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일반인들하고는 달리 저희들은 직성이 강하다고 하죠. 신을 모시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마 두 사람이 다툼이 일어난다고 하면 더 심하게 다툴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요

 

부부가 모두 신을 모시고 있다. 그것도 한 집에서 한 곳의 전안(신령을 모셔 놓은 신당)을 섬긴다. 이럴 경우 대개는 심하게 다투기가 일쑤라고 한다. 심지어는 모녀사이에도 전안을 차지하려는 신들 간의 싸움이 치열하다. 그런 시기와 다툼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20년 세월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세상의 많은 아픔을 함께 하고 살았기 때문인가 보다.

 

막말로 시기를 하고 질투를 해서 서로 헤어졌다고 하면, 저 사람보다 더 잘나고 착한 사람을 만나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사실 신들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사람들의 구실에 지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아야죠.”

 

21일 오후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 97-139 ‘일월신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곳. 이 집은 부부가 모두 신을 모시는 신제자이다. 막다른 골목길의 이층집 안에는 문 앞에서부터 각종 기물들이 눈이 띤다. 안으로 들어가니 넓지 않은 실내에 빽빽하게 신령의 물품들이 차 있다.

 

 

부부가 신내림을 한지 벌써 20

 

부부는 비슷한 시기에 신내림을 받았다고 한다. 남편인 이용수는 올해 53세이다. 신내림을 받은지 20년이 지났다. 부인인 김상희는 46세로 21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이 부부가 되고나서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직은 이렇다 할 문제는 만들지 않고 살아왔다.

 

저 사람이 많이 이해를 해주고 있어요. 아무래도 그런 이해가 없으면 함께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테고요.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배나 더 어렵습니다. 그저 한 발 물러나 늘 양보를 하는 길만이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죠.”

 

그저 그런 남편이 고마워서 무슨 일을 하던지 두 사람이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서 살다가 수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3년 정도 되었다. 지금 자리에 오게 된 것도 부인인 김상희의 꿈에 이 집을 현몽을 했다는 것이다.

 

원래 저희 같은 사람들은 막다른 집을 들어가지 않잖아요. 길이 막힌다고 헤서요. 그런데 집 사람이 이사 오기 전에 미리 이 집을 보았다고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집으로 들어왔어요. 비좁아서 많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참고 살아야죠.”

 

 

지독한 신병에 10세부터 귀신을 보았다는 김상희

 

남들은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믿지 않겠지만 저는 10살부터 귀신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면 그것이 다 맞고요. 이미 그때부터 신병이 시작된 것이죠. 17살부터는 벽에다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바라춤을 춘다고 하기도 하고, 휴지를 들고 살풀이를 춘다고도 했어요. 그러다가 24살에 어머니 재수굿을 해주다가 신굿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었죠.“

 

10세에 시작한 신병은 이미 14년이란 긴 시간을 괴롭혔다. 해마다 다리를 다치는가 하면 인대가 늘어나 걷기조차 힘들었다, 육신적인 신병과 함께 금전적인 신병이 온 것이다. 그때는 이미 깊어 질대로 깊어진 신병으로 인해 동자들이 눈에 보여 사탕을 사다놓기도 하고, 할머니들이 보여 자고 가라고도 하는 등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수도 없이 벌렸다.

 

 

잠옷 바람으로 나가서 한 걸립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내림굿을 할 날짜를 잡았는데 수중에 갖고 있는 돈이 없잖아요. 당시는 이태원에 살았는데 제가 화장을 하고 잠옷을 입고 길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점을 보아주고 걸립을 한 것이죠. 그렇게 돈을 모아 수락산에서 내림굿을 받았어요.”

 

내림굿을 하고 난 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손님들이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야 신령을 모셨으니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게 다치고 아프던 다리가 싹 나은 것이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정말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간판도 달지 않고 13년간이나 사람들을 보면서 상당한 재물도 모았다고 한다.

 

사람들을 매일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참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한 몇 년 쉬었어요. 너무 피곤하기도 하지만, 산다는 것이 버겁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수원으로 내려와 경기도당굿 이수자이신 승경숙 선생을 만났죠. 선생님의 굿을 보고 첫눈에 나도 이 길을 가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부부가 전수생으로 등록을 했다. 이 두 사람은 경기도당굿보존회 남부지부 공식 1기생으로 전수자 등록이 되었다. 앞으로 열심히 학습을 해 도당굿을 보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는 이용수, 김상희 부부. 아무쪼록 이 집 대문 앞에 내 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당굿 전수자라는 명호답게 지역의 문화를 지켜갈 수 있는 동량이기를 기대한다.

 

곱게 신복(神服)을 차려입은 여인이 주변의 눈길도 의식하지 않은 채 대성통곡을 한다. 왜 내림굿을 할 때는 모두가 저렇게 울어야 할까? 하긴 울만도 하다. 사회에서 남들이 흔히 말하는 무당(巫堂)’이 되는 날이다. 예전처럼 집제자로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저 사람들과는 달리 접신이 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10일 오전부터 시작 된 내림굿. 이 날 내림을 받은 사람은 현해탄을 건너 온 재일교포 2세이다.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고 있는 송미영(47)이 주인공이었다. 이날의 굿은 엄밀히 따지자면 내림이 아닌 가리굿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리굿이란 이미 자연통신 등으로 신당을 갖고 있는 사람이 다시 제대로 내림을 받는 행위를 말한다.

 

 

왜 접신이 되면 다들 울지

 

부정을 친다. 굿판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는 부정굿이란 굿판의 모인 모든 사람들과 굿판을 정화시키는 굿거리이다. 모든 부정을 다 가셔 내림굿이 온전히 신령들이 흠향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제차이다. 그러고 나서 굿이 시작되었다. 시작한지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송미영이 신복을 입고 굿판에 들어섰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송미영은 한국말을 다 알아듣기는 하지만 표현을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했다. 거기다가 굿판에서 그 많은 신령들을 일일이 호명하기도 쉽지가 않다.

일본의 신당은 우리하고는 많이 달라요. 우리는 큰 절을 하는데 일본의 무당들은 허리만 굽혀 인사를 해요. 우린 굿판에서 타살굿같은 데서만 피를 보는 굿거리가 있는데, 일본은 꼭 굿을 하면 닭 같은 것들을 잡아 피를 뿌려요.”

이날 내림굿의 주제자인 고성주(, 60. 수원시 지동)의 말이다.

 

 

송미영은 굿판에 들어서자마자 도약을 하기 시작했다. 도약이란 접신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위이다. 그러고 나서 목을 놓아 엉엉 울기 시작한다. 왜 내림굿을 받는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목 놓아 우는 것일까?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삼국시대까지처럼 단의 주인이요. 집제자가 아니다.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당이라고 해서 제대로 대우를 해주지 않는 부류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굿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이날 굿판에 함께 들어 선 사람들이 연신 곁에서 말을 한다.

참지 말고 다 풀어버리세요

울고 싶으면 마음대로 우세요. 그러고 나서 다시는 울지 마세요.”

오늘까지는 마음껏 울고 내일부터는 울지 마라. 이제는 신령님들이 너를 보호하실 테니 앞으로는 울 일도 없다

목을 놓아 울던 송미영의 표정이 달라진다.

 

 

신복을 갈아입으면서 춤을 추던 송미영은 언제 그렇게 목을 놓아 울었냐는 듯, 피리와 장단에 맞추어 날아갈 듯 춤을 춘다. 거리를 마친 송미영에게 절을 받고 난 고성주가 쪽을 찐 머리에 비녀를 질러준다. 이로써 신아버지와 신딸의 관계가 형성이 된 것이다. 고성주는 직접 내림굿을 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요즈음은 내림을 받은 지 3년이 안된 무당들도 내림을 한다.

 

저는 정말 내림굿을 하고 싶지 않아요. 제 평생 직접 내림굿을 해준 신딸들은 몇 명 없어요. 얼마나 아픈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 아픔을 전해줄 수가 없어서요.”

고성주의 말처럼 이날 굿판에 함께 참여한 이정숙(, 58. 부천거주) 등 두 세 명밖에 신딸이 없다. 절을 받은 고성주에 이어 이정숙 등이 송미영과 맞절을 한다. 신의 형제로 맺어진 것이다.

 

 

일본 땅에 또 한 명의 무당이 태어나다.

 

일본에도 무당들이 상당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신도들을 갖고 있는 무당도 있다는 것. 하지만 그들은 우리나라의 무당들과는 달리 신당인 전안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날 굿판에서도 연신 한국과 일본의 신들이 잘 합수 받아 불려라고 덕담을 해준다. 산거리를 할 때는 우리나라의 모든 산신령들을 호명하고 난 뒤, 일본 후지산의 산신령까지 거명을 한다.

 

신의 존재는 무소불위(無所不爲)라고 했던가?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어디나 다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일본 땅이라고 신이 없을 것인가? 굿판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이다.

올 해는 독일여자와 우크라이나여자도 내림을 해 달라고 해요. 우리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말귀는 다 알아들어요. 이러다가 앞으로는 전 세계에 신딸을 두게 생겼어요. 느지막이 세계일주를 하게 생겼죠.”

 

10시간에 걸친 내림굿이 지노귀굿을 끝으로 모두 끝났다. 11일 오후 비행기로 요코하마로 돌아간다는 송미영. 이것저것 자상하게 챙겨주는 고성주를 보면서, 신으로 맺어진 부녀사이지만 오히려 친 부녀보다 더욱 애틋한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많은 신령들을 모시고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야 할 딸이기 때문인 듯하다.

 

경기도당굿은 매력이 있어요. 많은 굿중에서 경기도당굿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남다른 품위가 있어요. 제가 경기도당굿을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죠.”

 

8일 오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550-83에 소재한 애기씨당이라는 간판을 건 전안에서 만난 최남수(, 35). 작은 체구에 귀여움이 가득한 모습이다. 대개 이런 무속의 일을 하는 사람들과는 생김새가 조금은 다르다. 전안은 신령들을 안쪽에 모시고, 입구 쪽에서는 손님들을 접대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넓지는 않지만 간결하면서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어, 어찌 보면 경기도당굿의 굿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23세부터 찾아 온 신병

 

저는 남들처럼 그렇게 심하게 신병을 앓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23세 때부터 이상하게 꿈을 자주 꾸게 되었어요. 눈만 감으면 흰 고깔을 쓴 사람이 보이는데 고깔밑으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죠.”

 

그래도 처음에는 그렇게 심하게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은 점점 깊어가고, 술만 먹으면 사람들에게 아는 소리를 해 댔다는 것.

 

밤에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술을 먹기 시작했어요. 잠이라도 편하게 자려고요. 그런데 술만 먹으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막 하는 거예요. ‘언니 남편 바람났다거나 팔 부러지겠다, 조심해라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점집을 찾아갔더니 신병이 왔으니 내림굿을 받으라고 했지만, 콧방귀만 뀌고 돌아왔다는 것. 25세가 되던 해는 일본으로 건너갔단다. 제과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1년 반 정도 일본에 가서 살다가 왔는데, 그 이후부터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고.

 

일본에서 돌아왔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붙고 하혈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면 몸에 이상이 없다고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다고 의사가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에게 막 퍼붓기도 했어요. 몸이 아픈데 무조건 스트레스라고 하니 사람이 화가 난 것이죠.”

 

음식을 먹기만 해도 토해내기가 일쑤여서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잠이라도 좀 청하려고 하면 도대체 이상한 것들이 모여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27세가 되던 해부터는 눈만 감으면 방울소리가 들렸다는 것. 내림굿을 받기 전에 여기저기 찾아다녀 보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29세에 내림굿을 받아

 

굿을 몇 차례나 했는지 모른단다. 29세가 되던 해 할 수없이 내림굿을 받았다. 당시는 오산에서 살고 있을 때인데, 안산에 있는 무속인을 찾아가 내림굿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에는 결혼을 해서 일가를 이루었다.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내림굿을 받지 않았다면 온전한 삶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지난해부터 이곳 수원 인계동에 자리를 잡고 경기도당굿의 전수를 받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전수생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선생님 못지않은 도당굿의 무녀가 되려고요.”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인 경기도당굿은 남자인 화랭이(악사로 지정)와 무녀 두 사람의 보유자가 있다. 남자 악사는 장단과 화랭이 굿인 의뎅이, 그리고 터벌림과 장문잡기 등의 제차를 맡아서 진행을 한다. 여무는 부정, 제석, 군웅 등을 맡아한다. 경기도당굿에서는 군웅굿을 할 때 쌍군웅이라고 해서 화랭이와 무녀가 함께 군웅상을 돌면서 굿을 진행한다.

 

배우면 배우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 가까운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전안도 이곳에 차렸어요. 열심히 배워야죠.”

 

길 건너편에는 제석천궁이란 간판을 단 도당굿의 스승인 경기도당굿 이수자 승경숙씨의 전안이 자리를 하고 있다. 아직은 도당굿 판에서 한 거리를 맡아할 수가 없지만, 언젠가는 굿판에서 멋진 굿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고성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큰 만신이다. 스스로를 ‘만신’이라고 자처하는 고성주는, 4대 째 경기도 굿제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고성주를 비롯한 3대가 독자적인 가계로 이어진다. 중간에 고성주에게 내림굿을 주관한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를 빼고도, 조모 - 고모 - 고성주로 이어지는 순수한 무가(巫家)의 집안이다.

 

물론 그 윗대의 만신들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굿거리의 절차는 항상 대물림을 하면서 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계의 전승은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가장 큰 자산으로 본다.

 

 

어려서부터 익힌 춤과 노래솜씨 뛰어나

 

“저는 만 18세가 되던 해 내림을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수원에서 살았는데, 몸이 아파 이천으로 다시 내려가 살았어요. 그러다가 다시 수원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일 년이면 한 두어 달만 괜찮고 나머지는 골골했죠. 그러다가 화성재인청 이동안 선생님께 가서 재인청 춤과 소리 등을 배우면서 몸이 좀 좋아졌어요. 당시는 저를 보고 초립동이라고 불렀죠.”

 

어려서부터 기구한 삶을 살았다. 몸이 마르고 며칠씩 물 한 모금 먹지 않다가도, 또 먹을 때는 엄청 먹어 치웠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해 주변에 눈총을 산 일도 허다했단다.

 

“내림을 받고나서 이천 대월면 송라리 뒷산을 대명산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탱화하고 놋쇠그릇, 관음보살, 대감항아리, 책 두 권을 가져왔어요. 예전에는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제 뿌리가 그곳인가 봐요.”

 

 

고성주는 요즈음의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내림을 받고나서 문서를 익히고 재주를 익히는데 한 10년은 실히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은 적어도 그 정도의 학습기간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처럼 몇 달 뚱땅거리다가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세월은 배워야 안택굿의 장단 가락, 징, 춤사위, 거성, 노래, 사설 등을 익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점을 신을 모시기 전부터 보아 주었어요. 괜히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고요.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 어머니 집에 와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굿을 하러 가면 사람들을 보고 얼마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한 3년 신어머니 집에서 음식 하는 법 등을 배웠는데, 당시는 머슴살이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점을 보아주고 굿을 떼고는 했죠. 그러다가 한 3년 뒤에 최씨 어머니가 전대자루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나가서 시주를 해오라고 하데요. 그래서 인계동서부터 매교동 일대까지 3개월을 다녀서, 돈 67원하고 쌀 두말 조금 넘게 걷었어요. 그래서 내림을 했죠. 굿을 처음 한 것은 내리면서 바로 굿을 했어요. 수원 큰 만신들이 굿판에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빨리 배웠죠.”

 

첫 굿판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처음 굿판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난리를 쳤단다. 당시에는 밤을 새워 굿을 했는데, 사람들이 춤 잘 추고 소리 잘하는 애기만신이 나왔다고 자리를 뜨질 않았다는 것. 경기도 안택굿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질문에 깊은 한 숨을 쉬기도 했다.

 

“경기안택굿은 굿 속에서 마음에 닿는 느낌이 있어요. 사람들을 울리고 웃고,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굿이에요. 예술적이면서도 신성이 함유된 굿이고요. 특히 굿판에서 세상사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굿이죠. 한 마디로 살아있는 굿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부 사람들은 경기도 안택굿이 서울굿과 비슷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예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양 성내에서 굿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서울에 안택굿이 있을 수가 있었겠어요. 수원을 비롯해 안산, 시흥, 화성, 용인 등지에서 큰 만신들이 많이 나왔던 것을 보아도 경기도 안택굿이 본류라고 보아야 하죠.”

 

선대의 신어머니에게서 학습을 할 때는 주로 어떤 것을 배우게 되었는냐고 묻자, 옷 개는 법, 굿의 순서대로 무복을 착용하는 법, 상 차리는 법, 상 차리는데 필요한 음식, 떡, 과일, 전, 사탕, 밤, 대추, 나물, 적 등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까지를 다 배운단다. 그리고 나면 바라, 징, 장고 치는 법 등을 익히고. 그 후에는 덕담과 사설, 소리 등을 배워야 한다는 것.

 

 

경기도 굿은 독창적인 지역의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은 사설이 많아서 어떻게 소리를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등도 배웁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해야 하는 예의범절 등까지 배우게 되죠. 그래야 전통 안택굿의 맥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학습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제자들을 배출한 것은 자신이 학습을 하고 난 뒤 10년 정도가 지나서부터 가르쳤단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학습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선대에게서 배운 학습을 복습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는 것. 요즈음 많은 무속인들이 남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애가 타기도 한단다.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배워야하는데, 요즈음은 그저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굿을 배운 제자들이 한 120명 장도는 될 거예요. 현재는 18명 정도가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배우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아파요. 어렵기는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배우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만큼 경기전통 안택굿은 배우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은 가르쳐 주어야죠.”

 

굿판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굿을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집에 굿을 하러 가면 큰 만신들이 안당제석을 하라고 한 후, 굿을 마치고나면 느낌이 없다고 굿을 다시 하라고 한다는 것. 그럴 때면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속으로는 울면서 굿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 때 선생님들은 신복 접는 법을 한번 알려주고, 그걸 따라하라고 해요. 못하면 바로 지청구를 받게 되죠. 정말 힘들게 굿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굿이기에 지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워낙 험하게 다루셨으니 까요. 자존심도 버리고 살아 온 세월이죠.”

 

 

 

8세에 내림굿을 받은 고성주의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는, 고성주의 친고모인 제주 고씨의 신딸이다. 또한 제주 고씨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남양 홍씨를 신어머니로 모셨다. 남양 홍씨는 고성주의 증조모이자, 제주 고씨의 친정어머니이다. 하기에 고성주의 신의 계보는 남양 홍씨 - 제주 고씨 - 경주 최씨 - 고성주로 이어진다. 이들 굿의 세계는 근 100년 이상을 경기도굿을 본바탕으로 이어오고 있는 무가(巫家)의 내력이다.

“이 불이 천상을 움직이는 것이죠"

 

“‘세발낙지’라는 말을 들어보았지만, ‘세발심지’라는 처음 듣는데요.”

 

우스갯소리로 사무실 사람들에게 세발심지가 무엇인지 아는가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하기야 일반인들이 세발심지를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굿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4월 11일 의정부에 자리한 한 굿당. 내림굿을 준비하고 있는 자리에서 한 남자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이 날 내림굿은 경기도 동두천시 생연동에 거주하는 정아무개(남, 42세)가 신내림을 하는 자리였다. 정아무개는 이미 신병이 깊어져, 사람들에게 아는 소리를 할 정도로 깊은 무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 내림굿판에 음악을 맡아 자리에 동석한 박노갑은, 흔히 ‘어정’이라고 하는 굿판에서 피리와 호적을 담당하는 악사이다.

 

세발심지는 인간의 정성을 하늘로 올리는 것

 

한지를 가늘게 꼬아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박노갑(남, 49세. 수원시 연무동 거주) 흔히 굿판에서는 이 세발심지와 불사전, 그리고 제석고깔을 한지로 만든다. 그런 것들을 한지로 만들고 있는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하다.

 

 

 

“수양아버지(수원시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께서 굿판에 다니는 악사가 되려면 이런 것들부터 굿판의 내력을 다 알아야한다고 늘 말씀을 하셨죠. 가위 하나로 다 만들 수 있는 굿판의 이런 기물들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도 했지만, 이런 하나하나가 모두 신령님들을 위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면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이죠.”

 

굿판에서 세발심지는 모두 16개를 사용한다. 안당제석상에 1개, 본향상에 3개,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를 놓는다. 본향상에 3개를 놓는 이유는 부모님의 본향과 자신의 본향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궁맞이상에 12개는 굿에서 흔히 나타나는 12신령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지로 만드는 사소한 것 같은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상당하죠. 아마 그냥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만드는 방법만 알았다고 하면, 마음속에 정성을 없을 것입니다. 수양아버지께서 그런 의미 하나하나를 알려주셨기 때문에, 이 작은 세발심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죠.”

 

 

 

박노갑의 이야기로는 이렇게 세발심지에 불을 붙여, 그 불이 하늘로 열기를 전해 신령들이 감응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작은 한지로 만든 이 세발심지가 상당히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3이라는 숫자는 우리민족의 숫자

 

왜 굿판에서 세발심지를 사용할까? 세발심지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를 만들어 온 경기안택굿보존회 고성주회장의 말이다.

 

“세발심지라는 것은 그 의미가 상당히 깊습니다. 두발도 서고, 네발로 만들어도 섭니다. 그러나 세발심지는 우리의 전통적인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있습니다. 삼족오, 삼정승, 삼불제석 등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화합입니다. 예전에 화로를 보아도 다리가 셋이 달려있습니다. 삼족형 화로는 그 다리가 하나만 없어져도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다리가 하나의 목적, 즉 서 있어야 하는 목적을 갖는 것이죠. 세발심지는 바로 그런 3이라는 숫자의 결정판입니다.”

 

결국 굿판에서 사용하는 세발심지의 의미는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통로라는 것이다. 또한 이 세발심지를 태움으로써 굿판에 모든 잡귀를 물리치기도 한다는 것.

 

“세발심지를 만들어 굿을 하다가 보면, 무엇인가 불을 타는 것만 보아도 이루어질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재주를 배웠다는 것이 행복하죠. 남들은 이런 사소한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전통 하나를 익혀 지켜간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것이죠.”

 

세발심지를 만드는 남자 박노갑. 스스로 세발심지를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그 심지에 태워 신령에게 올린다고. 그것이 자신이 세발심지를 만들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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