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흥천면 계신리를 '불암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바로 이곳에 마애여래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있는 남한강변을 '부처울'이라고 부른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은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자연암벽에 돋을새김을 하였다. 이 마애여래입상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조각기법 등을 보면 그 이전 통일신라시대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고려 초기의 보이는 인근 지역의 마애불보다 그 조각을 한 수법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조화라든지, 섬세한 수법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등에서 보이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했다는 것도,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암벽에 조각을 한 마애여래입상의 얼굴 주위에는 3중의 원형 두광이 있는데, 그 테두리에는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당당하고 특히 법의의 새김 등이 신라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부분적으로 약간 형식화 된 부분을 들어 고려 초기로 보고 있지만, 이 지역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의 마애불과는 달리 그 형태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아직도 지역주민들이 찾는 부처울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는 부처울은 강원도에서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 정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이포나루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때문에, 아마 이곳을 지나면서 이 부처울의 마애여래입상에게 편안한 강 길의 여행을 하게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지역의 주민들도 아직도 이곳을 찾아와서 빌고는 한다. 신라 말에 조성이 되었다고 보면, 천년 넘는 세월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아마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보호를 받아온 것도, 이 마애불이 서 있는 위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은 마을을 지나, 남한강가의 좁은 바위틈을 지나 내려가야 한다. 아마 예전에는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와 이곳에 배를 대고 정성을 드렸을 것이다. 그 좁은 통로를 지나 내려가면, 깎아지른 자연 절벽에 마애여래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강 길이 아니면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위치가 이 마애불을 온전히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

 

당당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에 감탄하다

 

부처울 마애여래입상은 수작이다. 인근의 마애불 중에서는 그 수법이 뛰어나다. 둥근 얼굴에 큰 귀가 어깨까지 닿을 듯 내려오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되어 불신 전체를 감싸며 U자 형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저렇게 바위에 섬세한 굴곡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눈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날카롭지 않은 모습이다. 코와 입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랜 시간 강을 따라 뗏목을 띄워 내려오는 사람들의 애쓴 노고를, 이 웃음으로 고통을 잊게 했을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손을 위로 향하고 왼손을 밑으로 내렸다. 법의는 팔소매에 주름을 새겨 부드러움을 더했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마무리를 하였고, U자 형이 주름이 아직도 섬세하게 옷매무새를 마무리하고 있다. 뛰어난 기능을 보이고 있는 이 마애여래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법의를 마무리를 한 것도 뛰어나다. 이렇게 뛰어난 솜씨로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부처울 마애여래입상. 지금 그 마애불은 남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천년세월 내려다 본 아름다운 남한강

 

부처울 마여여래입상이 천년세월을 내려다 본 남한강. 그 남한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침이 되면 자욱이 일어나는 물안개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강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아름답다. 겨울이 되면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와 물을 박차고 까맣게 비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강은 터전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한강을 천년 세월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남한강이다. 부처울 마애불에 비손을 하기 위해, 작은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다가온 사람들이 올려다보았다. 뗏목을 타고 멀리 강원도에서 찾아 온 사람들도, 올려다보고 두 손을 모았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풍취에 취해, 배를 띄우고 시선이라도 된 양 소리 한 자락을 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멈추었을 것이다.

 

그런 남한강이 변하고 있다.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물길공사라는 것으로 인해 마애불이 내려다보이는 그 앞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에 마애불을 새긴 까닭도 천년 뒤의 이런 생명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 강물 위로 슬픈 뱃소리 한 가닥 여울져 흐르는 듯하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이 앞을 흐르는 남한강 상류의 푸른 물, 그리고 그 안에 냇돌을 지나 만나게 되는 소나무 숲. 우리가 흔히 ‘청령포’라고 하는 곳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에 강원도 기념물 제5호로 지정이 되었다. 숙부에게 자리를 내주고, 스스로 상왕이 되었던 어린 조카 단종.

조선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다. 물론 기록에는 양위라고 되어있겠지만 말이다. 그 후 1446년 성삼문,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격하되어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상류로 오르다가 이포에서 배를 내린다. 그리고 육로로 여주의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고달사지를 지나 문막,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가 되었다.

오직 뱃길만이 접근이 가능한 ‘청령포’와 ‘관음송’

청령포는 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는 곳이다. 삼면이 남한강 물줄기가 휘돌아드는 곳이며 물살이 거센 곳이다.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접근을 할 수도 없다, 그 어느 곳으로도 밖으로 출입을 할 수가 없는 곳이다. 마치 섬과 같은 이곳 청령포에는 단종의 슬픈 역사를 지켜 본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어수정'은 현재 골프장 안에 있다. 이 어수정은 단종이 유배를 가다가 목을 축였다는 곳이다


관음송(觀音松), 이 나무는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흔히 보아오던 그런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와는 많이 다르다. 수령이 600여년이나 되었다는 이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30m, 가슴높이 둘레가 5.2m 정도에, 가지 길이는 동·서쪽이 22m, 남·북쪽이 19.5m 정도이다.

단종은 어수정에서 목을 축인 후 이 고달사지를 지나 여주군 북내면으로 들어선다. 이곳에는 노산군으로 강등이 되어 유배길에 오른 단종이 쉬어갔다는 바위와 '노림'이라고 부르는 숲이 있다. 일설에는 단종이 흥원창까지 갔다고도 하나, 여주지역의 많은 지명에서 여주를 거쳐 갔음을 알 수 있다 

 

지상에서 1.6m 정도 되는 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시절 이 갈라진 곳에 앉아 소일을 했다는 것이다. 관음이라는 말도 단종과 연관이 있다. 즉 단종의 '슬픈 유배생활을 보았으며(=觀), 이야기 소리를 들었다(=音)'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니다, 그 구슬픈 소리는 이야기가 아닌 단종의 슬픈 울음이었을 것이다.

단종 임금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무엇을 했을까? 때로는 서북의 한양을 바라보고 그리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짓기도 했을 테고, 때로는 동쪽의 흐르는 강물을 바라다보면서 이 좁은 곳에서 나가고도 싶었을 것이다. 어린 단종임금은 아마 어디를 보나 자신의 처지가 슬퍼 울음으로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 슬픔을 묵묵히 바라다보며 함께 한 소나무는 그 후 나라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했다고 한다. 그리움에 속이 타버린 단종의 마음이 전해져 나라걱정을 하는가 보다.

단종이 이 갈라진 소나무에 앉아 슬피 울었다고. 이 나무는 단종의 이야기 소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고 하지만, 이야기가 아닌 울음소리 였을 것이다.


임은 떠나고 세월만 남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관음송을 보기 위해, 청령포를 찾아 영월 땅에 들어설 때마다 비가 내렸다. 세 번이나 찾았지만 그 때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청령포를 들어가질 못했다. 아마 영월이라는 곳이 단종임금의 슬픈 사연이 많은 곳이다 보니, 갈 때마다 눈물이 되었는가 보다.

네 번째 찾았을 때 비로소 관음송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 나무들보다 유난히 높게 자란 관음송. 가지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갈라진 나무줄기 위에 잔가지들은 이리저리 어지럽게 굴곡이 졌다. 마치 단종임금을 위로하기 위해, 나무가 스스로 춤을 추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이곳 고도와 같은 청령포에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단종을 위해 관음송 스스로 춤을 추지는 않았을까?



그 슬픈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연신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은 저렇게 모든 것을 다 잊고 살아가는데. 관음송 한 그루만이 그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것인지. 단종을 위로하느라 추던 춤을,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여주 신륵사. 봉미산 신륵사라고 이름을 붙인 이 고찰은 신륵사라는 이름보다 ‘벽절’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남한강 변에 자리 잡은 신륵사 일주문에는 '봉미산 신륵사'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는 이 고찰이 자리한 절이 봉의 꼬리라는 것이다. 그 봉의 머리는 바로 강원도 오대산이다.

신륵사 조사전 뒤에 보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신륵사 서북쪽으로 난 이 계단을 오르면 보물인 보제존자의 석종과 석등, 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뛰어난 조각기법을 선보이는 고려시대의 석등

철책으로 조성된 보호대 안에 자리한, 보물 제231호인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이란 명칭을 갖고 있는 석등은,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석등은 대개 절의 전각 앞이나 부도탑 등의 앞에 세운다. 아마 두 곳 모두 불을 밝힌다는 뜻을 갖고 있나보다. 더욱 보제존자의 사리를 모신 석종 앞에 있는 이 석등은,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밝힌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보물 제231호로 지정이 된 8각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간주석이 없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었다.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구분이 되며, 받침돌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630여년이나 지난 소중한 문화재

이 석등은 고려 우왕 5년인 1379년에, 보제존자 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이다.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630년이나 지난 세월을 지켜 온 귀중한 유물이다. 이 석등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석등을 촬영하다가 화사석을 본다. 그리고 절로 탄성을 지른다. 어찌 이 단단한 돌에 이렇게 섬세한 조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비록 안면은 다 깨어진 것인지 사라졌지만, 그 하나하나가 정말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당장이라도 석등을 박차고 날아오를 것만 같은 부드러움. 천의는 하늘거리며 석등을 벗어나 나부낄 듯하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이무기는 또 어떠한가? 금방이라도 비를 만나면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을 할 것만 같다. 8면에 새겨진 비천상 그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특징이 있게 표현이 되었다. 아마 이 석등이 언제인가 그저 하늘로 날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우둔한 생각을 해본다.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찾았다. 그리고 석등 앞에서 일일이 사진을 찍고 기록을 한다. 우리들은 그저 무심코 지나쳐버리고 마는 그러한 문화재를, 저들은 이렇게 꼼꼼히 살피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 부끄럽다. 남들도 저렇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정작 우리는 훼손이나 시키고 있다는 것이. 비천상들의 안면이 다 사라진 것을 보면서, 그 부끄러움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남한강, 참 아름다운 강이다. 예전 기억으로는 이 남한강에서 잡히는 장어를 갖고 요리를 해 파는 집들이, 지금 신륵사 입구에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팔당댐이 막히고 나서 물길을 이용해 신륵사 앞으로 올라오던 장어들은, 높은 벽에 막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1973년 이후 다시 30년. 이제는 남한강에 세 개의 보를 막는다고 난리법석이다.

그 보 공사를 하기 위해서 신륵사 맞은편에 있는 금모래은모래의 아름다운 풍광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금모래은모래는 자연 퇴적층을 이룬 곳이다. 위에서 흐르는 남한강의 물길이 돌아치면서 흙을 날라다가 쌓은 곳이, 바로 여주사람들이 자랑하는 금모래은모래 밭이다. 이곳에서 하늘을 찌르는 숲이 우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휑하게 파헤쳐진 곳, 슬픔이 밀려와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그 곳에서 건너다보이는 금모래은모래는 예전의 정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숲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듬성듬성 조경을 해 놓은 나무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아름답던 모래톱은 그저 평평한 볼품없는 꼴로 바뀌어 버렸다. 물이 굽이치는 곳에는 채취한 골재가 산을 이루고 있다.

저 모래산이 바로 남한강의 속살을 다 빼낸 것이려니 생각하니, 한숨만 쉬어진다. 신륵사 전탑을 오르는 길에 만난 수령 600년이 지난 은행나무에게 묻는다.

 


“과연 저것이 강을 살리는 길일까요?”
“.......”
“저렇게 해 놓으면 이 강에서 살아가는 뭇 생명들이 다 잘들 살까요?”
“.......”
“강을 지키겠다고 노심초사 하시던 분들은 다 어디로 가셨을까요?”
“......”


2010 2, 2의 남한강 금모래은모래(신륵사에서 바라본) 아래사진은 2011, 5, 19 의 모습. 숲이 사라졌다

한 마디의 답도 없다. 그저 입을 다물고 살라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600년이 넘는 시간을 신륵사 앞을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서있는 은행나무. 이 나무는 나옹선사가 덕이 높은 스님들을 찾아 마음을 닦고 불도를 배우고, 중국에서 돌아와 짚고 온 은행나무 지팡이를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옹스님은 지팡이를 꽂으면서 ‘이 나무가 살면 후일 내가 죽어도 살 것이고, 만일 이 나무가 죽으면 나는 아주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이 나무는 전쟁 통에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600년이 넘는 세월을 잘 자라고 있다.

산처럼 쌓인 남한강에서 채취한 골재더미. 속살을 다 빼앗긴 남한강이다.

여강, 금모래은모래.. 이젠 다 옛 이름이 되다

남한강이 흐르면서 여주를 지나면 이름을 ‘여강’이라고 했다. ‘여(麗)’란 곱다는 뜻이다. 그만큼 여주를 가로 질러 흐르는 남한강은 아름다운 강이다. 그 강을 정비를 한다고 꽤나 자연스럽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직강으로 조성을 하면서 한편에는 돌 축대를 쌓는 모습도 보인다. 그런다고 밑에서 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올라와 산란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강은 흐르고 싶은 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많은 생명들은 다 이 혼란함 속에서 어디로 간 것일까? 생명이 살 수 없는 강에서 우리 후손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강의 속살을 파내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골재들이, 눈앞에 거대한 공룡처럼 보인다.


2010, 3, 28 여강선원에서의 수경스님과 파헤쳐지고 있는 여강선원 자리(아래)

달라진 여강, 이제는 금모래은모래도, 여강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수경스님’이 강을 지키겠다고 건강을 해치며 지키고 있던, ‘여강선원’의 자리도 다 파헤쳐지고 있다. 이제는 무엇에 마음을 담고 살아야할지.


경기도 여주군에 소재한 고찰 신륵사를 사람들은 ‘벽절’이라고 부른다. 신륵사를 이렇게 부르는 것은, 경내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전탑이 있기 때문이다. 신륵사는 많은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고찰로도 유명하지만, 판소리 중고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명창 염계달이 이곳에서 득음을 하고 ‘경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신륵사 경내에는 전탑 외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바위 위에, 심하게 마모가 된 체 서 있는 석탑 한기가 있다. 옆에는 강월헌이 자리하고 있어, 남한강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 삼층석탑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옹화상을 화장을 한 자리

기록에는 고려 말에 나옹화상을 신륵사 경내 남한강 가에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바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석탑은 대웅전 앞에 많이 세우는데, 이렇게 동떨어진 강가에 서 있기 때문에, 기록에 보이는 화장을 한 장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석탑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가 되었다. 화강암을 깎아 조성한 이 삼층석탑은 현재 3층의 몸돌은 멸실된 상태이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이 탑은 기단부 밑에 기단부를 한 장의 넓적한 돌로 조성을 하고, 그 밑으로는 자연 암반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런 강가의 암반에서 나옹화상을 떠나보냈는가 보다.


짜임새가 간결한 고려 후기의 석탑

남한강가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기단부는, 아래기단은 2단의 형태로 조각하였다. 그리고 위기단은 양 우주와 탱주를 조각하였다. 위에 탑신에는 양편에 우주를 새겨 넣었다. 그러나 몸돌의 끝 부분이 마모가 심하여 양 우주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몸돌 위에 얹은 지붕돌인 옥개석은 경사가 완만하다. 옥개석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일반적으로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가 날렵하게 솟아오른 모습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기단의 위에 덮은 지붕돌에는 앙련을 크게 새겨 넣었다.




옥개석 아랫부분에 새긴 층급받침은 3단과 4단으로 일정치가 않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상륜부는 사라져 버렸으며, 맨 위의 옥개석 위에는 둥근 구멍이 나 있다. 아마도 상륜부를 고정시키기 위해 철골로 된 구조물을 얹었던 것 같다.

나옹화상을 기억해 내다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은 고려 말의 고승이다. 성은 아(牙)씨였으며. 속명은 원혜이다.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江月軒)이다. 이곳 신륵사에서 강월헌(원래의 강월헌은 수해로 인해 사라졌다)에 기거하였다.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는 용이 살았는데, 나옹화상이 그 용을 굴레를 씌워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륵’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나옹화상이 설법을 하면 귀신도 참여를 하였다고, 정두경의 고시 ‘신륵사’에 적고 있다. 그럴 정도로 나옹화상은 뛰어난 법력을 지녔는가 보다. 유명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라는 글도 나옹화상이 지은 것이다. 이렇듯 고려 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입적 한 후 화장을 한 장소에 세웠다는 삼층석탑.

아마도 그 탑의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나옹화상의 성정을 닮은 것은 아니었을까? 4대강 개발이라는 허명아래 파헤쳐지고 있는 남한강을 보면서, 나옹화상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글을 지었을까? 5월 19일 찾아간 신륵사 삼층석탑 앞에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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