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676에 소재한 장경사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을 지키던 산성으로,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인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세웠다. 전국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다.

 

장경사 경내에는 대웅전,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승도청을 두고 승군들이 노역에 가담해

 

인조 2년인 1624년 남한산성의 축성이 시작되어 8도의 많은 승군들이 축성 역에 가담하게 된다. 인조 3년인 1625년에는 승도청을 두고 각성대사를 8도도총섭절제중군주장에 임명하여 각도의 승국을 동원케 하고 이들을 감독하며 보살피게 하였다. 남한산성 축성 당시 남한산성에는 모두 9개소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한산성 축성을 마친 후에도 이곳에 승군을 주둔시키고, 항시 수성에 필요한 훈련을 계속하게 하였다. 이 승군들을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 옥정사 외에 개원사, 한흥사, 국청사, 장경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 등 새로운 사찰들을 세웠다. 9개의 사찰 중 장경사만이 남아 있어 남한산성과 함께 호국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장경사를 돌아보다

 

남한산성을 찾은 것은 10일 아침이다. 사실 장경사를 돌아보러 오른 것이 아니라, 남한산성에 있는 암문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찾아갔다. 남한산성의 암문과 수원 화성의 암문에 대해 비교하여 글을 쓰고 싶어서였다. 마침 장경사 곁 성곽에 제1암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겸사겸사 장경사까지 돌아본 것이다.

 

장경사는 역사적인 절이다. 지금의 대웅전은 당시의 건물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많은 보수 등을 한 것 같다. 절의 문 안으로는 모두 추위를 막기 위해 철골 구조물로 문을 만들어 달았기 때문에 예스러움은 많이 반감되었다. 거기다가 종각 등의 건물도 근자에 지은 것들이기 때문에, 과거 축성 당시의 모습을 유추하기에는 힘이 든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약간 우측으로 비켜서 조성을 한 석탑도 낯이 설다. 우리나라의 많은 고찰을 찾아다니면서 괜한 버릇이 하나 늘었다. 전통성을 지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어째 영 신심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찰은 고찰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다. 그런 품위를 느낄 수가 없으니 어찌하랴.

 

여장을 끼고 성벽을 돌아보다

 

대웅전을 비켜서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가장 높은 곳에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위에 올라 경내를 돌아보니 그때서야 절집다운 분위기가 풍겨온다. 그래서 절은 높은 곳에서 보아야 한다고 한 것일까? 삼성각을 돌아 남한산성 축성을 한 곳으로 돌아보기 위해 내려오니, 아직은 날씨가 쌀쌀한데도 성의 여장을 끼고 걷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인다.

 

 

과거 이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에서 모인 많은 승군들이 이 장경사에 머물며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구국의 선봉에 섰던 수많은 승병들. 과거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자신을 돌보지 많았던 승병들이다.

 

장경사 주차장 앞에 세워진 돌탑에 누군가 장난감 하나를 놓아두고 갔다. 아마도 이곳을 찾았다가 놓을 것이 없어 그것이라도 한물로 바친 것은 아닐까?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오늘 답사는 느낌이 큰 것이려니.

남한산성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 35년인 1759년에 성내 남동에 614호에 2,246명이 살았고, 성내 북동에 462호에 1,862명이 거주를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당시 성안에는 1,076호에 4,10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 초기부터 주변에는 토성 및 석성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에 방비를 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성안에 1,044호에 3,631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혜종 2년인 1836년의 인구는 <남한지>에 의거하여 1,117호에 4,353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한산성은 그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서장대 밑. ‘청량당이라는 당호가 보이는 작은 전각이 있다.

 

 

이회장군을 모신 사당

 

18일 일요일 오후.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간 청량당. 이곳을 찾아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다. 이곳에서는 매당왕신 도당굿이라는 굿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사전 조사를 하러 처음 찾아간 것이 2002년이었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때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혹세무민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몰리기도 하고, 더욱 종교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박해로 인해서 중단이 되기도 했던 도당굿. 이 매당왕신 도당굿은 남한산성 축조의 중임을 맡았으나, 지정된 기일 안에 성을 쌓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가 된 이회장군과 그 부인 송씨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둘레 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올라간 서장대. 굳게 닫혀있는 청량당의 문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쉽다. 물론 예전 자료야 갖고 있지만,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회장군의 탱화를 모시고 있는 청량당은, 남한산성 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서편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 이회장군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의 무리들의 모함에 빠졌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다.

 

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처첩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처첩은,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1920년도 자료에 보이는 매당왕신

 

192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는 매당왕신(鷹堂王神)’이라는 도당이 있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 홍대감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 위에 화주당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처인 산활부인은 그 비보를 듣고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가 날아왔다거나 성을 축조할 비용을 주색잡기로 탕진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서, 매당왕신 도당이라는 것이 지금의 청량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02년도에 청량당을 들렸을 때, 당 안에는 이회장군과 남편의 참형소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송씨부인, 첩실인 유씨부인, 승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성을 한 벽암대사의 화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속신인 백마신장과 오방신장, 이회장군의 당을 지키던 나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화분으로 모셨다는 대신할머니, 군웅, 별상 등의 화분도 함께 모셨다. 2002년 당시 조사를 할 때, 마을 주민들은 대감당(청량당을 마을 어르신들은 대감당이라고 불렀다)을 조성하고 그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다면, 청량당이 지어진 것은 벌써 400여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량당. 꽁꽁 닫힌 전각 안에서 이회장군은 답답함을 호소할 듯하다. 장군이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슬피 날아간 매처럼, 문을 열어 훨훨 날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 이 산성에는 모두 4개소의 문이 있다. 물론 성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련하고, 각기 그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동문이나 북문과 같은 이름들로 부르지만. 남한산성의 북문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그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였다.

 

남한산성에는 원래 4개소의 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내에는 동문과 남문, 그리고 수구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북문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성을 개보수할 때, 새로 신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북문을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일까?

 

 

패전의 아픔을 잊지 말라는 ‘전승문’

 

남한산성의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부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 있던 남한산성 내의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 의해, 300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문을 나선 병사 300명이 수많은 적을 기습공격을 한다고 해서 이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략을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 한번을 못해보고 몰살을 하고 말았다. 이는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던 병사들. 그들은 45일간이나 남한산성 내에 머물면서 청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북문의 기습공격이 실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버티거나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군사 300명이 적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 최대의 전투로 기록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기록은 아픔 그대로인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항복을 하러 나가는 인조의 모습은, 왕세자의 스승인 정지호가 쓴 『남한일기』에 잘 묘사 되어있다. 아마도 당시 인조와 세자의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묘사를 한 듯하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와 마골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하였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문무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인조는 일만 삼천여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을 갖고 남한산성에서 청의 20만 대군과 대치하면서 항전을 펼쳤으나,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 항전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게 항복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북문의 기습공격의 실패와, 1637년 1월 26일, 평안도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사 유림이 지휘하는 조선군 5천명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청의 용골대와 마골대가 이끄는 수만 명의 병사들에게 패전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승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북문인 전승문. 누각에 오르니 아래로 가파른 언덕이 펼쳐진다. 저 곳을 지나 청의 군사를 공격하겠다고 병사들이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 가파른 언덕 밑에 청군의 군영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140년이나 지난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것도 당시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전승문은 성의 북쪽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성벽은 딴 곳과는 달리 경사가 지게 축성을 하였다. 성문 앞으로는 가파른 비탈이 펼쳐진다. 성문 문루 위에서 좌측을 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성을 쌓았고, 우측으로는 평평한 길이 나 있다. 아마 이 북문을 빠져나간 병사들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전승문. 이 문 위에서 지난날을 가억해 본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패전을 했겠지만, 이 전승문의 실패를 거울삼았다면, 이와 같은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성문에 덧붙인 철판을 만져보면서, 역사의 아픔은 어찌 그리도 빨리 잊히는 것인지. 오늘 이 북문에 올라서 그 슬픔을 되새겨 본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욕의 아픔을 지닌 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역사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를 하였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 안으로 들어가면, 동문을 지나 조금 위편 좌측으로 정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 정자를 ‘지수당’이라고 하며, 현재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지수당은 삼면이 연못으로 되어 있어, ㄷ 자형의 연못이 정자를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이 지수당이 서 있는 연못 위쪽에는 또 하나의 연못이 있다. 중앙에 인공섬을 만들어 놓은 이 연못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또 하나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있다. 이 지수당은 조선조 현종 13년인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

 

남한산성은 지형이 서쪽이 높다. 그래서 성안의 모든 물은 동문인 좌익문 옆에 있는 수문으로 흘러 동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광주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동쪽에 아름다운 계곡이 형성이 되어 있는 것도, 이렇게 동쪽으로 물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 지수당의 위편에 있는 연못에서 지수당 앞으로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도, 지수당이 서 있는 ㄷ 자형태의 연못이 서쪽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수당의 연못은 땅을 깊이 파고 축대를 쌓아 조성을 하였다. 인공으로 연못을 만들고 그 한편에 정자를 지은 특이한 형태이다. 한 겨울에 찾는 정자의 모습은 어떠할까? 눈이 온 다음 날 찾아간 지수당 주변에는 눈이 쌓여있다. 연못의 물은 얼어붙었고, 정자 안 누마루에도 한편에 눈이 쌓여 있다.

 

 

지수당 동편입구 쪽에는 커다란 비가 서 있다. 부윤 이세화의 송덕비라고 한다.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남한산성이고, 정자가 평지에 자리하다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다. 정자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자 주변으로만 돌아보아도 지수당을 느끼기에는 어렵지가 않다.

 

눈 쌓인 지수당, 또 다른 멋이

 

지수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이 되었던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해서 다시 복원한 것이다. 지수당은 그렇게 화려한 정자는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한산성 내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고, 주변에 세 개의 연못이 더 있었다고 하면 그 모습은 사뭇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다.

 

 

정자는 연못의 한 면을 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그 위에 낮은 기단을 놓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주변에는 낮은 난간을 두르고, 동, 남, 북쪽으로는 댓돌을 놓고 입구를 내었다. 주초석은 네모난 돌을 사용했으며,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으로 마련을 한 지수당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다.

 

멀리 떨어져 지수당을 바라본다. 아마도 주변이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 당시 지수당을 바라다보았다면, 그 누구라서 글 한 수 적지 않았을까? 그저 평범한 정자이긴 하지만, 당시를 돌이켜보면 꽤나 운치 있는 정자였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더구나 군영이 있는 산성 안에 이런 정자가 있었다면, 그 정자가 군사들에게 주는 감흥은 색다른 것이었지 않았을까?

 

 

부윤 이세화는 멋을 아시는 분이었을 것이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이 채 가시기도 전인, 30여년이 지난 후에 이런 정자를 지었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아마도 이런 지수당을 건립을 한 것도, 그런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면서 눈길을 걸어본다. ‘뽀드득’ 소리를 내며 밟히는 눈의 감촉이 좋다. 정자는 사시사철 색다른 맛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정자를 찾아 나서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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