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에 소재한 광한루원. 명승 제33호인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마도 남원을 들렸다가 이곳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없으리란 생각이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의 장소로도 유명한 광한루. 원래 이곳은 조선 세종 원년인 1419년에 황희가 ‘광통루’라는 누각을 짓고, 산수를 즐기던 곳이었다.

1444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인 정인지가 광통루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여 이곳을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부른 후 ‘광한루’라고 광풍루를 고쳐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1461년 부사 장의국은 광한루를 보수하고,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하늘나라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다.




볼거리가 많은 광한루원

광한루는 누원이긴 하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넓지 않은 루원 앞으로는 요천이 흐르고 있어,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아름답다. 광한루원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잔디밭이 나오고, 그 앞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완월정’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이 정자는, 지상에서 달을 보기 위한 정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옛날 옥황상제가 계신 ‘옥경(玉京)’에는 광한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 아래에는 오작교와 은하수가 굽이치고 있는데, 아름다운 선녀들이 달나라의 궁전이라는 ‘계관’에서 즐겼다는 것이다. 이 전설에 따라 광한전을 닮은 광한루를 세웠으며, 완월정은 그 달 속에 아름다운 경관을 보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겹처마 팔작 오방집인 완월정

완월정은 오방집이다. 오방집이란 네모난 집의 한편을 돌출시켜 오방처럼 지은 집을 말한다. 겹처마 팔작의 조선식으로 누각을 마련하고, 그 뒤편을 연못으로 돌출시켜 오방집으로 꾸몄다. 완월정은 작은 인공 섬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을 물이 에워싸고 있으며, 작은 다리를 건너 들어간다.

중층 누각으로 조성을 한 완월정은 양편으로 누각 위로 오를 수 있도록 꺾인계단을 놓았다. 위로 오르면 누각 뒤편을 밖으로 돌출시켜 높임마루를 깔았다. 양편으로는 게판이 즐비하게 걸려 있으며, 기둥은 모두 원형의 기둥을 사용했다. 11월 6일 찾아갔을 때는 붉은 단풍이 완월정 주변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완월정을 바라보아도 아름답다. 가을의 완월정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그네들을 맞이한다. 계단을 내려 누각 밑을 들여다본다. 굵은 원형기둥의 밑에는 자연 그대로인 덤벙주추를 놓아, 자연스러운 멋을 더했다.

완월정, 지금 그대로가 좋다

완월정 주변을 천천히 걸어본다. 붉은 단풍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고 부서진다. 음력 5월 단오가 되면 춘향제가 열린다는 완월정. 아마도 그 어떤 누각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세상살이 힘들고 지쳤을 때 이곳 완월정에 올라, 멀리 지리산 위로 솟는 달을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모든 시름을 잊을 것만 같다. 다시 한 번 완월정 계단을 밟아본다.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천상의 선녀가 보이지 않아도, 이 모습 그대로 볼 수 있으면 무엇이 더 필요하랴. 광한루원에는 광한루만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11월 6일, 오후까지 일을 보고 잠시 광한루원에 들렸다. 걸어서 20여분, 카메라 하나를 걸머메고 천천히 걸어 광한루원까지 가는 길에, 은행잎이 떨어져 온통 세상이 노랗게 변해버렸다. 광한루원은 명승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이다. 광한루원이야 유명한 곳이고 수많은 소개가 된 곳이니, 구태여 여기서 또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광한루원 한편에는 ‘월매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언제 적에 조성한 것인지는 몰라도 춘향전에 나오는 정경을 본 따 축조를 했을 것이다. 담벼락 한편에 은행나무가 서 있어. 초가 위에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이 아름답다. 월매의 집은 대문채와 안채, 그리고 춘향이와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별채인 부용당으로 꾸며져 있다.


전형적인 민가를 잘 나타내고 있어

물론 월매의 집이 문화재는 아니다. 그리고 예부터 있던 집은 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 집을 돌아보면, 예전 민가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매의 집 앞에는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월매(月梅)집 - 조선시대 우리나라 고전 <춘향전>의 무대가 된 집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광한루 구경 길에 올랐을 때, 그네를 타고 있던 성춘향에게 반하여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은 집으로 춘향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월매집이라고 하였다.

이 집은 돌담 위에 짚으로 이엉을 올렸으며, 대문은 네 칸이다. 안으로 들어서면서 우측 한 칸은 대문채인 하인의 방이고, 대문, 그리고 좌측 두 칸은 광으로 사용을 한다. 그 옆에는 한 칸으로 지은 측간이 자리한다.

그 측간위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어 노랑 은행잎이 떨어져 가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누가 가을은 붉다고 하였는가? 이 노랑 은행잎이야말로 가을을 알리는 가장 멋진 색이 아닐까 한다.

다섯 칸으로 구성한 안채 훌륭하네.

월매의 집 안채는 대문채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자리한다. - 자로 서 있는 안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집을 바라다보면서 좌측으로부터 부엌이 자리하고, 부엌 옆에는 두 칸의 안방이 있다. 그리고 한 칸의 마루방과 맨 우측에 한 칸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으로는 높임마루를 놓고 정자와 같이 난간을 둘렀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안방과 대청까지 연결하여 툇마루를 놓았다. 그리고 건넌방 뒤로는 문을 달아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를 놓은 듯하다. 문마다 잠겨있어 안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정도 집이라면, 민초들의 집 치고는 상당히 좋은 집이라는 생각이다.

안채의 앞면이다. 가끔은 앞에 굴뚝을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사진 좌측 부엌쪽에도 없다





이런 세상에 집을 돌아보니 굴뚝이 없네

옆에 서 있는 ‘부용당’은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이 대문채와 안채만 갖고도 충분히 아름다운 초가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집을 돌아보다가 그만 실소를 하고 만다. 그래도 명승에 마련한 집이고, 더욱 춘향전에 나오는 대목으로 꾸민 집이다. 그런데 대문채를 들어서면 대문채 방 앞에 <행랑채 - 방자가 식사하는 장면입니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방자가 왜 월매네 집의 행랑채에 묵고 있을까? 그것이야 이도령이 부용당에서 춘향이와 사랑 놀음에 빠져있으니, 이 대문채 행랑방에서 방자가 밥을 좀 먹기로서니 무엇이 문제이랴. 그런데 안채를 돌아보다가 정말 어이가 없는 경우를 본다.

뒤켠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연도도 없다. 만일 연도가 있다면 축대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로 내려가 지나가는 것이 보여야만 한다



안채 부엌에는 향단이가 불을 때고 있는 모형이 보인다. 이 안채의 구성으로 보아서 적어도 굴뚝이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에서 나오는 굴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연도도 없고 굴뚝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고 만다. 불 때는 향단이가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것이라는.

측면에도 역시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이 집에는 두 개의 굴뚝이 서 있어야 한다. 안방에서 나오는 굴뚝과 건넌방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나오는 굴뚝. 그런데 굴뚝이 없다. 보일러를 옛날에도 썼는지?


명색이 명승 안에 마련한 집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런 곳 안에 마련한 집에 굴뚝이 없다니. 굴뚝 하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이런 경우를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그저 건성으로 대충 만들어 놓고 보여주는 전시행정. 참으로 멋진 월매네 집의 ‘옥에 티’란 생각이다.

남원을 찾는 사람들은 참 볼거리가 많다고 한다. 사람들이 남원을 다녀 간 후 질문을 한다. 어디를 다녀갔느냐고. 그러면 거의다 대답이 천편일률적이다. 광한루원과 민인의총,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과 몇 군데 유적지를 댄다. 그러나 정작 이 가을에 남원에 오면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 한 곳 있다.

<도심속 향기원> 이름부터가 색다르다. 수목원은 많다. 그러나 얼마나 향기에 녹아버렸으면, 향기원이라는 니름을 붙였을까? 그것도 도심속에 있는 향기원이라고 한다. 도심속 향기원은 남원 시내에 있던 구 남원역사 일대를 말한다. 기차가 다니던 이곳이 고속철도로 인해 남원역이 옮겨가자, 그 부지 전체를 꽃밭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철길따라 펼쳐진 꽃밭 장관이로고 

시내를 가로지르는 도로변에 입구가 있다. 높다랗게 '도심속 향기원'이란 간판이 걸린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꽃들의 경합이 이루어진다. 천일홍이며 라밴다 등 각종 꽃들이 뿜어내는 향에 어지럽다. 그리고 각색으로 꽃을 피운 많은 화초들이 저마다 객을 불러세운다.




그렇게 아름다운 꽃밭은 흙길로 조성이 되어있어, 걷다가 보면 절로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구역사 철길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철길 양편으로 펼쳐진 코스모스가 벌써 씨를 맺기 시작했다. 가을 하늘과 코스모스, 그리고 쉬고있는 철길. 어느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기차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기찻길을 따라 걷다가 보면, 꽃차가 달려온다. 빨갛고 노란 꽃차들이 양편에서 달려온다. 그 가운에 서서 향기에 취한다. 그리고 가을에 취한다. 그러다가 보면 어지러움을 느낀다. 철길에 털석 주저 앉았다. 더 많은 꽃들이 달려온다. 가을의 남원의 볼거리이다. 가을 날, 누가 이곳을 지나치고 남원을 보았다고 할 것인가?





꽃에 취하고 가을에 취할 수 있는 도심속 향기원, 그래서 남원은 외롭지 않은 곳이다. 늘 취해서 살고 있으니...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253-1 만동마을 안에는,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의 높이는 8m에 밑동의 둘레가 2.5m 정도가 되는 나무이다. 그동안 답사를 하지 못해, 오랜만에 잠시 짬을 내어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라도 찾아보겠다고 길을 나섰다. 남원시 덕과면 만동마을 앞을 지나는데, 무엇인가 마을 안에 정자와 같은 것이 보인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안으로 들어가니 붉은 벽돌로 담장을 두른 안에 정자가 있는데, 문 앞에 석비가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이 소나무가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는 안내판이다. 그러나 멋진 소나무와 함께 자리를 한 정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을 보니, 문화재 지정이 안 된 듯하다.


600년 전에 자리 잡은 만동마을

만동마을은 조선 태종 때인 1,400년경에 진주 소씨의 ‘소석지’가 처음 이곳을 개척하고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사람들은 북쪽 1㎞지점에 소씨가 터를 잡은 곳이, 천황봉과 계룡산의 정기가 맺힌 곳이라 하여 좋은 명당자리라 칭찬해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소석지가 처음 터를 잡았을 때는 마을 이름을 ‘만적(晩迪)’이라 하였으나,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에 이성춘이 자포실에 살다가 이웃 산수동으로 이주한 후 만적과 산수동을 합쳐 만동이라 하였다는 것. 지금은 도로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하고 있는 마을은 1,700년 경에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아마 이 소나무 한 그루의 나이가 300년 정도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제 모습을 갖춘 시기에 심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 요즈음 시골의 형편이다. 이 소나무나 정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 몇 분을 뵈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수많은 시판이 걸려

소나무는 한 옆으로 약간 구부러져 자라고 있다. 그 뒤편에 자리한 정자 ‘문유정(門柳亭)’. 버드나무 문이란 뜻을 가진 이 정자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 텐데,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다. 처마 끝에는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한 가운데는 마루방을 드렸다.




정자 안은 온통 중수기를 비롯한 게판들로 꽉 차 있다. 어림잡아 보아도 20여개가 넘는 게판들이 줄지어 달려있다. 이렇게 많은 게판이 걸려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는 것을 말한다. 지어진 지가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문유정’. 특별한 그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있을 법한 정자이다.

정자 중앙에는 한 칸의 마루방을 놓았다. 사방을 약간 높게 턱지게 만들고, 문은 모두 위로 올려 달 수 있도록 하였다. 앞에 서 있는 노송 한 그루와. 펼쳐진 정경이 시원하다. 마을 끝에 조금 높게 자리를 잡은 정자. 그 모습만으로도 절로 흥이 넘쳐날 만하다. 그런데 이런 멋진 풍광을 느낄 수 있는 정자에 설명을 하는 문구 하나가 없다는 것이 아쉽다.



문화재 이정표가 없는 남원, 답사 길에 어려움이 뒤따라

문화재답사를 가장 하기 힘든 곳이 남원이라고 한다. 오직 광한루와 만인의총 정도가 도로 안내판에 표기가 되어있을 뿐이다. 문화재는 큰길가서부터 안내판을 붙여 유도를 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남원 어디를 돌아다녀 보아도 안내판이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는 보물이나 천연기념물이 있어도 안내판 하나가 없다.

문화재 코 앞에 가야 서 있는 작은 안내판은, 글이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적지 않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남원의 문화재들은 그래서 서럽다. 사람들이 지나치다가도 들어올 수 있지만, 그런 혜택마저 누리지 못하는 남원의 문화재들이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와 어우러진 문유정. 지나는 길에 만난 이 아름다운 정자와 소나무의 내력을, 다시 한 번 찾아 들어야 할 것만 같다.

남원하면 사람들은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 십중팔구는 ‘춘향이’라고 할 것이다. 때로는 ‘추어탕’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구는 요즈음 한창 각광을 받고 있는 ‘지리산 둘레길’이란 대답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춘향이를 이야기 할 것이고, 그래서 남원을 ‘춘향골’이라고 부른다.

남원에는 춘향이에 대한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 우선 지리산 입구에 가면, 계곡 가에 육모정 맞은편 계단위로 ‘춘향묘’가 자리한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들어가는 우측 길가에는 춘향이와 이몽룡이 이별을 했다는 ‘오리정’도 있다. 떠나는 임을 차마 못 떠나 보내고 버선발로 쫓아갔다는 ‘춘향이 버선발’이라는 곳도 있다.


광한루의 연정을 느낄 수 있는 또 한 곳

그러나 이몽룡과 춘향이의 사랑이야기는 광한루를 빼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광한루를 연인들과 즐겨 찾는다. 아마도 이몽룡과 춘향이의 사랑처럼, 그렇게 깊은 사랑을 엮어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 그렇게만 된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 사랑 뒤에는 변학도라는 지저분한 인간 하나가 또 있다는 사실 말이다.

광한루에서 요천에 걸린 춘향교를 건너면 사랑의 광장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뒤편에는 춘향이 테마공원이 자리한다. 춘향이 테마공원. 연인들은 이곳을 찾아 춘향이처럼 사랑을 약속하기도 하고, 그네를 타면서 춘향이 흉내를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역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춘향이가 신관 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옥에 갇힌 장면이며, 동헌의 앞마당에서 주리를 틀리는 모습도 보인다. 돌아다니다가 보면 이런저런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글쎄다 과연 춘향이와 이몽룡의 사랑이야기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다섯 부분으로 나뉜 테마공원

춘향테마공원은 모두 다섯 부분으로 구분이 된다. 그 첫째는 만남의 장이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만남을 주제로 한다. 둘째는 맹약의 장이다. 이곳은 춘향이와 이몽룡이 서로가 사랑을 언약한 것을 주재로 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사랑과 이별의 장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는 동헌과 옥이 있는 시련의 장이다. 이몽룡이 한양으로 가고난 후, 신관사또에 의해 수청을 종용 당하고 옥살이를 하는 춘향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제의 장이다.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이 내려와 옥중 춘향이와 다시 만나고, 춘향이를 가마에 태워 한양으로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춘향전은 지금 세상을 미리 내다 본 소설이었다.

사람들은 신관사또 변학도를 나쁜 남자로 몰고 간다. 탐관오리에 여색이나 탐하는 그런 인간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춘향전이 지어진 시기를 조선조 영조 때로 보고 있다. 이때는 조선후기로 계급타파와 사회개혁사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이다. 춘향전에서 보이 듯, 퇴기 월매의 딸 춘향이와 당시 사대부가의 이몽룡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은, 이미 사회에 팽배한 계급타파를 은연 중 내포하고 있다.

또한 신관사또를 징벌하는 내용으로 보아도, 당시의 사회개혁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때란 생각이다. 이런 춘향전과 같은 소설이 민초들에 의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에는 이미 민초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져 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어찌 보면 당시의 사회가 춘향이와 이몽룡, 그리고 변학도라는 신관사또를 연적으로 설정을 해놓고,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소설이었다는 생각이다. 조선조 말엽의 양반사회에 대한 부패상의 풍자와, 관료 봉건 제도에 대한 반항을 관기의 딸인 성춘향의 수절을 빌어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1700년대 중반에 300년 뒤의 세상에서 멋대로 방종을 일삼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춘향전은 판본의 이본이 5종, 사본이 약 20여종, 활자본이 50여종에 번역본이 6 ~ 7종 정도가 있을 정도로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다. 그 수많은 책들과 판소리까지 전해지면서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십장가로 본 여인의 일부종사, 듣고 깨우쳐야

‘십장가’가 있다. 춘향이가 변사또에게 불려나가 형장에서 태형을 맞는 장면이다. 태형을 맞는 춘향이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한다. 그것이 유명한 십장가이다. 지금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심장가. 그것은 바로 열녀 춘향이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일편단심 굳은 마음 일부종사 뜻이오니, 일개 형벌 치옵신들 일 년이 다 못가서 일각인들 변하리까?"

이 때 남원부 한량이며 남녀노소 없이 구경할 제, 좌우의 한량들이, "모질구나 모질구나. 우리 골 원님들이 모질구나. 저런 형벌이 왜 있으며, 저런 매질이 왜 있을까? 집장 사령놈 눈 익혀 두어라. 삼문밖 나오면 급살을 주리라." 보고 듣는 사람이야 누가 아니 낙루하랴"
둘째 낱 딱 부치니, "이부절을 아옵는데, 불경이부 이내 마음이 매 맞고 죽어도 이 도령은 못 잊겠소."
셋째 낱을 딱 부치니, "삼종지례 지중한 법 삼강오륜 알았으니, 삼치 형문 정배를 갈지라도
삼청동 우리 낭군 이도령은 못 잊겠소."
넷째 낱을 딱 부치니, "사대부 사또님은 사민공사 살피잖고 위력공사 힘을 쓰니, 사십팔방 남원 백성 원망한을 모르시오. 사지를 가른대도 사생동거 우리 낭군 사생간에 못있겠소."
다섯 낱 딱 부치니, "오륜윤기 그치잖고 부부유별 오행으로 맺은 연분 올올이 찢어 낸들 오매불망 우리 낭군 온전히 생각나네. 오동추야 밝은 달은 임계신데 보련마는, 오늘이나 편지 올까 내일이나 기별올까. 무죄한 이내 몸이 오사할 일 없사오니, 오결 죄수 마옵소서. 애고애고 내 신세야." (하략)



어찌보면 추냥전은 이 시대를 예고한 소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자 미상에 남원이라는 곳에 한 여인과 사대부가의 도령을 설정한다. 그리고 변학도라는 여인을 참닉하는 인간 하나를 덧붙인다. 이 내용을 잘 보자. 있다고 해서 여인과의 스캔들로 심심찮게 인구에 회자가 되고 있는 가진자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변하도가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사회가 막장이요, 방송이 막장이다. 막장을 종용하고 있는 이 시대에 그래도 꿋꿋하게 일부종사를 하는 춘향이는 바로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질타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 신분적 차이를 부수고 천기의 딸 춘향이를 끝까지 지켜내는 이몽룡이라는 남자는, 이 시대 많은 남자들에게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춘향전이 지금 시대에 들려주는 진실. 그것은 무엇이엇을까? 난 이 춘향전을 보고 들을 때마다, 이 책은 지금 시대를 예견한 책이었다는 생각읗 한다.  열여섯 살의 춘향이도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사랑하는 임을 지켰다는데, 요즈음 사람들 과연 이렇게 한 사람을 사랑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몽룡이는 그러한 춘향이를 믿고 멀리 남원까지 내여가 재회를 하였는데, 지금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 여인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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