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서둘러 길을 나섰다. 2013년의 첫 답사지역을 일부러 강원도 최북단이라는 고성군으로 정했다. 이곳에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곳이기에, 이번에는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이다. 5일 저녁 무렵 심하게 바람이 분다. 옷깃을 아무리 여미어도 살을 에일 듯 파고드는 바람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래도 나선 길이니 어찌하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 119번지에 소재한 대한불교 금강산 법보정사(주지 진관스님)라는 인법당을 모신 암자였다. 인법당이란 법당과 살림살이를 하는 요사가 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붙어있는 작은 법당을 말한다. 이곳에 아기장수의 전설이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준 아기장수 이야기

 

법보정사가 있는 뒤편 산을 노인봉이라고 부른다. 이 산은 강한 바람과 심한 경사로 나무들이 살지 못하고 벌거숭이 인데다가 돌바위가 영을 덮어 그 모양이 마치 늙은 노인의 머리처럼 보인다해서 노인산(老人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에 옛 절터라는 곳을 돌아보았다. 조선시대 초기에 불교 탄압으로 불타 없어졌다고 하는 절터에도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절터를 찾아 기도하며 소원성취 되기를 빌어 왔다고 하는데, 어느 해 이 마을에 사는 5대 독자인 노총각이 마흔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가 백일동안 노인산과 절터를 찾아 기도 끝에 어여쁜 아내를 만났다는 것.

 

 

 

마침 법보정사에는 이 마을에 사신다는 신도 한 분이 와 계셨다. 박기선(, 70) 할머니는 이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 중에 아기장수 이야기가 있는데, 한 번 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법보정사 건너 편 앞에 옛날에 절이 있었데요. 그곳을 마을에서는 절터라고 불러요. 그 절에서 자식이 없는 한 부부가 열심히 치성을 드려 아이를 하나 점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를 보니 양편 어깨 밑에 날개가 있었데요, 나중에 크면 큰 인물이 될 아이죠. 그런데 그 때는 그런 장수가 나면 바로 죽여 버렸다고 해요. 그래서 걱정을 하다가 아기장수의 아버지가 날개를 인두로 지져버렸다고 하네요. 아이가 뜨거우나 당연히 온 동네가 떠날 듯 울어 젖혔겠죠. 그때 화진포 바닷물 속에서 천마가 한 마리 튀어나오더니, 아기장수를 태우고 하늘로 승천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그 절이 퇴락해 버렸단다. 그리고 한 30여 년 전에 한 스님이 이곳이 들어와 토굴을 짓고 기도생활을 했는데, 이상하게 오래들 있지 못하고 자주 떠났다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이 절이 있는 인근의 지기가 상당히 세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이 땅에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

 

 

전설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법보정사 뒤편에 보면 산신각 터라고 시멘으로 조성을 해 놓은 곳이 있어요. 그 뒤로는 쪼개진 바위덩어리가 있고요. 이 마을분들 중 많은 분들이 그곳을 올라가면 괜히 넘어지고는 한답니다. 그래서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질 않아요.”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보고 그 뒤편 노인봉과 일직선으로 자리한 산신각 터를 돌아본다. 이곳에 옛날에 산신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세를 보아도 대충은 짐작이 간다. 노인봉을 배산으로 하고 지어진 산신각. 그 산신각이 바라다보는 곳은 동해안 화진포 방향에 솟아있는 고성산이라고 부른다.

 

 

날개를 가진 아기장수가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으로 인해 태어났다는 현내면 산학리. 이곳은 금강산으로 왕래를 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치던 곳이다. 이 산학리 논 자락에 서 있는 커다란 노송 한 그루와 불망비 1석이 있어, 옛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소나무와 불망비의 이야기는 다음편에)

 

전설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전설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곳 노인봉 아래 옛 절터와 산신각터, 그리고 현 법보정사를 돌아보면서, 이곳에는 아기장수 이야기 외에도 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할 것만 같아 쉽게 길을 떠나지 못한다. 숨은 이야기들은 늘 신비롭기 때문이지만.

전북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 456-1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2호인 이웅재 고가가 자리하고 있다. ‘아이패드2’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6월 7일 오후 6시가 다 되어서 찾아간 집이다.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의 16대 선조이며 마을의 전주이씨 향조이기도 한, 춘성전 이담손(1490년생)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처음으로 이 집을 지은 것은 연산군 6년인 1500년경에 지었으니, 벌써 500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고택이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장방형으로 구성된 대지는 북에서 남으로 비탈져 있어서, 군데군데에 축대를 동남향으로 쌓고 그 기단 위에 집을 앉혔다.


대문과 효자정려. 이 사진은 모두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하였다.

대문 위에 걸린 효자 정문

밖에서 보기에도 집은 넓지 않은 터에 오밀조밀하게 건물들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솟을삼문으로 구성된 대문은 이 집의 품위를 나타내는 듯하다. 조선시대 지방 사대부가의 일면을 알아 볼 수 있는 이웅재 고가는, 대문 위에 효자현판이 걸려있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이문주에게 내려진 이 현판에는, 「有明朝 孝子贈 通政大夫 吏曹參議 李文胄之閭」라고 적혀있다.

문간채도 이 무렵에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며 가운데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안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집안은 공사 중인지 여기저기 자재들이 널려있고,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린다. 대문을 들어서면 5단의 장대석 축대 위에 올린 사랑채가 보인다.




 

안 행랑채 동편에 일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상량문에 의하면 1864년에 세워졌다. 기록에는 고종 1년인 1864년에 기둥에 보를 얹고, 그 위에 마룻대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사사랑채는 동편으로 두 칸 마루를 놓고, 서쪽으로는 두 칸 방을 드렸다.

방의 앞으로는 툇마루를 빼 난간을 둘렀으며,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쓰임새가 있게 지어진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안채와 안담으로 연결이 되어있으며, 뒤편으로는 안채를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을 내어 놓았다. 그 뒤편으로는 높게 축대를 쌓고 지은 사당이 있다. 사랑채의 서쪽으로는 높임마루를 놓아 책방을 꾸민 안 행랑채가 자리한다.



양편에 날개를 단 안채 공루가 특이 해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동서 양측에 날개를 달아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는 기단을 높이고 그 위에 앉혔으며, 날개채는 단을 낮게 놓았다. 하기에 날개채의 지붕은 안채의 지붕보다 낮게 조성이 되었다. 안채는 큰방의 동측에 머리방 대신 도장을 설치하고, 도장 남측에 마루를 두고 이어서 방을 드렸다.

안채 대청을 바라보면서 우측날개에도 방을 따로 두고 있다. 상부는 외부를 판벽으로 두른 공루이고, 하부는 아궁이를 둔 공간을 배치하였다. 큰방의 서쪽에는 찬방을 두어 부엌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현재는 실내의 공간은 조금 바뀐 듯하다. 이러한 가옥의 배치나 구성은 딴 집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경우이다.




안채 전면에는 ㄷ자형의 안 행랑채가 날개를 벌려 안채를 감싸고 있다. 이는 방아실, 안변소, 안광, 책방 등으로 구성되었다. 다만 방아실과 안광이나 책방 등은 사이가 떨어져 있다. 이러한 건물의 배치는 풍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안채로 불어드는 바람을 막지 않기 위함인가 보다. 방아실의 벽을 타고 바람이 안으로 불어들게 조성하였다.

넓지 않은 대지를 이용해 건물배치를 한 이웅재 고가. 나름대로 건물배치의 미학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사를 하느라 조금은 산란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독창적인 가옥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공사가 마무리 되는 시기에, 제대로 된 답사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비의 받침돌인 귀부는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고려 초기의 귀부를 보면 대개 몸은 거북이로 되어있으나, 머리는 용머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욱 이 용의 형상은 다양하게 표현이 되고 있으며, 이런 다양한 형태의 귀두로 인해 조금은 특이한 형태의 귀부가 제작되어진다.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에 소재한 연곡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소재한다. 그 중 국보인 동부도 곁에 서 있는 동부도비는 보물 제15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비는 비문인 몸돌은 없고, 뿔이 없는 용을 새겨 넣은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다. 비문의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귀부와 이수로 보아서 일반적인 비에 비해 작은 편이다.


특이한 형태의 동부도비

연곡사 동부도비는 일반적으로 보아 온 비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와는 많이 다르다. 왜 달라 보이는 것일까? 주변을 찬찬히 돌아본다. 그런데 정말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보인다. 거북이의 등에 거북의 문갑대신 무엇인가가 덮고 있다. 좌우를 살펴보니 날개다. 어째서 날개가 거북이의 등을 덥고 있는 것일까?

비와 귀부의 연결부분에는 구름과 연꽃을 조각하였다. 거북이의 머리도 용의 형체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귀부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면이 있다.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고려 초기의 귀부와 귀두에 비해, 조금은 용의 모습을 형상화한 간략한 모습이다. 용머리의 코와 입 주면이 훼손이 된 듯하다.


몸돌인 비는 사라지고 받침돌인 귀부(위)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머리 부분에는 가운데 뒤로 젖혀 뿔이 있었을 듯한데, 이것도 훼손이 된 듯 밋밋하게 표현이 되었다. 고려 초기에 보이는 용머리의 볼에는 지느러미와 같은 날개를 편 듯한 조각이 넓게 퍼지는 것이 보통인데, 너무 적어 조악한 느낌마저 든다.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귀부는 무엇인가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날개를 달고 있는 거북모양인 귀부

앞발은 발톱을 세워 땅을 움켜잡듯 조각이 되었다. 등에 조각한 날개는 중앙부분이 움푹 들어가고 양편이 굴곡지게 조각을 하였다. 그리고 날개에는 선이 그어지고, 위쪽으로는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이 귀부의 등에 왜 이런 날개를 조각했을까 하는 점이다.


머리는 일반적인 귀두보다 조악하여 발톱은 무엇인가를 움켜잡으려는 듯 힘이 있다.

이수의 중앙에는 이 비가 누구 것인지를 알리는 글을 판다. 그런데 이 동부도비의 이수에는 네모난 글자를 파는 곳만 만들어 놓고, 글자가 보이지를 않는다. 누구의 비인지 알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이수에는 용을 조각해 놓는다. 그러나 동부도비의 이수에는 용이 보이지가 않는다. 구름무늬만을 조각해 놓아 단조롭기만 하다.

고려 초기의 비로 추정되는 연곡사 동부도비. 꼭대기에는 불꽃에 휩싸인 연꽃몽우리와 같은 보주를 올려놓았다. 설명에는 이 동부도비가 일반적인 비에 뒤떨어진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특별한 감이 있다. 도대체 귀부의 등에 조각한 날개는 무엇일까? 혹 동부도에서 보이는 비천인상을 극락조인 가르빙가로 새겨 넣었는데, 그것과 연결이 되는 것은 아닐까?


받침돌인 귀부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연곡사 동부도 앞에 서 있는 동부도비에서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내 얕은 지식이 화가 나서이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볼 수 없었음을 탓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 답이 얻어지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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