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는 언제 세웠는지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 미루어 보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15년인 1739년에 세운 비가 남아있어 그 당시 절을 고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쌍계사하면 사람들은 먼저 하동 쌍계사를 떠 올리지만, 대웅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논산 쌍계사는 충남 논산시 양촌면 중산리에 소재하고 있다.

 

논산 쌍계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마치 전설을 만들기 위해 창건된 절인 듯하다. 그만큼 쌍계사의 전설은 한두 가지 아니다. 대개 어느 고찰이나 전설 한 두가야 있기 마련이지만, 쌍계사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저 쌍계사 주변 곳곳이 전설이 전한다. 그만큼 이 절이 창건 이후 유명세를 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부대중이 얼마나 많았기에

 

쌍계사에 전하는 전설 중에는 그저 허황된 소리 같은 것들도 전한다. 하지만 전설이라는 것이 전혀 맹랑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쌍계사는 한 때 많은 사부대중이 기거를 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쌀을 씻은 뜨물이 큰 길까지 흘러내렸을까? 그 뿐만이 아니다. 대웅전에 있는 탱화를 파랑새가 붓을 입고 물고 그렸다고도 한다.

 

대웅전 앞에 낸 문짝의 꽃 창살은 가히 일품이다. 꽃 창살을 사용한 절들은 많다. 하지만 아마 도 어느 절도 이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그 꽃 창살의 문양만 바라보고 있어도 기분이 황홀해진다. 쌍계사의 기둥 하나가 칡넝쿨로 만들었는데, 이 기둥을 안고 돌면 병을 앓지 않고 저승으로 간다고도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하는 고찰 쌍계사. 이 절에서 사용하는 북이 얼마나 소리가 크고 고랑을 쩡쩡 울린 것일까? 북의 가죽을 한 겹을 볏겨 냈다고 한다. 또한 절 동편 고개 밑에는 샘물이 있다고 한다. 이 샘은 약효가 뛰어나 피부병 등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이 물을 마시기 위해 전라북도에서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

 

보물 제408호로 지정이 된 쌍계사 대웅전은 절의 중심 법당이다. 대웅전은 건축 형식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물로, 영조 14년인 1738년에 지은 건물로 보인다. 그 뒤 1972년 보수공사가 있었고, 1973년에 단청을 다시 하였다.

 

쌍계사 대웅전의 규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정면의 문은 정면 5칸을 모두 같은 간격으로 2짝씩 달아, 문살에 화려한 꽃을 새긴 꽃 창살로 마련하였다. 문의 꽃무늬는 연꽃, 모란을 비롯해 6가지 무늬로 새겨 색을 칠하였는데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를 엿보게 한다.

 

 

대웅전의 건물 안쪽은 우물 정()자 모양의 우물천장으로 꾸몄으며,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신 불단 위쪽으로, 불상마다 지붕 모형의 닫집을 만들어 엄숙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쌍계사의 대웅전은 예술 가치가 높은 문살 조각을 볼 수 있고, 조선 후기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길 위에 서 있는 것은 이런 소중한 문화재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 때문이다. 문화재 하나를 만날 때마다 어떤 때는 즐거움으로, 어떤 때는 비통함으로 접하게 되지만, 그 안에 내재된 사고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에 또 바람따라 길 위에 늘 서있기는 하지만. (꽃 창살과 닫집은 문화재청 자료입니다)

도대체 이 절에는 어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살았던 것일까? 공양간에서 밥을 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전하는 개태사 철확을 보면서, 어림짐작을 하려고 해보지만 이해가 가질 않는다. 논산시에 소재한 개태사는 고려 태조인 왕건이 세운 사찰로, 철확은 이곳 주방에서 사용했다고 전하는 철로 만든 대형 솥이다.

 

이 철확은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지름이 약 2m에 둘레길이 6.28m, 높이 97이다. 조선시대에 절이 없어지면서 벌판에 방치된 채 있던 것을, 가뭄 때 솥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비가 온다고 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다가, 일제강점기 때 서울에서 열린 박람회에 출품된 후 새로 건립한 지금의 개태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우주정에 얽힌 뜻은?

 

그러고 보니 개태사를 다녀온 지가 꽤 오래되었다. 가끔은 답사를 하고도 바로 글을 올리지 못하면, 이렇게 늦어질 수가 있다. 개태사에는 몇 기의 문화재가 전하고 있어, 그것들을 소개하다가 보니 철확의 소개가 늦어져 버렸다. 사실은 개태사를 찾아간 것도 철확 때문이었지만, 주객이 전도가 된 셈이다.

 

어쨌거나 문화재를 소개한다는 것은 순번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조금은 자위를 해본다. 개태사 철확은 경내 한편에 우주정이라는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보관을 하고 있다. 전각 안을 꽉 채우고 있는 철확을 보면서, 이 전각의 이름이 우주정이라는 것이 이해가 간다.

 

 

우주를 담을 만한 우물이라는 뜻인지? 그렇게 큰 철확을 보관하고 있다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철확의 크기로 따진다면, 어찌 그 안에 우주인들 담을 수 없을 손가? 아마도 이 큰 철확에 우주를 담을 수 있는 수많은 사부대중들의 마음이 함께 했는가도 모르겠다.

 

초심을 지키는 것은, 문화재 답사의 즐거움

 

문화재를 만난다는 것은 늘 즐겁다. 그것은 나도 모르던 것을 하나씩 배워나간다는 생각 때문이다. 다 아는 것을 돌아보는 것과, 모르는 것을 하나씩 깨우치면서 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그래서인가 참 답사를 다니면서 못된 버릇 하나가 생겼다. 몇 번씩 찾아간 문화재도 안내판부터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무 것도 모르는 양,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함이다.

 

 

사실 초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답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누가 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도 아니다. 하기에 초심을 잃어버린다면 시간 뺐기고, 물질 남아나지 않는 답사를 벌써 그만 두었을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을 만나고, 늘 그것을 마음속에 담아두면서 길을 걸어야 제대로 답사를 할 수아 있다.

 

개태사 철확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개태사는 아마도 5회 이상은 찾아갔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대전에서 방송 일을 할 때부터 들리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확을 보는 순간 참으로 반가웠던 것은, 그 오랜 시간동안 여기저기 끌고 다녔음에도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깨어지고 많이 떨어져나가 온전한 모습을 아니라고 하지만, 그나마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솥 안에 동전 한 닢을 던져보다. 둔탁한 금속소리가 난다. 벌써 누군가 그곳에 동전과 지전을 던져 넣었다. 그 사람들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천년만영 잘 견디고 있기를 빌어보았다. 다음에 또 이곳을 찾아왔을 때도, 지금 그모습 그대로 볼 수 있기를.

부도탑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 같지가 않다. 부도탑 보다는 오히려 석등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 산 5에 소재하고 있는, 충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논산 탑정리 석탑을 보고 느낀 소감이다. 탑정리 석탑은 탑정저수지 북쪽 제방 끝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탑정리 석탑을 옮긴 이유는 일제 시대에 저수지 공사를 하면서, 탑이 있던 자리에 물이 차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탑은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고 있으며, 탑의 전체 높이는 283cm에 기단부의 높이가 184cm이다. 탑신의 높이는 54cm에 지나지 않는다. 이 탑을 부도탑으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석등으로 보아야 하느냐를 놓고 한참이나 망설였다.

 

 

태조 왕건이 지었다는 어린사(魚鱗寺)’

 

사료에 의하면 연산현 서쪽 17리에 탑정리가 있고, 탑정리에 어린사(魚鱗寺)가 있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고려 태조 왕건이 남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어린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탑은 왕건이 개국사찰로 세운 개태사에 속해 있던 많은 암자 중, 적사암의 대명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하지만 문헌상 기록은 없다.

 

이 탑을 보면서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한다. ‘어린사라는 절 이름을 들으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고려 초에 왕건이 이곳에 성을 쌓았다는 것은, 이곳의 지형이 평지이거나 높지 않은 구릉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이곳에 절을 지으면서 어떻게 이곳에 호수가 들어찰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천년 후에 이곳에 저수지가 생길 것을 미리 알았다.

 

탑정호는 충남 논산시 부적면과 가야곡면에 걸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1941년에 착공을 하여 1944년에 완공을 한 인공호수로, 그 규모가 상당하다. 면적은 1522천 평에 달하며, 제방길이는 573m이고, 둘레가 20km이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이다. 이 저수지가 들어선 곳에 어린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魚鱗)’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물고기와 물속에 사는 온갖 것들을 말한다. 결국 어린사는 물고기가 많은 절이라는 표현인데, 당시에는 이곳에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성을 쌓을 수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볼 때 고쳐 초기에 왕건은 이곳이 천년 후에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지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많이 있다. 용인시 이동면에 있는 이동저수지 인근에도 이와 같은 지명이 있다. ‘어비리라는 곳이다. 논밭이 즐비한 이곳이 고기가 살이 찐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용인 어비리는 이동저수지가 들어서 그야말로 물고기가 살이 찐다는 지명이 맞아 떨어졌다. 어린사 역시 그렇게 절 이름에, 이미 이곳이 저수지가 들어설 것을 예측한 것이다.

 

석등과 같은 형태의 탑정리 석탑

 

탑정리 석탑은 지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그 위로 받침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탑의 구성을 보면 하대석, 간석, 중대석, 탑신부와 옥개석으로 되어있다. 이런 형태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흡사 석등과 탑을 합쳐 놓은 듯한 형태로 보인다.

 

더구나 이 탑의 탑신 아래의 받침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등 양식이다. 8개의 연꽃잎을 양각하여 장식하였다. 혹 이 탑이 별개의 탑신을 올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즉 화사석이 들어설 자리에 있는 지금의 탑신이, 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 화사석 대신 놓아 둔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일제시대에 저수지를 조성하고, 그들에 의해서 옮겨졌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문헌상으로 확실하다면 무슨 걱정을 할까? 문헌도 없고, 받침이나 간주석의 형태 등으로 보면 부도이기 보다는 석등이라야 맞는다는 생각이다. 탑정리 석탑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석탑을 보라갔다가 어린사라는 절이 더 궁금해지는 날이다.

대전에서 논산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 부적면 덕평리 방향으로 가는 691번 도로가 연결이 된다. 이곳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마을 안을 지나면 산 밑에 넓은 사지가 있다. 그 입구에 덕평리 마애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소재지는 논산시 부적면 덕평리 산 4번지로 되어있으나, 서 있는 곳은 평지와 다름이 없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으로 추정되는 이 여래상은 운제사(雲際寺)’의 옛 절터에 있던 석불입상이다. 이 불상을 사람들은 관촉사 은진미륵의 작은어머니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석조여래입상의 상이 인자한 모습으로, 은진미륵불과 마주한 형태로 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복스럽고 자애로운 얼굴

 

오후에 찾아간 덕평리 마애여래입상. 몇 년 전인가 이곳에 들려 보았을 때는, 그저 바쁜 걸음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이번 답사 때는 주변부터 찬찬히 훑으면서 자세히 석조여래불을 들여다본다. 많이 훼손이 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풍만한 상이다. 고려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불신의 높이가 1.95m나 된다.

 

불상의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이 되었다. 얼굴은 눈과 코, , 턱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얼굴의 상이 두툼하고 둥그런 형태에서 후덕한 인상을 풍긴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볼 부분이 떨어져 나가 귀의 모습을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머리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솟아있고,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것이 복스럽고 인자한 모습이다.

 

 

 

떨어져 나간 팔이 보기 흉해

 

가슴부분을 들어낸 통견으로 조성이 된 법의는 두텁고 무겁게 느껴진다. 옷 주름은 양 어깨에 걸쳐 가슴 아래서부터 U자 형으로 흘러내린다. 다리 윗부분에서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양 발에 큰 타원을 만들고, 옆으로는 주름치마로 표현하였다. 이런 형태는 경상도 지방에서 나타나는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의 법의에서도 많이 보이는 형태이다.

 

보물로 지정이 된 남원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그 형태가 것으로 보이는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현재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55호이다. 현재는 법의 끝자락 까지만 나타나 있어, 그 밑에 어떤 모양의 대좌가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석조여래입상의 왼손은 팔꿈치 이하 부분이 절단되어 있다. 오른손도 온전하지는 않다. 왼손의 위치와 함께 가슴 안쪽으로 들어 올려 여원인을 짓고 있는 오른손의 모양으로 보아,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으로 생각된다. 우수한 형태의 고려석불로 추정되는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배례석과 팔각기둥이 옛 모습을 말해주고

 

석불의 앞에는 방형판석 2매와 장방형의 연화문 배례석 1매가 놓여 있다. 그 옆 철책 안으로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팔각 돌기둥 1개가 있는데 높이는 1.08m이고, 상부에는 4각의 촉이 있다. 이 돌기둥은 아래쪽은 팔각이고 위쪽은 사각형인 특이한 형태이다. 이런 석조여래입상과 판석, 돌기둥 등으로 보아, 이곳에 제법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입상의 작은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일까? 주변에 수소문을 해보아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아마도 같은 고려시대에 조성이 되었고, 가까운 거리에 소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여래불은 현재의 부처님이고 미륵불은 후세의 부처님이라는 점에서, 관촉사 석조미륵입상의 작은 어머니라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비록 많이 훼손이 된 형태에서 그 온전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상으로 조성이 된 덕평리 석조여래입상.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점점 힘들어지고만 있는 세상살이에서, 그 미소만큼이나 편한 마음 한번 가져보았으면 하는 바람이기 때문이다.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에 소재한,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6호인 팔괘정.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이 팔괘정은 송시열 선생이 율곡선생을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진다.

 

스승과 가까이 하고 싶어 지은 팔괘정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이 강경 황산리 금강가에 임이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서 있고 싶어서 정자를 지었다. 임이정과 불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팔괘정은 그 모습도 임이정과 닮았다. 팔괘정은 금강을 바라다보는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은 동일한 간격으로 그중 두 칸은 넓은 대청을 만들고, 한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초익공식과 동일한 구성의 공포를 짜 올린 팔괘정. 창방 위에는 기둥사이마다 다섯 개의 소로 받침을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팔괘정은, 한식 가옥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옛 모습을 그려보다.

 

송시열은 선조 40년인 1607년에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계 김장생이 강경 황산에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송시열이 팔괘정을 지은 때를 인조시대로 보는 이유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임이정과 팔괘정은 크기나 모습이 흡사하다.

 

당시 황산은 김장생과 송시열이라는 두 거목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두 정자 사이에는 조금 아래서 내려서 죽림서원이 있었으니, 날마다 금강가에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을 것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글을 읽으며 세상을 논하고, 시 한수를 지어 어딘가에 적지 않았을까? 팔괘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마 당시 이곳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그 자리에 끼는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았을까? 무심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팔괘정 앞을 날아간다.

 

바위벽에 남긴 흔적

 

팔괘정 옆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있다. 예전 이 팔괘정을 세운 송시열은 이 바위를 바라다보며 나라를 위한 충정의 굳은 의지를 키웠을 것이다. 바위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청초암(靑草岩)'과 ‘몽괘벽(夢掛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젊음의 기상을 떨치고, 꿈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마음에 새기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금강을 한가롭게 유영하는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아마 멀리 북녘까지 날아갈 차비라도 하려는가 보다. 저녁 햇볕이 저만큼 강물에 길게 붉은 띠를 두른다. 이런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이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했을 선생의 마음이 그려진다. 봄날 이는 황사바람 한 점이 스치고 지나간다. 정자 옆 바위는 미동도 없다. 그것이 팔괘정을 지은 선생의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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