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는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600년대 창건되어, 신라 혜공왕 2년인 776년에 진표율사가 다시 고쳐 세우면서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산사는 고려 935년에는 후백제의 신검이 아버지인 견훤을 유폐시켰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금산사 경내에는 보물 제22호로 지정이 된 ‘노주’가 있다.

이 금산사에 있는 석조물은 그 이름을 노주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으로 사용한 것인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보기 드문 유물이다. 꼭대기에 놓인 꽃봉오리모양의 조각만 없으면 불상을 얹는 사각형의 대좌처럼도 보인다. 이 석조물은 석등과 대좌, 불탑의 부분을 모아 놓은 듯하다.


석등롱일까? 노주일까? 아리송한 형태

이 노주라 명칭을 붙인 석조물은 대적광전 오른쪽 앞에 있는 석련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노주가 본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 노주는 미륵전 정중에 있었는데, 1922년에 대장전의 이전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 노주는 『금산사지(金山寺誌)』에는 ‘석등롱(石燈籠)’이라는 설명되어 있다.

이 서책을 보면 노주와 석등롱은 별개의 것이라고 한다. 노주는 불전의 정면 양우에 서 있는 2개의 번간(속칭 갯대)으로써 탑상찰간의 전명이다. 탑상찰간은 ‘구륜지간’이라 하여 줄여서 윤간이라고도 하고 ‘노반지주(露盤之柱)’라 하여 노주라고도 약칭하였다. 구륜이란 불탑 꼭대기의 수연 바로 밑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아홉 층의 원륜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석등롱은 노주의 상대물로써 미륵전의 불상에 공양하던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속칭 ‘광명대’라고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현재 노주라고 하는 석조물은 제 형태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상과 복련의 조각이 일품

이 석조물은 땅 위에 지대석인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상, 중, 하로 나누어 받침돌을 순서대로 얹어놓았다. 지대석은 4각형으로써 하나의 석재에 2단으로 조각되었는데, 아랫단의 1변의 길이는 121㎝이다. 각 단의 높이는 아랫단이 13㎝, 위단이 9㎝ 정도이다. 하대석은 위의 모서리 부분을 약간 둥글게 다듬어 16변의 복연을 조각하였고, 각 면의 수직 부분에는 2개의 안상을 선각해 놓았다.



이런 조각의 형태로 볼 때 이 석조물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고 하나, 그 여러 가지 조각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대석에는 특별한 문양 없이 다만 우주만을 양각해 놓았다. 1변의 길이는 50㎝이며, 높이는 55㎝이다. 상대석에는 16변의 커다란 앙연이 조각되어 있다. 1변의 길이는 94㎝이고, 높이는 37㎝이다.

제일 위에 얹혀 있는 석조물도 하나의 석재로 되어 있으며, 그 형태는 탑의 상륜부에 올리는 보륜과 흡사하다. 이 석조물은 한쪽 부분이 파손되어 있다. 상륜부에 놓인 보주만 없으면 방형의 대좌와 흡사한 형태의 금산사 노주. 과연 그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처음 그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도 있는 그 형태가, 오늘 발길을 붙들고 놓아주질 않는다.

전남 구례 화엄사, 하왐사상의 중심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을 널리 알리던 절이다. 신라 후기에는 도선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회엄사가 더욱 그 사세를 떨친 것은 고려 문종 때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화엄사에 매년 곡물을 바치도록 허락해 주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사의 사세를 알 수가 있다. 이는 고려가 국교를 불교로 했고, 화엄사는 화엄사상의 중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화엄사 일주문 밖에는 큰 창고를 짓고, 경상도와 잔라도에서 실어오는 곡물을 저장했다고 한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7년 만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로도 여러 번의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많은 전각들이 중창되었다.



각황전 한편에 자리한 사자탑

화엄사 각황전 앞에 난 계단을 오르면 우측에 탑이 서 있다. 보물 제3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화엄사 사자탑>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조성한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형태를 사찰에서는 '노주'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는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기단은 이층으로 꾸며졌으며,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가 머리에 받침돌을 이고 그 위에 비를 받치고 있다. 그 모습은 각황전 뒤 효대에 있는 국보 제35호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을 모방했으니, 조각수법 등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조성시기도 사사자삼층석탑보다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비의 형태로 만들어진 탑이 독특해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은 2단이다. 아래층 기단은 문양이 없는 단순한 석재를 이용해 꾸며 놓았다. 소박하면서도 꾸밈이 없는 모습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갈 당시의 석조물인 듯 하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비스듬히 밖을 바라다보고 있으며, 그 표정이 각각 다르다.

네 마리의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아마 불교적인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조각품으로 보인다. 이런 조각을 보아 이 사자탑ㅁ이 사리탑이었을 것이란 조심스런 추정을 해본다. 네 마리의 사자가 몸돌의 받침돌을 이고 있는데, 탑신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몸돌에는 네모나게 판 후 그 안에 신장상을 조각하였다.

무엇에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자탑. 아마 당시에는 소중한 절의 기물로 여겼을 것이란 생각이다. 수많은 불교 유물이 전하지만, 아직은 지식이 모두에 미치지 못함이 안타깝다. 사자탑을 돌아보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지만, 짧기만한 지식을 어찌하랴.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더 지체를 못하고, 아쉬움으로 뒤만 연신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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