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천년 고찰 절집인 선원사에는 예쁜 녀석들이 지난 해 입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녀석이 약 한 달 전에 귀여운 녀석들을 낳았다고 하네요. 이 녀석들 암 수 한 마리씩인데 아직 젖도 떼지 못했습니다. 엄마 곁을 따라다니다가 사람들이 오면 쫄쫄거리고 따라 나옵니다.


하얀 색이 솜털 같기만 한 포메라이안 두 녀석인데 엄마를 떨어져서도 곧잘 놉니다.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요. 두 녀석과 함께 있으면 걱정 근심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역시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끼들은 다 귀여운 것 같습니다. 이 녀석들 좀 보시죠.


  

이 녀석이 숫놈입니다. 그래도 으젓하죠.


두 녀석은 꼭 붙어 다니네요. 아직 어려서인지









실상사 백장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에 소재한 백장암은, 남원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면 대나무 숲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의 암자로 예전에 경작지였다는 곳에, 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정리를 하고 사람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국보인 삼층석탑을 만나면서, 석등은 빛을 잃게 된다.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문화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존의 통일신라시대의 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가히 국보 중에 국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삼층탑의 정교한 조각 뛰어나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전체가 놀라운 조각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삼층석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교한 조각은 백장암 석탑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일층의 탑신에는 신장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하며 뛰어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신장상이나, 곱게 단장한 보살상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층과 삼층의 탑신은 줄어들지 않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층의 탑신에는 사방으로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8명의 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층의 탑신에는 천인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치유를 해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다양한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지붕돌의 삼존상. 삼층석탑의 색다른 멋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탑들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탑을 조성한 장인의 솜씨는 최고였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탑의 특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올려 진 삼층의 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돌에 조각을 한 지붕돌을 올렸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과 탑신의 고임돌에는 난간모양을 새겼다.

 

 

이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층 지붕돌이다. 일반적인 지붕돌은 연꽃이나 구름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이 탑의 삼층 지붕돌에는 각 면마다 삼존불상을 새겨 넣었다. 각 면마다 조각한 삼존불상이 있어 이 탑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의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조각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백장암 삼층석탑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석탑

 

'백장암 석탑을 보지 않았거든 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 말라'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는 중에 전주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다. 그만큼 백장암 삼층석탑의 조각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정교한 예술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어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통일신라시대 손으로만 빚어낸 걸작.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장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했을까? 그 앞에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문화재들.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그 누구라도 우리 예술품의 높은 경지를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년)~1493(성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김시습의 한문 단편소설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었던 만복사는, 현 전북 남원시에 소재하는 사적 제349호이다. 한문 단편소설인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다.

이 중에서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조금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흔적만 남긴 만복사지.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 최대의 가람

남원 만복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과 이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길이 35(10m)척의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다"라고 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전각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복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또한 청자와 백자, 많은 와편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만복사지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절터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는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들

김시습은 왜 이 만복사를 단편소설의 무대로 삼았을까? 만복사지를 찾아간 것은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낮은 경계로 주변을 둘러 친 만복사지.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 길 밑으로 보물 제32호 당간지주가 서 있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성이 된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너른 사지 복판에 보물 제31호 석좌가 보인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좌의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높이 1.4m 정도인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했는데 육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석좌를 지나 전각 쪽에는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보물 제30호인 이 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높은 기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불입상 역시 만복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정수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풍만한 인상이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의 광배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 석불입상의 뒤에는 선각을 한 부처상이 조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만복사지에 가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수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는 만복사. 지금은 그저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기의 보물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도대체 만복사란 절을 왜 무대로 했을까?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불교 철학의 사유를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복사를 무대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금오신화에 보이는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 박생(朴生)이 꿈속에 염라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염라대왕과에 토론을 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생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도교와 유교, 불교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 어쩌면 이 만복사를 무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의 고차원적인 사랑을 일깨우고자 했음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야기 때문에 광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복사지를 떠나면서 돌아본 옛 절터. 어디선가 양생과 처녀의 애절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남원 선원사 절집에 토끼 네 마리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 녀석들 얼마나 잘 먹고 살았는지 살이 올라 토실하다. 이 녀석들이 한 녀석은 암놈인줄로만 알았다는데, 알고보니 네 녀석들이 모두 숫놈이다. 토끼는 생육이 빠르다. 임신 주기도 짧고 한 달에 한 번씩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참 얼마나 대단한 녀석들인가.

녀석들은 팬스 안 보호소에 있다. 안전하게 저희들끼리 살라고 그곳에 두었는데, 한참 혈기 왕성하게 자란 듯하다. 이 녀석들이 하루 종일 저희들끼리 이상한 짓들을 한다. 남이 보면 참으로 남사스럽다. 그렇다고 하지 말라고 한들, 알아 들을 것도 아니니 말이다.

"야! 너희들끼리 그러냐 나 여자거든"


문제는 팬스 밖에서 살고 있는 절집 봉순이다. 이 녀석이 혼자 심심하던 차에 팬스로 가려져는 있다고는 해도, 그래도 숫놈들을 보고는 입맛을 다시고 있다. 아마도 제가 암놈이라서인가. 숫놈끼리 해괴한 짓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입맛만 다시는 봉순이. 이 녀석도, 저 토생원들도 짝을 찾아 주어야 할까보다.

비는 오고 짐을 싸다가 잠시 내려가보니, 그 비를 맞으면서 이 녀석들이 장난을 치는 모습을 부러운 듯 보고 있는 봉순이의 눈길이 애절하다.
 



남원 시청에서 요천에 난 다리를 건너 좌측 길로 가다가 보면, 도로 좌측에 ‘용담사’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에 소재한 이 절 안으로 200m 정도를 들어가면, 절 문을 들어서면서 커다란 탑 하나를 만나게 된다. 탑이라고 하지만, 이 탑의 생김새가 일반 석탑과는 아주 다르다. 흡사 석재를 높이 쌓기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용담사는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세워진 사찰인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백제 성왕 때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통일신라 말기에 선각국사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절에 전하는 전설이나 여러 가지 유물로 보아서,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고려 때에 세워진 칠층석탑, 이상한 탑일세.

한 마디로 이런 형태의 탑은 보기가 어렵다. 흡사 높이 쌓기 내기라도 한 듯한 모양이다. 높이가 워낙 높다보니 안정감이라고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상륜부는 사라진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히 높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얹었는데, 너무 길쭉하고 홀쭉한데다가 지붕돌이 몸돌보다 유난히 크고 두터워서 불안정한 모습이다. 기단은 하나의 돌로 간단하게 되어 있다. 탑신의 몸돌은 2층에서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은 6단, 4층은 5단, 5층은 4단, 6∼7층은 3단으로, 위로 오를수록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도 희미하게 들려 있다.




이 칠층석탑은 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불안정하다. 전체적으로 투박한 형태의 칠층석탑은 탑신의 5층 몸돌은 편편한 돌 2개를 양쪽으로 세워 위를 받치고 있는데, 이렇듯 불안정한 부분 때문에 탑이 기울어져 있는 듯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높이가 9.95m에 이르고 있는 용담사 칠층석탑. 이 탑은 용담사 창건당시의 유물 22점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용담사의 최초 창건연대가 고려 초기가 아닌가도 생각하게 만든다.



왜 이런 탑을 조성했을까?

11월 4일 찾아간 용담사. 시간이 늦어 제대로 사진을 찍을까도 걱정이다. 용담사는 이번이 초행은 아니다. 벌써 세 번째 찾아왔다. 첫 번 째와 두 번 째는 이상하게 비가 오는 바람에 탑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위부분이 까맣게 나왔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날이 흐린데다 시간까지 늦어 걱정이 앞선다.

여름철과는 달리 11월부터는 답사도 힘이 든다. 날이 금방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같은 답사를 해도 겨울철에는 짧아진 해 때문에, 여름철의 절반 정도 밖에는 답사를 할 수가 없다. 마음이 바쁜 김에 먼저 사진부터 찍어놓고 탑 주위를 살핀다.



높이 10m의 칠층석탑. 그 형태로 보나 조각을 한 것으로 보나. 지방의 장인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왜 이런 모양의 탑을 세운 것일까? 그러고 보면 남원은 배의 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에 떠내려 갈 것을 염려해 선원사에는 배를 묶는 석주가 남아있다. 물론 상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높게 조성한 탑은 혹 배의 깃대는 아니었을까? 좌우로 바람에 따라 중심을 잡기 위한.

이상하게 불안정한 칠층석탑을 올려다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해답은 결국 얻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되뇐다. ‘저 탑 정말 배의 깃대가 맞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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