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 두 곳(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화성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암문은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형을 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역할을 하던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와 팔달문 양편에 적대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많은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수문 옆 지장물 철거가 주는 의미

 

현재 남수문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약간 휘어진 곳에서 성이 끊겨있다. 남수문은 1846년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 대홍수 때 남수문이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가 남수문이 복원되어 현재는 42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2012년 수원시는 90년 만에 남수문을 복원하였다. 동남각루 경사진 곳에서부터 새로 성을 축성하고 남수문을 복원한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것을 감안해 수문 안쪽으로 장마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들을 걸러낼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물이 급격히 불어나도 많은 물이 수문에 영향을 주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2년 남수문을 복원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 이상의 공사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다시 화성의 끊긴 부분을 공사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이미 화성의 자리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화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언제 만날 수 있을까?

 

27, 남수문 안쪽에 현수막이 한 장 걸려있다. ‘남수문 옆 소공원 지장물 철거공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남수문 안쪽 성벽이 끊어진 곳에 서 있는 건물에 공사용 가름막이 쳐져있다. 이제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먼저 성터에 서 있는 건물들을 매입하고, 지장물을 철거한 후 성벽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

 

이번 화성사업소에서 하는 공사는 현재 그동안 남수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상가건물들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234~2, 33~6, 35, 32~2번지 등으로 현재 수원남문고객센터 건물만 남겨놓고 그 인근 건물이 모두 철거대상이다. 이 건물들이 철거돼야 끊어진 성벽과 잇대어 공사를 할 수 있고, 남암문과 남공심돈을 복원할 수 있다.

 

202013일까지 지장물 철거공사를 마치고나면 남수문 옆에서 끊어진 채로 놓여있던 화성의 일부분이 다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 공사를 마친다고 해도 화성전체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공사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구간이라도 이렇게 연결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수원화성이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지장물 철거공사 안내판을 보면서 벌써 남공심돈과 남암문의 모습이 그려진다.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 제3호인 화성. 그 안에 구조물 중 하나인 각루란 높은 위치에 세워, 주변을 감시하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각루는 비상시에는 각 방면의 군사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동남각루는 화성의 4개 각루 중에서 성의 안과 밖으로 가장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다.

 

동남각루는 남수문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팔달문에서 남공심돈을 거쳐, 남수문을 지나며 갑자기 위로 솟아오르듯 가팔라지는 성 안에 자리한다. 이곳에 동남각루를 세운 것은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남공심돈과 마주하면서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아름다운 구조물 ‘각루(角樓)

 

화성에는 모두 네 곳에 각루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북수문인 화홍문과 용연을 바라보고 있는 동북각루이다.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하여 화성이 시설물 중 가장 아름답게 지어졌다. 방화수류정은 별도로 보물로 지정이 될 만큼 아름답다. 또 하나는 용도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서남각루로, ‘화양루’라고도 부른다.

 

서북각루는 가을 철 화성의 억새를 바라보기에 가장 좋은, 화서문의 남쪽 145보 정도 거리에 산 위로 성이 휘어져 굽어 오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각루들은 모두 정자와 같은 형태로 지어져, 나름의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누(樓)’란 다락처럼 층이 지게 꾸민 것이니, 이름 하나를 지으면서도 세심하게 배려를 한 것을 알 수 있다.

 

 

화성은 단순한 성이 아닌, 정조의 강한 왕권을 상징

 

정조대왕의 효심이야 이미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어린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임을 목격한 정조로서는, 아버지에 대한 효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도세자의 묘를 정조 13년인 1789년에 양주 배봉산 밑(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경내)에서 이곳 화산(현 화성 융능)으로 옮겨 왔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능을 자주 참배하여 효성을 다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에 인근 부자들을 이주해 살게 하고, 친위 무력기반이었던 장용외영(壯勇外營)이라는 정예 군대를 배치했다. 당시 장용외영은 실로 막강한 당대 최고의 무사들이었다. 그 무사들이 47,000여명이나 되는 병력이 화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정조가 화성에 많은 신경을 쓴 것은, 노론벽파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양을 벗어나 강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실제로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많은 정사를 처리하였으며, 모친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대대적으로 행궁에서 펼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또한 능 행차 시에 화성 행궁에서 머물며 과거시험을 치룬 것을 보아도,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다.

 

동남각루에 보이는 정조의 애민(愛民) 정신

 

동남각루는 화성 내에 있는 군사시설물이다. 높은 곳에 세워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이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동남각루와 마주하며 남수문을 보호하던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서 훼파가 된 뒤 복원을 하지 못하였다. 동남각루가 짝을 잃은 채, 복원이 된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단지 화성의 군사 시설물 중 하나인 동남각루를 보고, 어떻게 정조의 애민정신을 알아낼 수가 있을까? 동남각루는 중층 누각으로 마련하였다. 정면과 측면 두 칸으로 마련한 동남각루는,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도깨비 그림을 그려 위엄을 더했다. 한편으로 계단을 놓아 위로 오르게 하고, 밑으로는 삼면을 막고 한편에 문을 달아냈다.

 

그리고 서편으로 연도를 뽑아 굴뚝을 내었으며, 동편에는 이궁이가 보인다. 바로 이 동남각루의 아래층에 온돌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병사들이 겨울에도 춥지 않게 하기위하여 온돌방을 드린 것이다. 화성이 시설물들을 보면 이렇게 온돌을 놓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심한 것 하나에도 신경을 써서 성의 시설물을 조성하였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시설물 하나하나를 돌아보는 것은, 그 안에는 단순히 성으로서의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심과 강한 왕권을 위한 노력, 그리고 부강한 나라의 건설과 애민정신 등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시설물인 동남각루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까닭이기도 하다.

 

올 6월 복원이 된 남수문. 그 옆에는 끊어진 채, 화성의 연결이 멎은 곳이 있다. 바로 화성 중에서 훼손이 되었던 구간이다. 지금은 예전 남수문에서 팔달문까지 연결이 된 부분에는 상가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이 상가들이 앉은 자리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그리고 팔달문의 양편에 적대가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화성 겉돌기 그 10번째 구간은 참으로 마음 아픈 구간이다. 팔달문 양편으로 아직도 끊어진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구간이 이어지겠지만, 이 끊어진 구간은 참으로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화성 겉돌기, 남수문에서 팔달산으로 오르는 길에 만나는 남치까지 돌아본다.

 

 

 

일제는 왜 팔달문 일대를 파괴했을까?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 중인 헤르만 산더가 1907년에 찍은 사진에는, 남수문에서 팔달문으로 가는 성곽의 돌출된 치성 위에 축조한 남공심돈이 보인다. 그리고 팔달문 양편에는 적대가 있었다. 적대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성 양편에 있었던 치성위에 축조한 포를 쏘는 구조물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남암문도 팔달문 동쪽 약 95미터 되는 곳에 있었다. 암문은 후미진 곳에 설치해 비상시에 적의 후미를 공격하는 병사들이 출입을 하거나 식량 등을 나르는 비상문이었다. 암문은 성벽에다 돌로 무지개 문을 설치하였는데, 제도는 정문과 같으나 약간 작게 하였다고 한다.

 

 

 

 

남암문이 완성된 것이 을묘년인 1795년 2월 23일인데, 화성의 다섯 개의 암문 가운데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다. 문의 너비도 다섯 암문 중에서 가장 넓었는데, 옛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암문은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屍柩門)’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상여가 통과할 만큼의 너비와 크기를 축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남암문과 남공심돈, 그리고 팔달문 양편의 적대가 사라진 것이다.

 

언제인가 화성 답사를 할 때, 팔달문 인근에 오래 사셨다는 어르신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팔달문 양편의 성곽 일부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동문으로 백두대간과 연결된 광교산의 지기가 흘러들어, 성곽을 타고 팔달문을 거쳐 팔달산으로 지기가 오르면 수원에서 큰 인물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국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처럼 팔달문 양편의 성곽을 허물어, 수원에 큰 인물이 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한 소리이긴 하지만, 유독 이 곳만 성벽을 허물었으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끊어진 성곽, 마음이 아파

 

화성은 이 구간만 빼고는 거의 복원을 마쳤다. 올해 남수문을 복원하면서 서남각루 아래서 끊어졌던 성곽이 남수문을 지나 연결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팔달문은 양편 성곽을 잃어버려, 마치 양팔을 잃은 체 외롭게 서 있는 것처럼 쓸쓸해 보인다. 서편으로도 잘려진 성벽이 미쳐 잇지 못한 체, 팔달산으로 오르는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10월 11일 오후에 돌아본 끊어진 팔달문과, 사라진 남공심돈, 남암문, 팔달문 양편의 적대. 그 모든 것이 언제나 제대로 연결이 되어, 완전한 화성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인지. 돌아보면서도 내내 마음이 아프다.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가시지 않은 아픔이다.

 

팔달문은 지금 한창 보수 공사 중이다. 팔달문을 바라보고 길을 건넌다. 그리고 팔달산 쪽으로 다가선다. 그곳에서 미쳐 연결을 하지 못한 성곽이 잔뜩 움츠리고 있다. 언제나 저 팔달문과 맞닿을 수 있으려는지. 성벽을 따라 천천히 팔달산을 오른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남치.

 

 

 

 

그런데 이곳은 여장의 간격이 없다. 모두 연결을 시켜 만든 여장. 왜 유독 이 구간만 이렇게 여장의 사이를 떼지 않고 연결을 한 것일까? 그 여장과 성벽이 연결되는 부분에 꽃이 피어있다. 이곳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는 곳이다. 남치를 둘러보고 팔달산으로 치솟아 오르는 성벽을 바라본다.

 

이곳을 지나 남암문으로 나가는 용도를 따라가면, 화성 겉돌기는 끝이 난다. 성 밖으로 돌면서 살펴 본 화성 겉돌기. 난 이 화성 겉돌기를 하면서 또 다른 화성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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