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은 건물 대지의 경계선이나 설치물의 주위에 두른 구조물을 말한다. 담은 순우리말이며, 한자로는 원(垣)·장(墻)·원장(垣墻)·장원(墻垣)·장옥(墻屋), 우리말과 한자가 합쳐진 말로는 담장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그중 경미한 재료로 만들어지거나 안이 보이게 만들어진 것을 울·울타리·바자울[笆子籬]·울짱·책(柵)·장리(牆籬)라 한다. 반대로 성벽·성곽과 같이 대규모인 것도 있다. 담의 기능에는 공간의 구획, 외부로부터의 침입이나 들여다보는 것의 방지, 화재 등의 위험방지, 위엄과 존엄성을 나타내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담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생나무를 심는 생울이 있는가 하면,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막아놓은 울타리가 있다. 진흙에 짚을 썰어넣어 이겨서 만든 흙담도 있고, 널판지로 계를 두른 판장과 판담이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돌담, 영롱담, 꽃담 등 담은 그 재료 등으로 담장의 구분하고 있음을 본다.

 

 

 

담장의 용도는 과연 경계이고 차단일까?

 

그러나 정말로 이 담이 경계를 막고 설치물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담장이 이웃과의 경계를 가르는 용도로 쓰이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담은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다. 그리고 외부와의 차단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결성을 위한 보호적인 차원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을 담장 너머로 전해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이 차단이라면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담은 바로 나눔이요, 소통이다.

 

 

 

 

 

민초들의 담과 가진자들의 담은 극과 극이다

 

우리 민가의 담을 보면 막힘이 아니다. 문이라고 해보아야 싸리를 엮어만든 문이다. 그리고 담장이라고 해보아야 어른 키의 목밑이다. 누구나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옆집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보호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통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민가의 담장이다. 사대부가의 높은 벽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그렇다면 왜 우리 민가의 담은 이렇게 낮은 것일까?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통이다. 사대부가들이 숨길 것이 많다면 민초들은 숨길 것이 없다. 어느 집이나 터놓고 돌아다녀도 잊어버릴만한 것도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담을 높게 두를 이유도 없고, 안이 안 보이게 문을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바람 정도만 막아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저 허전함만 가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같은 민초들끼리는 서로 피가 통하기 때문이다. 숨기고 감추고 속이는 그러한 담장이 아니라, 소통하고 열고 보여주는 그런 것이 바로 민초들의 담장이다.

 

역사는 늘 담으로 사람들을 구분했다

 

민가의 담을 보면 끝이 없다. 그저 이집에서 저집으로, 또 그 다음집으로 담이 연결이 된다. 낮은 처마 밑으로 두른 담장은 그보다 많이 낮게 만든다. 나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나를 숨길 것도 없고 은밀히 숨어서 할 일도 없다. 그런데 이런 담장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즉 담은 어느 시대에서나 소통과 단절로 대두된다.

 

 

 

 

 

소통은 민초들이요, 단절은 가진자들이다. 가진자들은 보여주기를 꺼린다. 그리고 늘 은밀히 안에 틀어박혀 궁리를 한다. 대개는 그 안에서 서로 목소리를 죽여 몹쓸 짓을 연구한다. 그리고 더 많은 몹쓸 짓을 생각해 낸다.

 

민초들의 담장은 스스로 낮춘다. 스스로가 부끄러움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저 있는 대로 행하고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진자들은 항상 숨기려고만 든다. 그러한 검은 사고들이 담장을 높게 만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 위엄이라고 생각들을 했기 때문이다. 소통과 보여줌, 숨김과 차단. 이것은 긴 세월 속에서 변하지 않고 전해진 우리 담장의 철학이다.

 

 

 

 

 

담은 공유를 하는 것이다

 

가진자들은 늘 소통하고 보여주는 민초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은 감추고 가리는 것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들은 서민을 위해서 산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집의 담을 낮추고, 마음의 담을 낮추지 않고는, 절대로 낮은 담을 사이에 두고 사는 민초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가 없다. 담장의 철학은 사람들을 일깨우지만 그들은 그 속내조차 모르고 산다.

 

우리의 담장이 주는 철학. 내가 쌓은 담은 안편에서는 우리 담이 되지만 밖으로는 상대의 담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담장의 마음이다. 하나의 담장이 서로를 소통하게 만드는 것이다. 높은 담을 가진 자들. 이제 스스로 그 높은 담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그들과는 절대로 담을 공유할 수가 없다.

 

봄철이 되면 문화유적이 한번쯤은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바로 겨우내 얼었던 담장이나 지붕이, 봄이 되어 해동이 되면서 갈라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수원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많은 구조물부터, 많은 문화유적을 갖고 있는 곳이다. 하기에 봄철이 되면 각별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전국의 많은 문화재들이 긴 겨울을 지나고 봄이 되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도 하고 기와 등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 고택 등이나 많은 문화재 전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과연 우리 수원의 문화재들은 봄철에 제대로 관리는 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25일 화령전과 26일 서장대를 거쳐 성신사까지이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사적 제47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성 행궁 옆에는, 화령전이라는 또 하나의 사적이 있다. 화령전 역시 일제에 의해 일부 훼파가 되었지만, 화령전의 정전인 운한각과 풍화당이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화령전은 정조가 살아생전 지어진 것이 아니고,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서 지어진 어진봉안각이다.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화령전 안에 있는 운한각은, 1801년에 건립된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기도 하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어진을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

 

원래 화령전에는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비롯하여, 일이 있을 때 어진을 피난시켰던 이안청과 풍화당, 그리고 제정과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원래 건물 그대로 남아있던 운한각과 풍화당, 그리고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어정 뒤편 담장 흙 무너져 내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제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전사청 안에는 어정(御井)이라고 하는 제정(祭井)이 있다. 이 제정은 화령전에서 이루어지는 제의식에 사용할 정화수를 뜨는 곳이다. 현재의 제정은 정방형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제정의 높이는 5.5m이며, 물의 깊이는 4m정도이다. 지금도 음용수의 기준인 46개 항목을 모두 통과한다는 어정수이다.

 

 

그런데 이 제정 뒤편의 흙담이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봄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화령전을 찾아오고 있다. ‘사적의 담장이 일부 흙이 떨어져 볼품이 없는데 저렇게 방치를 하네요. 담당부서가 없는 것인지 원.’. 관람객 한 사람이 혀를 찬다.

 

성신각 담장 틈이 벌어지고 지붕에 흙 흘러내려

 

정조대왕은 화성 성역이 완료되는 시기에 맞추어 특별지시를 내렸다. 바로 성신사를 지으라는 것이었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신이기는 하지만, 당시로 보면 수원전역을 보호하는 신이기도 하다. 팔달산 중턱 서장대 아래 성신사를 축조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성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정조대왕은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며 화성과 화성 백성들을 사랑하는 축문을 직접 지어 하사를 하기도 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71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약 한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사당이 완성된 후에는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길일을 기려, 1796919일에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화성의 신을 모시는 성신사는 팔달산 기슭의 병풍바위 아래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당은 53가인데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었다. 앞 기둥 안쪽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았고, 당 아래에는 층이지게 기단을 놓았다. 정당 앞으로는 3문을 세웠으며, 좌우로는 5간 행각을 붙였다. 남쪽으로 2간은 안쪽으로 행하게 하여 전사청을 삼았고, 북으로 3간은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재실 1, 마루 1, 나머지 1간은 공랑을 삼았다.

 

정조대왕 당시의 성신사는 일제에 의해 훼파가 되었으며, ()화성연구회의 무단한 노력으로 200910월에 다시 복원을 하였다. 이 때의 복원에 들어가는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신사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26일 오후 서장대를 거쳐 계단을 통해 성신사로 내려왔다. 그런데 성신사를 돌아보다가 깜짝 놀랐다. 담장은 여기저기 금이 갔는데, 어느 곳은 보수를 하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이다. 거기다가 성신을 모신 전각 뒤편에 있는 제정은 물이 하나도 없다. 물론 가물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지저분한 우물의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것이 볼썽사납다.

 

문제는 성신사의 지붕이다. 기와 위로 붉은 흙깉은 것이 잔득 흘러내렸다. 기와를 놓을 때 밑에 깔았던 흙이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흙이 말라 흘러내린다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릴 수도 있다. 위험한 모습이다. 한 마디로 성신사의 복원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두 곳 다 속히 시급한 보수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칫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다.

속초에서 7번 국도를 이용해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을 향해 가다가 보면, 우측에 왕곡마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고성군 죽왕면 송지호 뒤편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지금의 오봉1리의 옛날 명칭이다. 14세기경 강릉함씨, 강릉최씨가 용궁김씨와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마을이다.

 

왕곡마을이 처음 생겨난 것은, 고려 말 함부열이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여 은거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후, 150여년에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왕곡리에는 함씨, 최씨, 진씨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살고 있다. 현대문화의 범람에도 변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왕곡마을을 둘러보았다.

 

 

19세기에 조성된 왕곡마을

 

왕곡마을을 찾았다. 모처럼 날씨가 푹해 답사하기에는 제격이다. 왕곡마을에는 19세기를 전후해 지어진 북방식 전총한옥 21채가 있다. 전국적으로 유일하게옛 모습을 그런데도 지켜오는 밀집된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을을 둘러쌓고 있는 5개의 봉우리로 인해, 6.25 한국동란 때에도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다.

 

왕곡마을의 가옥구조는 안방과 사랑방, 마루와 부엌을 20~30평 규모로 한 건물 내에 수용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유난히 기와집들이 많다. 이 집들은 모두 강원도 북부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양통집이다. 또한 부엌의 앞에 외양간을 덧붙여, 겨울이 긴 추운지방의 기온을 버틸 수 있도록 꾸며진 집들이다. 왕곡마을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을 가까이 하고 있으며, 주변을 산이 둘러쳐진 병풍 안에 자리한 마을이기도 하다.

 

 

담장 위에 올린 항아리 무엇이지?

 

이렇게 왕곡마을에 기와집이 많은 이유는, 인접하고 있는 구성리에 기와를 굽는 곳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런데 왕곡마을을 돌다가 보면 두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 첫 째는 담장에 낸 굴뚝이다. 마을의 집집마다 굴뚝이 서 있는데, 그 굴뚝을 담장에 붙여서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굴뚝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들이다. 이 마을은 집집마다 굴뚝위에 항아리를 얹어 놓았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지키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엔 우물이 없는데 마을이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한다. 예부터 이 마을은 모두 부자가 아니어도 기와집을 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근 구성리 마을에 기와 굽는 가마가 있어서 였다고 한다.

 

 

동해안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한 전통 한옥마을로, 14세기 경 부터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 용궁 김씨 등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왕곡마을은 강원도 동해안 송지호 해수욕장에서 0.5지점에 있으며 주변의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서 취락을 이루고 있는 전통한옥마을이다. 이 마을은 강릉함씨와 강릉최씨, 용궁김씨 등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 분인 함부열이 조선왕조의 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은거한데서 연유되며 임진왜란으로 폐허화된 이래 150여 년 간 걸쳐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의 거주 현황은 함씨(25), 최씨(11), 진씨(4)가 주를 이루고 이밖에 이씨, 박씨, 김씨, 한씨, 윤씨 등이 있다. 이 마을은 14세기경부터 강릉함씨, 강릉최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온 곳으로 수려한 자연 환경 속에 취락을 형성하고 19세기를 전후하여 건축된 북방식 전통가옥들이 군락을 이루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현대 문화의 변화와 영향에도 불구하고 자연경관 주택 건축 농업위주의 생활 등이 원래의 모습대로 전래되고 있어 전통민속마을의 가치가 인정된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고개 너머를 ‘잿말’이라고 한다. ‘잿말’이란 <고개마을>이라는 뜻이다. 잿말은 충주군 감미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음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수일, 병조참판을 지낸 정우명 등이 이 잿말 출신이다. 특히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란 점에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이 상당한 곳이기도 하다. 효자 김대환은 부친이 심부전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장기를 이식해 부친을 회생시키기도 했다.


이완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

이러한 잿말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김주태 가옥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완(1602∼167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인조 2년인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이완대장은 48세인 1649년 효종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시작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완대장은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전면 중단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며,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사대부가의 위엄이 서린 사랑채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김주태 가옥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지닌 고택이다. 김주태 가옥은 300여 년 전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이완대장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집이 현재의 김주태 가옥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사랑채는 상량문에 고종 광무 5년인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김주태 가옥의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지나 석축으로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 자로 사랑채를 앉혔다. 남향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지체 높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오르려면 계단을 올라 앞마당이 있고, 그 위에 축대를 올려 사랑채를 지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는 솟을대문의 지붕과 같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를 마주하면 좌측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앞에서는 벽으로 막혀 볼 수가 없다. 우측 끝에는 누마루를 한단 높여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전면 모두 창호로 문을 냈으며, 뒤편에는 양편으로 작은 문을 만들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하인들이 묵을 수 있는 행랑방들이 줄을 지어있다. 굳이 사랑의 어르신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지어진 집이라는 느낌이다.



 

대문채엔 난 쪽문의 비밀

김주태 가옥의 대문채에는 방이 없다. 대문의 양 편으로는 곳간을 드렸다. 그런데 이 대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대문을 마주하고 우측을 보면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쪽문이라고 하는 이 문을 열면, 천정이 낮은 곳으로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대문을 열지 않고도, 이 문으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만들었다.

이 문은 언제 사용하였을까? 혹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대문으로 드나들기가 버거운 하인들이 이문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굳이 번거롭게 대문을 열지 않고, 이문을 통해 출입을 하였을까? 그렇다고 하면 위에 처정을 두어 굳이 머리를 숙이지 않도록 했을 터인데.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생긴 질문과 답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재미를 느껴보기도 한다.



철저히 통제가 된 안채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안채는 안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가려면 좌측으로 난 문과, 우측에 사랑채와 안채와 연결이 된 담장의 일각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채를 들어갈 수가 없다. 안채의 담장에는 또 다시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 안채를 출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철저하게 통제가 되어있는 형태이다.

김주태 가옥의 안채는 T 자 형태로 지어졌다. 이런 형태는 경기지방의 사대부 가옥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 담장에 낸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형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광채가 있다. 안채는 앞마루를 높인 건넌방과 두 칸 대청, 그리고 사랑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도 방과 부엌이 달려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 위에 안채를 지었는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그대로 지켜냈다.



담장과 굴뚝의 멋스러움

김주태 가옥의 또 하나의 멋은 담장이다.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담장의 문양, 수키와를 엎어놓고, 그 사이에 황토를 넣어 문양을 만들었다. 밑에는 돌을 다듬지도 않고, 그냥 황토와 섞어 쌓았다. 김주태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담장이다. 예전부터 이런 담장을 했는지, 아니면 최근 보수룰 하면서 이런 담장을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담장 하나가 주는 재미는 상당하다.

또 하나의 멋을 찾으라 한다면 굴뚝이다. 기와와 백회를 이용해 조성한 굴뚝은 낮고 작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거의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굴뚝은 중간에 네모난 작은 창을 내고, 위는 사각형의 낮은 피라미드처럼 만들었다. 이런 작은 것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꾸민 집이다. 이러한 담장과 굴뚝이 있어,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멋스럽게 만들었다. 김주태 가옥만이 갖고 있는 공간 구성은 그래서 뛰어나다.

이웃과 정을 나누는 ‘추억의 골목길 축제’. 제목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긴다. 11월 26일(토) 10:00~16:00에 걸쳐서 수원시 팔달구 지동 게이트볼장 입구 골목길에서 열린 축제장, 새마을지도자 지동협의회가 주최를 하고 지동주민자치회 등 7개 단체가 후원을 한 ‘추억의 골목길 축제’ 현장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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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축제'란 그야말로 골목길에서 열리는 축제이다. 2011년 ‘지동 마을 르네상스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8월부터 ‘수원화성과 지동 골목길 반가운 동행’이라는 주제로, 시범골목 약 1km의 구간에 골목의 특색을 살린 벽화 그리기와 조형물들을 10~11월에 걸쳐 설치하였다.




삭막한 골목길이 따스한 길이 되다

지동 골목길 축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을 성벽을 따라 길게 자리하고 있는 지동. 팔달구 지동은 그리 부유한 마을이 아니다. 옛 건물들이 늘어선 골목길은 우중충하던 곳이다. 그 좁고 우중충하던 골목길이 탈바꿈을 했다. 지동 주민들과 삼성 자원봉사단, 창작 작가, 학생, 직장인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인 많은 봉사자들이 특별한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였다.

말 그대로 골목길 축제였다. 한편에서 화성 앞에서 제기차기를 즐기는 젊은이들과, 아이와 함께 연날리기를 즐기고 있는 젊은 엄마. 그리고 축제장인 게이트볼 장에서는 왁자한 소리에 그칠 줄 모르는 웃음소리가 화성을 감돌아든다. 그저 마을잔치 같은 이 골목길 축제가 남다른 재미를 주는 이유였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 담겨있는 축제

길게 테이블을 놓은 앞에서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연 만들기에 정신들이 없다. 직접 연을 만들고 날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축제장에는 역시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 추억의 음식인 어묵이며 여러 가지 음식들이, 차가운 초겨울 날씨를 훈훈히 녹이고 있다. 살아가기에 힘든 사람들은 오랜만에 이웃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마을 어르신들은 윷놀이를 하면서 즐긴다. 그 얼굴에 오랜만에 세월의 주름을 펼 수 있는 행복함이 가득하다.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다. 사방치기를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골목길 어구에는 추억의 솜사탕 장수가 나와 있다. 우중충하던 골목길의 벽들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새 단장을 했다.




축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따듯한 국물을 드시다가 한 말씀 하신다.

“이런 축제가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닌가? 세상에 이렇게 집 대문을 나서서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어디 또 있을까 십구만. 먼 길 찾아가고 바가지 쓰고, 거기다가 정신 사납고. 이 골목길 축제는 얼마나 좋아? 멀리 안가서 좋지. 이웃들과 함께 즐기니 좋지. 거기다가 마을이 달라졌으니 보기도 좋지”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축제. 그저 모인 사람마다 낯익은 얼굴들이라 낯설지 않아 좋은 축제. 수원 팔달구 지동의 ‘추억의 골목길 축제’가 행복한 축제인 까닭이다. 그리고 엄청난 예산을 들여 하는 축제가 한 수 배워야 할 축제이다. 골목길에서 배어나오는 즐거움이 가득한 ‘추억의 골목길 축제’. 재미와 행복이 가득한 축제였다.

<골목길 들여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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