서 있어, 초가집이 더욱 여유 있게 보인다.

 

명오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집은 전체적으로 크지 않지만, 이용을 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조금 흐트러진 사각형으로 쌓은 담 안에 집을 놓았는데, 대문채에서 북쪽 담 끄트머리에 측간을 두었다. 그리고 안채 부엌 밖에는 또 다른 한데 아궁이를 놓았다. 이렇게 전체적인 조형을 생각한 것이 명오리 고가의 특징이다. 비록 화려하지도 않고 남다를 것도 없는 초가이지만, 그 안에 한껏 여유를 부린 집이다.

 

지금은 한가한 포구의 모습만 보이고 있다. 이곳이 예전에는 수군들로 북적이던 곳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한 때는 충청도 수군의 총 사령부가 있었다는 곳. 충청수영성은 경관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오천항을 내려다보고 있는 충청수영성. 벌써 몇 번째 찾아온 충청수영성.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에 소재한 사적 제501호인 보령 충청수영성을 찾은 것은 106일이다.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인 1896년에 폐영이 되었다. 충청수영성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일몰 즈음에 만난 오천항의 장관

 

10월의 해는 짧다. 더구나 잔뜩 흐린날이라 그런지 오후 5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어둑하다. 차를 달려 찾아간 보령시 오천면 충청수영성. 지금은 아치로 조성한 서문의 석문과 진휼청만이 남아있다. 서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바닷가로 삐죽 얼굴을 내민 성벽 위에 진휼청이 서 있다.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했던 곳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진휼청은 충청수영이 폐지된 후 민가로 사용이 되었다고 한다.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을 하고 있다. 진휼청은 정면 5, 측면 2칸의 집이다. 진휼청은 그리 크지 않은 집으로 대청과 부엌, 온돌방, 툇마루 등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진휼청을 돌아본 후 성벽 위에 올라서 오천항을 내려다본다. 저 오천항에 수많은 어선들이 묶여있는 곳에, 예전에는 모두 군선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충청수영은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의 침탈을 방지했다고 한다.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는 충청수영성. 해질녘 내려다보는 오천항은 숨을 죽인 듯 고요하기만 하다.

 

충청지역 해로의 요충지 충청수영성

 

선조 29년인 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인 15977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충청수영은 서해안을 지켜내는 요충지였지만, 많은 아픔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곳이다. 서해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는 성내의 정자인 영보정은,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전한다. 서문 밖의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아픔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성을 한 바퀴 돌아보다.

 

해가 설핏하다. 서둘러 성벽 위를 걸어 한 바퀴 돌아본다. 근래 들어 도로개설이나 해변의 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872년에 그려진 충청수영성의 고지도에 보면 세 곳의 성문을 비롯해. 한 곳의 서소문과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

 

 

현재는 객사와 내삼문이 남아있지만, 한때는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인 충청수영성은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 요해처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역사적인 성지이다. 귀중한 유적인 충청수영성의 영보정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서해. 잔뜩 검게 낀 구름으로 인해 서해로 떨어지는 일몰의 장관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서울에 자료조사를 할 일이 있어 이틀간이나 서울을 오가다가 보니, 문화재답사를 떠나기로 한 예정시간을 지나버렸다. 바쁘게 여장을 차리고 떠난 답사길.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하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하다. 고속도로를 달려 찾아간 충남 보령시. 사람들은 보령이라고 하기보다는, 대천이라고 말을 해야 더 빨리 알아듣는다.

 

보령시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다. 사적인 성주사지에는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다수의 지방 문화재가 있다. 성주사지에서 가까운 곳에는 석탄박물관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하루 만에 돌아본 문화재와 유적만 해도 상당하다. 고성(固城) 세 곳에, 석조물과 사찰, 고택과 문화재로 지정된 노송, 그리고 도미부인의 사당 등을 돌아보았다.

 

 

문화재답사,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재답사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 어디를 돌아볼 것인지, 또 동선을 어떻게 잡아야 가장 빠른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 문화재를 만나면 무엇을 중심으로 촬영을 한 것인지 등을 세세하게 파악을 해두어야 한다.

 

또한 문화재 답사를 할 때는 가급적이면 한 지역을 중점적으로 답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지역을 답사를 하려고 생각을 했다면, 그 지자체를 먼저 찾아간 자료(문화재 장소와 지도 등)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자료를 기본으로 동선을 정해 답사를 시작해야 한다.

 

 

답사를 할 때는 어느 것 하나 빠트려서는 안된다. 답사지역을 들어가 문화재를 만나면 가장 먼저 볼 것은 바로 안내판이다. 그 안내판에는 문화재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기 때문에, 어떻게 접근을 할 것인가를 사전에 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문화재의 모든 것을 세세하게 촬영을 해두어야만 한다.

 

문화재 답사의 또 다른 즐거움

 

문화재 답사를 할 때 가급적이면 국도를 이용한다, 대개 문화재는 국도나 지방도 변에 이정표가 걸려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처음에 예정하지 않았던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다. 그럴 때의 기분이란 바로 보물 하나를 얻은 듯하다. 답사를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설명만으로 그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어렵다.

   

 

문화재 답사의 즐거움이란 것이 어디 그것뿐인가? 처음으로 접하는 문화재에서 느끼는 수많은 상념들. 수천 년을 그 자리에서서 역사를 지켜 본 문화재와의 말 없는 대화. 그것은 오래도록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나만의 버릇이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가 보면, 문화재의 깊은 내면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도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 그 안으로 들어가 보자.

 

문화재를 오래도록 답사를 하다가 보면, 남들은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찾아 낼 수가 있다. 학술적인 것이 아닌, 그 문화재에 얽힌 전설 등 이야기이다. 그런 이야기는 주변 마을에서 찾아낼 수가 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을 찾아낸다는 즐거움. 그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비록 바쁜 일정으로 인해 힘들게 돌아본 답사 길이었으나, 그 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수많은 역사속의 진실. 이런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문화재 답사의 진정한 즐거움이다. 문화재란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더 가까이 다가가 많은 이야기를 할 때라야, 그 자리를 굳에 지켜낼 수 있기 때문이다.

 

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516-2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인 ‘정산향교 (定山鄕校)’가 소재한다. 정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향교 입구인 청아루

 

정산향교의 구성은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청아루와 전사청이 있고, 제사 공간으로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산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현재는 봄,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정산향교의 특별한 구성은 입구에 있는 누각인 청아루이다. 목조건물로 된 향교 입구인 청아루는 아래로는 삼문을 내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형태이다. 이 청아루는 밖으로만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쪽으로도 또 문이 있는 이중문으로 꾸며져 있다.

 

 

장맛비 속에 찾아간 정산향교

 

벌써 정산향교를 다녀온 지가 20여일이 지났다. 문화재 답사란 그 특성상 다녀왔다고 바로 글을 올릴 수가 없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꽤 많은 양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역과 종류가 다른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소개한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결국 한 번 답사를 다녀오면, 누구 말마따나 곶감 빼 먹듯 할 수밖에.

 

7월 14일 돌아본 충남 청양군. 정산향교는 답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그런 날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정산향교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리 여름날이라고는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일찍 날이 저문다. 오후 5시 경이었지만, 벌써 어둑한 기운이 감돈다.

 

 

향교는 대개 그 담장 외곽에 붙어있거나, 가까운 곳에 관리를 하는 집들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럴만한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 빗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포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빗길에 멀리 달려온 향교가 아닌가. 그냥 돌아갈 수가 없다. 할 수없이 담장 밖으로 돌아보는 수밖에.

 

수령 640년의 은행나무에게 묻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면 대개 고목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들은 향교와 그 역사를 같이한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경내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정산향교의 경우에는 주변 높은 곳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40년에 높이는 18m, 밑동의 둘레가 5.2m가 넘는 거목이다.

 

 

은행나무 쪽으로 올라가면 정산향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은행나무와 정산향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향교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밖에서나마 향교를 살펴보는 수밖에. 담장 가까이 다가가려니 자라난 풀들이 엄청나다. 풀 더미를 헤치고 담장 가까이 가서 향교를 살펴본다.

 

정산향교는 딴 곳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성전의 경우 외담 안에 다시 내담을 쌓아 놓았다. 또 측면 담벼락에도 격자창을 내어 놓았다. 다행히 향교의 관리자가 대성전 위편 담장 밖의 풀을 깎아놓아 주변을 돌아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청양 정산향교. 비록 안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돌면서도 향교의 곳곳을 살펴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향교 담장 밖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차에 오르자, 다시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가을에 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은 역시 먹거리이다. 매끼마다 잘 모르는 식당을 찾아들어야 하는 일도 꽤나 고민일 수밖에 없다. 대개는 그 지역을 답사하기 전에 인터넷을 검색해 맛집을 알아놓고는 가지만, 거의 50% 이상은 입맛에 맞지를 않아 몇 수저 뜨고는 돌아 나오기가 일쑤였다.

 

물론 이렇게 검색을 한 집이 맛이 없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니, 내 입에 안 맞았을 뿐이다. 화학조미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런 조미료를 이용해 음식 맛을 내는 집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7월 28일(일), 일행 30여 명이 버스를 이용해 떠난 수원 지동 고려암의 삼사순례 길.

 

 

홍성에서 만난 내포 기사식당

 

서산 간월암을 거쳐 예산 수덕사를 두 번째 답사지로 정하고 가던 중에 홍성을 거친다. 그곳에서 만난 <한식뷔페 내포 기사식당>.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421번지에 소재한 뷔페식당이다. 어느 도시의 아름답거나 분위기 있는 그런 식당은 아니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식당의 모습이다. 앞에는 대형 버스도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있어서 좋다.

 

안으로 들어가니 12시가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꽤 앉아 있다. 뷔페야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용기에 잠아와 먹으면 된다. 또 몇 번을 갖다 먹어도 누가 무엇이라고 하지 않는다. 손님 한 사람이 ‘세 번째’라고 하면서 접시를 들고 찬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먹성이 좋다고 하지만 세 번째라면, 이 집 음식은 검정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3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반찬, 맛깔스러워

 

우선 밥 종류도 다양하다. 보리밥에 야채밥까지 있다. 밥을 퍼 담고, 반찬이 늘어있는 곳으로 향했다. 30여 가지가 넘는 우리 음식이 맘에 든다. 야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속으로 ‘대박이다’를 외친다. 그만큼 다양한 종류의 반찬들이 모인다. 반찬을 용기에 담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그 사이에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기사식당이라고 했지만, 기사 차림보다는 일반인들이 더 많은 듯하다. 하기야 아직은 기사분들이 밥을 먹으러 올 시간이 아니다. 어린 아이도 용기를 들고 부모님 손을 잡고 서 있다. ‘미취학 아동은 3,000원’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미취학이라고 해도 요즈음 아이들 7세만 되면 어른 못지않게 먹성이 좋은데. 내가 할 걱정은 아니지만, 주인의 착한 심성이 엿보인다.

 

특히 이곳의 음식 중에서 별미가 있다면 바로 호박죽이다. 나야 워낙 죽을 잘 안 먹으니 벅지는 봇했지만, 식사를 하는 손님마다 호박 한 그릇은 필수인 듯하다. 이야기를 들으니 이 집 호박죽은 이미 소문이 나 있어, 일부러 호박죽을 들기 위해 어르신들이 찾아오기도 한다고.

 

 

나물 종류가 많아 보리밥에 비벼먹기가 딱 좋은 집이다. 우선은 밥 한 그릇을 먹어보고 다시 생각을 하기로 했다. 평소 양이 크지 않은 나로서는 무리를 해가며 밥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밥이란 적당히 먹고, 적당히 배부르고, 적당히 기분 좋으면 그만이라는 내 적당주의 때문이다.

 

떨어지기 무섭게 갖다놓는 반찬들

 

이제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고 기사식당 대표인 장삼진씨가 말한다. 원래 경기도 분당에서 화장품 대리점을 했다고 하는 주인이, 이곳에 와서 3개월 만에 이렇게 많은 단골을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음식 맛이 있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반찬들이 하나같이 정갈스럽고 담백하다.

 

 

나에게는 이보다 좋은 식당은 없을 듯하다. 가는 곳마다 이런 집 하나만 있으면, 끼니 걱정은 절대 없을 것 같다. 한 접시 퍼 온 음식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의 값을 이미 먹었다는 생각이다. 밖에 나와 아이스크림까지 먹고 나니, 5,000원으로 너무 호강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일행들이 식사가 끝나지 않아 밖에서 쉬고 있으려니 벽에 문구가 걸려있다. ‘25일부터 파라솔 술자리가 준비됩니다.’라니. 주인에게 물어보니 저녁에 술손님들이 있어 밖에 자리를 펴고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음식 값이 거의 만원 수준이다. 삼사순례 길에서 만난 내포기사식당. 모처럼 답사 길에 흡족한 음식을 먹었다. 주인의 심성 또한 음식에 가득 담겨 있어 더 좋은 집이다.

 

 

상호 : 한식뷔페 내포 기사식당

주소 : 충남 홍성군 홍성읍 대교리 421

전화 : (041) 634 - 7002 / 010-5339-3303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