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에 소재한,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6호인 팔괘정.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이 팔괘정은 송시열 선생이 율곡선생을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진다.

 

스승과 가까이 하고 싶어 지은 팔괘정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이 강경 황산리 금강가에 임이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서 있고 싶어서 정자를 지었다. 임이정과 불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팔괘정은 그 모습도 임이정과 닮았다. 팔괘정은 금강을 바라다보는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은 동일한 간격으로 그중 두 칸은 넓은 대청을 만들고, 한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초익공식과 동일한 구성의 공포를 짜 올린 팔괘정. 창방 위에는 기둥사이마다 다섯 개의 소로 받침을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팔괘정은, 한식 가옥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옛 모습을 그려보다.

 

송시열은 선조 40년인 1607년에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계 김장생이 강경 황산에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송시열이 팔괘정을 지은 때를 인조시대로 보는 이유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임이정과 팔괘정은 크기나 모습이 흡사하다.

 

당시 황산은 김장생과 송시열이라는 두 거목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두 정자 사이에는 조금 아래서 내려서 죽림서원이 있었으니, 날마다 금강가에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을 것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글을 읽으며 세상을 논하고, 시 한수를 지어 어딘가에 적지 않았을까? 팔괘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마 당시 이곳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그 자리에 끼는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았을까? 무심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팔괘정 앞을 날아간다.

 

바위벽에 남긴 흔적

 

팔괘정 옆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있다. 예전 이 팔괘정을 세운 송시열은 이 바위를 바라다보며 나라를 위한 충정의 굳은 의지를 키웠을 것이다. 바위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청초암(靑草岩)'과 ‘몽괘벽(夢掛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젊음의 기상을 떨치고, 꿈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마음에 새기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금강을 한가롭게 유영하는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아마 멀리 북녘까지 날아갈 차비라도 하려는가 보다. 저녁 햇볕이 저만큼 강물에 길게 붉은 띠를 두른다. 이런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이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했을 선생의 마음이 그려진다. 봄날 이는 황사바람 한 점이 스치고 지나간다. 정자 옆 바위는 미동도 없다. 그것이 팔괘정을 지은 선생의 마음일까?

‘강경 포구에는 개들도 생선 한 마리씩 물고 다녔다’

 

강경은 예부터 조운이 발달되었던 곳이다. 강경은 현재도 유명한 젓갈시장이 선다. 사람들은 ‘젓갈하면 강경’이라는 말을 한다. 그만큼 강경은 금강 가의 포구로 유명한 곳이다. 한 때는 강경은 현재의 논산보다 더 큰 상업의 중심지였다. 금강 가의 나루에는 색주가가 즐비했는데, 성황리에는 100여개가 되었다고 전한다.

 

 

김장생이 지은 정자

 

강경에서 금강을 건너 부여와 서천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 곳 다리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조금 들어가면 서원이 있고, 서원의 우측 낮은 산 중턱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95번지에 소재한 임이정은, 지금은 계단을 정비하고 들어가는 길에 대나무를 심어 놓았다. 임이정은 김장생의 『임이정기』에 의하면 시경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 것같이 하라(如臨深淵, 如履薄氷)」는 구절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이 말은 즉 자신의 처지와 행동거지에 신중을 기하라는 증자의 글에서 나온 말이다. 원래 임이정은 ‘황산정’이었다. 임이정은 김장생이 이 정자를 짓고,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기 위해서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어졌으며, 왼쪽 두 칸은 마루방이고 오른쪽 한 칸은 온돌방을 놓았다.

 

 

화려하지 않으나 기품을 유지해

 

정자에 오르니 금강이 아래로 흘러간다. 서향으로 지어진 정자는 정면 세 칸의 기둥사이를 동일하게 조성하였다. 온돌방 앞에는 반 칸을 안으로 들여 위는 누마루로 깔고, 아래는 아궁이를 두었다.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기둥머리를 배치하였다. 충남 유형문화재 제67호인 임이정.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정자이지만, 그 안에 품은 뜻이 컸을 것이란 생각이다.

 

정자의 앞쪽에는 보호각 안에 세운 임이정기가 있다. 머릿돌을 올린 비석은 고종 12년인 1875년 김상현이 글을 짓고, 김영목이 글을 썼다고 한다. 정자 주변에는 보호철책을 둘러놓았으며, 주변에 큰 석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정자 외에도 가른 건축물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낙향하여 지은 정자 임이정

 

사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김장생이 인조 9년인 1631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임이정을 짓고 난 뒤 6년 뒤 일이다. 김장생은 1625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라, 다음해 벼슬에서 물러나 행호군의 산직으로 낙향하였다. 낙향 후 황산서원을 세우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그 뒤 1630년에는 가의대부가 되었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줄곧 머물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사계 김장생이 ‘계축옥사’ 때 동생이 이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어 심문을 받았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온 뒤, 곧 관직을 사퇴하고 다시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이 때 임이정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금강가 높지 않은 곳에 자리를 한 임이정.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서 세운 임이정이 화려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를 살얼음을 밟듯이 세상을 조신하게 살라는 김장생의 뜻이 배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황사 바람이 드센 날 찾은 임이정. 앞을 흐르는 금강은 언제나 말이 없다.

대전 동구 가양동 65번지에는 우암사적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적공원 안에는 우암 송시열과 관계되는 건물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조선시대 건축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이 사적공원의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솟을대문이 보인다. 이 솟을대문 안에는 기국정과 남간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남간정사는 낮은 야산 기슭의 숲이 우거진 골짜기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간정사 앞으로는 남간사가 자리하고, 뒤편으로는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1607 ~ 1689) 선생이 후학들에게 강학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우암 선생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는데,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첫째가는 제자이다.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호인 남간정사

우리나라 정원사에 멋스러움을 이룩한 남간정사

우암 선생은 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선생이 동구 소제에 살고 있는 동안 흥농촌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남간정사는 선생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곳이기도 하지만, 선생의 학문을 완성시킨 곳으로 치기도 한다.

이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작지붕이다. 남간정사는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 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남간정사는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남간정사는 마루 밑으로 물을 흘려 연못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지금은 물길을 막아버리고 구멍만 남았다.
 
용과 닮은 괴이한 나무 한 그루

남간정사를 찾아갔으나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안을 기웃거려 보지만, 들어갈 방도가 없다. 정사 밑으로 난 물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으려나 했지만, 물구멍만 남겨놓고 축대로 막아버렸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밖에서만 빙빙 돌 수밖에. 돌다가보니 대문 앞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누워있는 형상이 보인다.

수령이 꽤 되었을 것만 같은 나무 한 그루. 대문을 막아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나무를 찍으려고 나무 옆으로 돌아갔는데, 이게 웬일인가? 흡사 한 마리 용이 비천을 하려고 날아오를 듯한 모습이다. 어떻게 그 오랜 세월 이렇게 불편하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남간정사를 지키고 있는 용과 같아 보인다.

뒤편에서 보면 꼭 용과 같이 생겼다.


남간정사 출입문 앞에있는 나무는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형상이다.
 
나무줄기에 돌출된 옹이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고. 누워있는 나무줄기의 한편이 뒤에서 보면 마치 용틀임을 하면서 승천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남간정사도 우리 정원의 조경에 독특한 구성이지만, 이 나무로 인해 남간정사의 멋스러움이 한결 더해진 듯하다. 답사를 하면서 많은 정자와 가옥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집과 나무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은 처음인 것만 같다. 이 나무 한 그루로 인해 답사 길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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