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149-1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470호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화성 전곡리의 물푸레나무는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웅지마을 뒤편 산 밑에 위치한, 수령 350여년 추정의 노거수이다. 나무의 수고는 약 20m, 가슴높이 줄기의 둘레는 4.68m로, 물푸레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매우 크며 수형이 아름다운 노거수이다.

 

물푸레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자라는 키가 큰 나무로, 목재의 재질이 단단하여 괭이자루 등 각종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의 용도로 널리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무껍질은 건위제나 소염제 등의 한방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큰 키로 자라는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는 대부분 작은 나무만 볼 수 있다.

 

 사진 위는 11월 22일의 물푸레나무, 아래는 문화재청 자료로 잎이 무성한 모습의 물푸레나무 

 

마을에서 신목으로 섬기던 나무

 

11월 22일 오전, 모처럼 답사를 떠났다. 그동안 수원시 팔달구 지동의 마을지를 쓰느라, 거의 한 달여를 답사다운 답사를 하지 못했는데 모처럼 길을 나선 것이다. 화성으로 들어서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바로 물푸레나무이다.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저수지를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산 중턱에 잎을 다 떨군 물푸레나무가 보인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마을 주민들이, 이 나무 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동제와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이 나무를 신성시하고 있으며, 이 나무를 해하면 마을에 불상사가 일어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의 신앙적 대상이 되어 온 나무로 문화적 가치가 높은 나무이다.

 

 커다란 구멍이 뚫려 속이 비어있는 나무의 밑동

 

나무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마을 주민들이 눈여겨본다. 아마 나무라도 어찌할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한참이나 살펴보더니, 사진만 찍고 있다는 것은 것을 알고 안심을 했는가보다. 대개 마을에서 신목으로 삼아 섬기는 나무를 조사할 때는, 유난히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 주민들의 눈총 때문이다.

 

속빈 줄기 안에 또 작은 가지가 자라고 있어

 

수령이 350년이 넘어서인가, 나무는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아래 밑동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 있다. 거의 밑동의 반 이상이나 속이 비어있다. 이런 것을 보면 상당히 마음이 아프다. 나무도 수명이 있으니 언젠가는 수령을 다 채워 스러지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이런 아픈 상처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륜을 느끼게 만드는 표피

 

나무 주변에는 굵은 동아줄을 쳐 놓았다. 안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 싶은 차에, 마침 한 편 줄이 늘어진 것이 보인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 나무의 형태를 살펴본다. 350년 세월을 그 자리에 서서 마을 주민들의 서원을 들어주었을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새삼 그 위용에 압도를 당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들을 일부러 가을이 지난 후에 찾아보기도 한다. 여름에는 잎이 무성해 그 줄기나 속을 일일이 살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무의 한편에 이상한 것이 있다. 텅 빈 안으로 속이 들여다보이는데, 그 안에 무슨 뿌리 같은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안에 줄기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것이 자라고 있다.

 

 원줄기의 빈속에 또 다른 가지인 듯도 하고 뿌리 같기도 한 나무가 보인다 (붉은 원안)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나무의 원줄기 안에 또 다른 줄기가 자라고 있는 듯하다. 그 동안 수많은 노거수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마도 이 물푸레나무가 그 원 즐기 속에 또 다른 나무 하나를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나무가 자식을 그 줄기 안에서 키우고 있는 것일까? 마치 새끼를 밴 듯한 놀라운 모습이다.

 

한참이나 그 속이 곳을 바라다보면서 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런 기이할 때가 또 있을까? 내년 여름에 이 나무의 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 때는 뱃속에 든 것이 줄기인지 뿌리인지 확실하게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마을 분들도 만나 뵙고 나무에 얽힌 사연도 알아보고.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번지에는 가야 제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산청은 원래 돌이 많은 곳이다. 산청에서 나오는 수석을 제일로 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 돌무덤은 그동안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두 사지 설이 분분했던 곳이다. 이곳을 석탑으로 보는 이유는 층계로 되어 있고, 그 중간에 감실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또 하나 왕릉으로 보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어서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산청의 구형왕릉 무덤과(위) 구형왕릉 입구 정경


한 유생에 의해 확인된 구형왕릉

이 외에도 여러가지 기록에 의하여 이 돌무더기를 왕릉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조선조 정조 11년인 1798년 이 왕산사기를 읽은 산청유생 민경원이, 마을 사람들과 같이 왕산 기슭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하산하던 중, 비를 만나 왕산사로 비를 피해 들어갔다가 나무상자 속에서 왕산사기 수정암기와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 녹슨 칼, 좀이 먹은 비단 옷, 활 등이 있어, 이 돌무덤이 수형왕릉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능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묵는 호능각을 들어가는 일각문과(위) 호능각


잡석을 이용해 쌓은 구형왕릉

현재 사적 제2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구형왕릉은 일반적인 봉토무덤이 아니다. 산청에서 많이 나는 돌을 이용해 비탈에 층단을 이용해 조성하였다. 석조무덤의 전체 높이는 7.15m로 비탈에 층단을 쌓고, 그 위에 둥글게 석조 봉분을 올린 형태이다.

이 구형왕의 릉 위로는 새가 날지 못하며, 나무뿌리와 심지어는 칡넝쿨도 뻗지 못한다고 한다. 8월 13일에 찾아간 구형왕릉. 관람객 몇 사람이 능에서 나온다. 능의 입구는 홍살문으로 하고 중간에 솟을삼문을 내었다. 그러나 그곳보다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것이 더 운치가 있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귓전에 들으며 두 개의 무지개다리를 지나면, 왕능을 지키는 ‘호능각’이 있다. 일각문을 들어서면 누각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을 만난다.


능 앞에 서 있는 문무인석(반대쪽에도 서 있다)과 석비


잡석으로 쌓은 석조 능침 앞에는 ‘가락국 양왕릉’이라 새긴 비석과 양편에 문무인석, 그리고 상석과 장명등, 사자석이 있다. 이는 1957년과 1970년에 조성한 것이다. ‘양왕’이라는 이름은, 구형왕 12년 가락국 개국 491년 만에 신라의 침공을 받았을 때,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지 않고 나라를 선양한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능 중간에 위치한 감실, 구형왕이 쉬어갔을까?

능 앞으로 가니, 그곳에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다는 안내판이 놓여있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남들이 보거나 보지 않거나, 이런 것을 지키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능 중간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바로 커다란 돌을 이용해 만든 구멍이다. 이 구멍은 가로, 세로 40cm에 깊이가 68cm인 감실이라는 것이다.


잡석으로 비탈진 곳을 이용하여 층이지게 쌓은 구형왕능의 모습


이 감실의 용도는 신주를 모시거나, 등잔을 두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 등잔이 현재 능 앞에 조성된 장명등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을 후손들은 ‘양왕의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라 하여서 신성시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양왕의 능을 찾은 김유신이, 이곳에서 7년 동안이나 능침 곁에서 시능살이를 하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증조부인 양왕의 서글픈 죽음을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능 윗부분의 둥근 봉분과 중간에 나 있는 영혼이 쉬어간다는 감실


한 나라의 마지막 임금이 된 양왕. 그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으로 난 등산로를 오르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가 않는다. 역사 속의 아픔은 그렇게 세월 속에 묻히는 것인가 보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마을 안으로 들어갈 때가 있다. 마을에 옛 민속자료 등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 곳을 찾아서이다. 아직도 마을에서 지성으로 당제 등을 모시고 있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고 보면, 나로서는 그렇게 전해지는 우리 것이 고맙기 한이 없다.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는 그런 면에서는 정말 몇 개의 지정 문화재보다 더 값진 마을이란 생각이다.

무촌리는 조선시대 남상면의 서남쪽에 자리했던, 고천방에 있었던 ‘무촌역’을 중심으로 한 마을들이다. 그 인근을 ‘무촌역리’라 한데서 마을 이름이 생겼다. 예전에는 역이 있는 곳에는 파발마를 두고, 원 등을 두어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말을 바꿔타기도 하고 쉬기도 했다. 아마도 이 무촌리에 그런 역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는 것이다.


상매마을 입구에 있는 당산과 이야기를 들려준 마을주민들

네 곳의 당(堂)이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현재 무촌리는 상매 · 하매 · 무촌 · 인평 · 성지 · 지하 등 여섯 개의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행정리이다. 길가에 있는 무촌마을에서 연수사 방향으로 내를 건어 들어가다가 보면 ‘하매’마을이 있고, 그 안으로 ‘상매’마을이 나온다. 매산이란 이름은 이곳이 ‘매화낙지형’의 명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도로변 우측에 자리하고 있는 상매마을.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네그루의 소나무가 탑을 에워 쌓듯 길가에 서 있다. 누석탑으로 쌓은 이 탑에서 내를 건너면 바위 암벽 위에 또 하나의 돌탑이 있다. 소나무 밑에 있는 탑은 ‘아들탑’이고 내를 건너 바위 위에 올린 탑은 ‘며느리탑’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정자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다. 아직도 마을에서 당제를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예전과 같지는 않아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네 곳에 있는 당을 돌면서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마을 윗쪽에 있는 윗당산인 할아버지당과 할머니당

오랜 세월 전해진 전통, 그대로 남은 풍습

경남 거창군에는 아직 마을에 옛 풍습인 당제를 지내는 곳이 많이 남아있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새마을운동,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많은 곳이 마을에서 내려오는 풍습을 버렸는데도, 이곳은 옛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 분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본다. 혹 마을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상매마을에는 모두 네 곳에 당이 있다고 한다. 윗당산과 아랫당산으로 구분이 되는 네 곳의 당은, 마을 위편으로 올라가 암벽 밑으로 맑은 물이 마을로 흘러드는 곳에 할아버지 당이 있다. 그리고 마을이 끝나는 곳 산자락에 할머니당이 자리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큰 애기들이 키를 쓰고 뛰어다녔다는 내. 그러면 비가 왔다고...

당에는 모두 정월에 제를 지내면서 금줄을 처 놓아 쉽게 구분이 된다. 마을주민들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다.

“이 마을은 비가 안 오면 앞내에서 키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녔어”
“누가요?”
“마을 큰 애기들이”
“그러면 비가 왔나요?”
“하모. 오고말고.”

농사철에 가뭄이 들어 비가 오지 않으면 집집마다 밀가루를 걷어 빵을 한다는 것이다. 그 빵을 마을에 사는 큰 애기들에게 나누어주고 키를 하나씩 뒤집어쓰게 한단다. 그리고 마을 앞에 있는 내로 나가, 돌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비를 오라고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내를 바라보며 괜한 웃음을 짓는다. 그 광경이 떠올라서이다.


아랫당인 아들당과 내 건녀 암벽 위에 쌓은 며느리당

영험한 당산나무를 자르고 나더니...

무촌리의 무촌, 상매, 하매는 모두 정월보름날 자정을 기해서 당제를 올린다. 시간상으로는 열나흩날 밤이 되는 것이다. 상매마을에서는 먼저 할아버지당에서 제를 지낸 후, 할머니당을 거쳐 아랫당으로 내려온다는 것이다. 자정에 시작한 당제가 아랫당으로 오는 시간은 아침 6시경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음식을 새로 장만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아들당 주변에는 원래 소나무가 다섯 그루가 서 있었지"
“지금은 네그루뿐이던데요.”
“한 그루는 더 컸는데 그 당 옆에 있는 논 주인이 나무그늘이 생겨 농사가 잘 안된다고 잘라버렸어. 그러고 나서 두 부부가 이유도 없이 죽고 말았지.”

뫼를 지어 제를 올리고 난 뒤 한지에 싸아 돌틈에 넣어 놓은 뫼

마을주민들은 신령한 당산의 나무를 잘라서 벌을 받았는가보다고 이야기를 한다. 마을 입구와 뒤편을 에워 쌓고 있는 네 곳의 당산. 아들당에서는 그 자리에서 뫼를 지어, 제를 마치고나면 한지에 쌓아 탑 안에 넣어 놓는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에 아들당산의 탑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로 탑돌 틈 사이에 한지에 쌓은 것이 보인다.

아주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이 정성을 다해 모시는 있는 상매마을 당산제. 오늘도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한다.

“우리 마을에는 아직 한 번도 변고가 일어난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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