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이층에 길게 내려트린 현수막이 없었다면, 그저 겉으로 보기에 이 집을 과연 갤러리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은 지가 50년이 지난 2층 슬래브 집. 이곳이 문화공간 일파라는 갤러리이다. 이곳에서는 828일부터 1031일까지 이층 갤러리에서 행궁마을 사라진 집 살아난 집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30() 오후 화성박물관을 들렸다가 만난 일파 김충영 씨. 그동안 공직생활에 몸담아 오다가 퇴직을 하고, 지금은 수원 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김충영 씨는 2006 ~ 화성사업소장, 2009 ~ 건설교통국장, 2010 ~ 수원시 팔달구청장을 지낸바 있다. 화성사업소장을 하면서 영원히 화성과 함께 살겠다고 작심을 한 사람이다.

 

 

칠도 안한 문화공간 일파

 

일파 김충영입니다. 저와 화성과의 인연은 참으로 우연이자 필연인 듯합니다. 199712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통과되었다는 낭보가 날아왔을 당시 저는 수원서 도로과장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리를 스쳤던 생각은 과연 수원이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부랴부랴 한 바퀴 돌아본 것이 계기가 되어 화성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뜻 맞는 이들이 모여 화성연구회를 결성하였습니다. 그간 화성의 변화를 눈으로 지며보면서 틈틈이 모아 온 사진자료 가운데 일부를 선보입니다.(하략)“

 

팸플릿의 인사말이다. 생태교통 수원2013에 맞추어 문화공간 일파에 기획전으로 열린 행궁동 사라진 집, 살아난 집은 수원화성의 변화를 오롯이 담고 있다. 문화공간 일파는 1963년에 건축이 된 집이다. 꼭 반세기의 역사를 담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예전에는 1층은 가발공장이, 2층은 여공들의 기숙사와 여관으로 이용을 했다고 한다.

 

 

수원 화성박물관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그 동안 몇 차례 주인이 바뀌었으며, 황량한 빈집으로 남아 있던 것을 이번에 매향동 레지던시 공간으로 변화를 했다. 1층에는 목공예와 도예작가가 입주를 하였으며, 2층은 갤러리로 꾸몄다. 칠도 하지 않은 체 그대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 자체가 살아있는 반세기의 역사이다.

 

방만 14개인데 어떻게 꾸몄을까?

 

처음 이 집을 들어왔을 때는 온통 쓰레기더미였어요. 그것을 치우고 이렇게 전시공간으로 꾸민 것이죠. 평생을 화성과 함께 살고 싶어서 이 집을 마련했어요. 그래도 이제는 버젓이 이렇게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죠.”

 

사실 이 집을 구입할 때는 화성 곁에서 평생을 살고 싶었다고 한다. 1층은 작가들의 공방으로 내어주고, 2층은 전시실로, 그리고 3층에 20여 평 정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화성박물관 바로 옆에 팔달구청 청사가 들어온다고 발표가 되자, 이 집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 마디로 배 밭에선 갓끈을 고치지 말고, 참외밭에선 신발끈을 묶지마라.’는 옛 속담대로 일이 꼬여버린 것이다. 계획도 없을 때 사 놓은 집이, 당시 재직하던 자리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숱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죠. 그래서 그동안 모은 자료를 정리해서 이렇게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화성의 역사를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구분하였습니다. 이럴 때는 방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방문 앞에는 문패가 하나씩 붙어있다. ‘광장을 짓다’, ‘광장아래 사라진 집들’, ‘광장의 태동’, ‘수원화성이 살아온 길등의 분류로 방마다 달리 전시가 되어 있다. 물론 전시의 주테마는 수원화성이다. 그동안 사진자료에서나 보아왔던 일제강점기의 화성 사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변화를 한곳에서 볼 수 있다.

 

 

기록은 재산이다’. 일파 갤러리를 돌다가 보면 그런 말이 생각이 난다. 과거의 수원의 기록이 시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옆에는 작은 설명까지 일일이 달아놓았다. 처음으로 접하는 사람들도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1031일까지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문을 여는 일파 갤러리의 사라진 집, 살아난 집전시. 한 사람의 집념이 일구어 낸 수많은 자료들. 기록문화에 약했던 우리역사를, 이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가 있다.

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3인 김주송은 돌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현재 수원 효원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주송은, 그렇게 화성을 돌아보면서 화성의 돌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화성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제는 그렇게 화성의 돌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얻었다.

 

자식들은 부모님을 따라 배운다. 주송이의 부친인 김충영은 현재 수원시 환경국장이다. 도시공학박사이기도 한 김충영은 1979년부터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화성사업소장과 팔달구청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김주송은 이런 아버지와 함께 늘 화성을 돌아보았고, 이제는 누구보다 화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성을 바라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화성을 돌아본 김주송은, 전국의 문화유산도 상당히 답사를 하였다. 또한 우리 역사와 관련되는 해외의 문화유산까지도 돌아보았다. 그렇게 휴일만 되면 “주송아 일어나라 화성가자!‘는 아버지의 부름에, 대동여지도를 따라 걷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수원에서 조암까지 걸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주송이는 화성을 늘 가까이 했다. 그동안 화성을 찍은 사진만도 수천 장에 이른단다. 그러나 막상책을 내려고 하니, 마땅한 사진이 없어 다시 화성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그런 주송이는 현재 고3이다. 얼마 안 있으면 수능을 치러야 할 학생이 화성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주변에서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설마 고3짜리가 책을 써

 

수원의 언론들은 다투어 김주송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책을 펴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정작 주송이가 바라다본 화성, 그리고 들려주는 화성의 이야기들의 속내의 깊이는 알기가 어렵다. 그 길고 긴 시간 때로는 아버지를 따르는 것이 싫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주송이가 책까지 내기까지에는 아무도 모르는 깊은 속내가 있었으리라 본다.

 

주송이는 제1장 ‘성벽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에서 이미 성을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성벽의 기울기는 왜일까?’를 질문으로 던져 놓고 그 해답을 얻어냈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에서 성돌을 떼어내는 방법인 ‘야질’에 대해서도 설명을 한다. 그리고 성벽이 곧바르지 않고 구불거리는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펼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쓴 책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제3장 화성을 다시보다. 제4장 화성 건설 현장 속으로, 제5장 부록 편을 읽어보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는지 알 수가 있다.

 

 

고3 다운 발상에 웃다

 

책을 펼쳐보면 놓을 수가 없다. 그만큼 주송이는 이 책에서 우리가 몰랐던 화성의 구석구석을 이야기를 한다. 축성을 한 돌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주송이는 이 대목에서 ‘학생답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꿈 많은 학생이 일궈내는 이야기 하나하나는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든다. ‘젊은 꿈’ 만이 느끼고 찾아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벽의 쌓은 돌을 소싸움, 염소싸움에 비유하기도 하고, 조각보 같다고도 표현을 했다, 그저 표현을 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들어 온 부모님들이나 주변의 어르신들의 말씀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주송이의 표현은 재미있다. ‘혀를 날름 내민 메롱 돌’, ‘테트리스 게임 돌’, ‘아리랑 혹은 바람개바 돌’. ‘대장을 감싸고 보호하라’, ‘애기돌도 역할을 하도록 만들자’ 등 그만이 바라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아마 당분간은 이 책으로 인해 화성이 달라 보일 듯하다. 나 역시 화성에 대한 기사를 쓰고는 했지만, 오늘 고 3짜리 김주송에게 한 수 배운다. 앞으로 이 책을 들고 주송이가 찾아낸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들어보아야겠다.

 

지은이 : 김주송

감 수 : 김충영

발 간 : 2012년 7월 25일 초판발행

가 격 : 10,000원

펴낸곳 : 한라애드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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