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향교나 서원은 예전 교육기관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을 가급적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내어 깊숙이 자리한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보았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향교나 서원은 꼭 문을 닫아 놓는 것일까? 그것도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한다. 또 어느 지역을 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개의 향교와 서원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꽁꽁 닫혀있는 향교, 연락처 하나 없어

출장을 가는 길에 문화재 한 점이라도 조사를 할 양으로, 일부러 금산으로 길을 잡았다. 대둔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이치재를 넘어서 바로 진산면이 된다.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355번지에 진산향교가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역시나’ 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이렇게 굳게 잠가놓을 것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남겨주던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일부러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까지 찾아들어 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여기 관리자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어디 연락을 할 수도 없다. 향교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러나 외형만 찍는 사진, 답답하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51년에 복원한 진산향교

현재 충남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진산향교는, 원래는 조선조 초기에 현 진산중학교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영조 51년인 17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6, 25 한국전쟁 째 훼손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보수하였다.



진산향교는 외삼문, 내삼문, 전교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그 뒤편에 마련한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진산향교는 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향교를 바라보면 맨 아래 쪽에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진산향교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명륜당 때문이다. 누각 형태로 지은 명륜당은 딴 곳의 전각과는 다르다. 비탈진 곳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어떻게 깔았는지 볼 수가 없지만, 누각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누마루의 형태로만 되어있는 듯하다. 누각은 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하였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정면과 후면을 세 칸의 판문을 달아냈다. 좌우에는 한 칸의 문을 내었으며, 양편으로는 풍판을 달아냈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진산향교. 밖에서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담장 밖에서 명륜당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살펴보고, 느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꽁꽁 닫힌 향교와 서원,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가슴까지 서늘하게 만들 만한 맑은 물이 암반 위로 흐른다. 물은 그렇게 돌바닥 위를 흐르면서 소리를 낸다. 마치 바닥의 암반이 차서, 얼른 피해가려는 듯 내리 구른다. 전남 곡성군 곡성읍 월봉리에 소재하고 있는 도림사 앞으로 흐르는 계곡. 도림사 계곡은 해발 735m의 동악산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줄기이다.

‘월봉계곡’이라고도 부르는 도림사 계곡은 동악계곡, 성출계곡과 더불어, 아홉 구비마다 펼쳐진 넓은 바위 위로 맑은 물줄기가 흐르면서 아름다운 정경을 연출한다. 마치 비단을 펼쳐놓은 듯하다는 도림사 계곡. 전라남도 기념물 제101호로 지정이 된 도림사 계곡은, 일 년 내내 물줄기가 그치는 않는 아름다운 계곡이다.



시인묵객들이 찾던 발길의 흔적

맑은 물은 쉴 새 없이 흘러 하류로 내려간다. 주변에는 늙은 노송들과 크고 작은 이름 없는 무명의 폭포들이 널려있다. 그저 바라다 만 보아도 좋다. 세세연년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왔던 수많은 시인묵객들. 풍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도림사 계곡은,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길이 1km 정도를 흐르는 도림사 계곡. 9개의 넓은 바위에는 선현들이 새겨 놓은 문구가 남아있어, 당시의 풍류를 느낄 수가 있다. 계곡 정상부근에는 신선이 쉬어간다고 전하는 높이 4m, 넓이 30평에 달하는 신선바위가 남아 있다고 한다. 흐르는 물줄기를 아래로 굽어보고 있는 ‘단심송(丹心松)’ 한 그루가 외롭게 보인다. 그러나 그 외로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암반 위를 흐르는 맑은 계곡물 소리 때문이다.



신라 무열왕 7년에 창건한 도림사에 오르다.

도림사는 신라 무열왕 7년인 66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을 한 절이다. 원효대사가 이곳에 절터를 잡을 때, 풍악소리가 온 산에 진동을 해 산 이름을 ‘동악’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도인들이 원효대사가 지은 절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기에, 절 이름을 ‘도림사(道林寺)’로 지었다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창건한 도림사는, 한강왕 2년인 876년에는 도선국사가 중창을 하였으며, 고려 때는 지환스님이, 1633년에는 영오선사 등이 중창에 참여를 했다. 도림사 경내로 발을 옮긴다. 일각문을 들어서니 넓지 않은 경내에 전각들이 오밀조밀하다. 보제루와 오도문을 지나면 보광전, 응진전, 명부전, 칠성각, 궁현당, 정현당, 설선당, 종각 등이 있다.



수석의 경치가 삼남제일이라는 곳

도림사의 중심 전각인 보광전을 오르는 계단 좌측에는 연리지가 있다. ‘사랑나무’라고 부르는 연리지는, 두 나무의 가지가 서로 합해지는 것을 말한다. 연리지는 양귀비 사후 50년이 지난 806년, ‘백거이’의 장한가에 인용이 되면서 남녀 간의 변함없는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칠월 칠일 장생전에서 깊은 밤 두 사람은 은밀한 약속을 하는데, 우리가 다시 하늘에서 만나면 비익조가 되고, 이승에서 만나면 연리지가 되세’ 라는 대목이다.



도림사를 돌아 나오면 다시 계곡의 물소리와 만난다. 들어갈 때와는 사뭇 다른 소리가 들린다. ‘수석(水石)의 풍경이 삼남에서 제일’이라고 하는 도림사 계곡이다. 그저 어딜 보아도 신선들이 유유자적 걸음을 옮길만한 경치이다. 8월 21일에 찾아간 곡성 도림사와 계곡. 더럽고 추한 사바세계가 아닌, 신선들이 살아가는 선경이 그곳에 있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세상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면, 많은 회상에 잠길 것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서 세상을 살았는가 정도는 정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반계서당’이다. 그곳을 오르면 절로 왜 사는가? 혹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산 128-7번지. 부안에서 곰소를 항해 30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우측 산 중턱에 집이 한 채 보인다. 우동리 마을로 접어들면 길가에 '반계선생 유적지'란 이정표가 보인다. 마을로 진입해서 들어가면 '반계서당'이라는 안내판이 길에 서있다. 안내판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저 멀리 서해 끄트머리가 보이는 곳에 반계서당이 자리한다.


『반계수록』을 집필한 반계서당

지금의 집이 당시 선생이 살던 집은 아닐 것이다.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로 지정 되어있는 이 터는, 조선조 효종과 현종 때 실학자로 활동한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이 일생동안 학문을 탐구하던 곳이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 한양을 떠나 여러 곳을 다니면서 학문에만 열중하던 반계선생은, 효종4년인 1653년 선조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 우동리로 이주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평생을 야인으로 살다 세상을 하직한 반계선생. 선생은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학문의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아오셨다. 조선후기의 수많은 실학자들이 반계선생의 학풍에 영향을 받았다. 반계서당에 몸을 의탁한 선생은 32세에서 49세까지 『반계수록』 스물여섯 권을 이곳에서 저술하셨다.




선생의 마음과 닮아 하늘 아래 걸린 반계서당

반계서당을 찾아 길을 오른다. 마을을 지나 흙길인 산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땀이나고 숨이 가빠오지만, 길이 꺾이는 곳마다 '반계서당'이라는 푯말이 있어 고맙다. 산길을 걸어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니, 저만큼 물이 빠진 서해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만큼 산 중턱에 반계서당이 보인다. 돌담을 쌓고 일각문을 내었다. 소나무 몇 그루가 주인 잃은 서당과 친구가 되었다.

일각문을 들어서기 전 잠시 머리를 숙인다. 선생의 발자취에 행여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문을 들어서니 일각문 앞쪽으로 샘이 보인다. 샘에는 맑은 물이 차 있어 갈증도 나던 차라, 검불만 떠 있지 않다면 한 모금 마시고 싶다. 누군가는 해골의 물도 마셨다는데, 검불 몇 가닥 떠 있다고 물을 마시지 못하는 인간이다. 하기에 이 자리에 있기가 버거운지도 모르겠다.



산 중턱에 서당을 지은 까닭을 깨우치다

서당 누마루에 앉아 땀을 닦는다. 멀리 보이는 서해가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변변한 나무도 없는 이 산 중턱에서 선생은 어떻게 그 오랜 겨울을 나신 것일까? 아마도 검불이며 삭정이를 모아다가, 겨우 방안에 온기만 들게 하셨을 것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사신 선생의 마음이 느껴진다.

많은 천거를 받았지만 모두 물리치고, 스스로 야인이 되어 반계서당에 오른 선생은, 52세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 올라 나를 돌아본다. 과연 나는 선생의 만분지 일이라도 마음을 닮을 수가 있을까? 반계서당에 올라 선생의 마음 한 조각을 담아간다. 아마도 내가 죽은 후 누군가 나를 기억할 때, 이곳 반계서당에서 조금은 변화가 되었을 것이란 마음 하나면 족하리라.

광주 북구 충효동 387에는,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호인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환벽당을 오르기 위해 숲길로 들어서면, 이 길이 무등산 역사 길의 정점이 된다. 가사문학관에서 자미탄 다리를 건너면, 왼편으로 난 작은 오솔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오솔길은 내를 옆에 두고 있어, 무더운 계절에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환벽당의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정자 뒤편으로는 대밭이 들어서 있고, 축대 앞으로는 속이 빈 배롱나무가 서 있다. 예전에는 주변이 온통 대숲이었다고 한다. 주변에는 수백 년은 족히 살아왔을 성 싶은 노송 몇 그루가,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반긴다. 아마도 나주 목사를 지내고 향리로 돌아 온 사촌 김윤제가, 후일 길을 찾는 나그네들을 위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푸름을 사방에 두른 환벽당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댓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환벽당은 풍광이 이름다운 곳이다. 환벽당 안에 걸려있는 임억령의 시가 환벽당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안개에다 구름 기운 겹쳐졌는데
거문고와 물소리 섞여 들리네
노을 사양길에 취객 태워 돌아가는지
모래가의 죽여 소리 울리고 있네

16세기인 조선조에 사화와 당쟁의 극한 상황 절의를 고집했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배를 당한 인물들. 그들은 이곳 환벽당 주변으로 모여들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이 모여들었던 환벽당

환벽당은 사촌 김윤재(1501 ~ 1572)와 더불어 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까지 머물렀다고 한다. 당대의 문인들이 환벽당을 중심으로 호남 문학을 꽃피운 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인들이 이곳에 모여 술잔을 서로 기울이면서, 시문을 논하고 소리 한 자락에 목을 가다듬지 않았을까? 댓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 옛 정취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사촌 김윤제는 이곳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송강 정철이나 서하당 김성원 같은 제자를 낳았으니, 가히 가사문학의 산실로도 환벽당은 손색이 없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빈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정철의 시 한수를 읊어본다. 환벽당을 지은 김윤제는 이곳에서 정철을 만났다. 김윤제가 환벽당 누마루에서 낮잠을 자다가, 조대 앞에서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낮에 꾼 꿈치고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조대로 내려가 보니, 용모가 단정한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소년은 화순 동복에 있는 누이를 찾아가는 소년 정철이었다. 그렇게 김윤제와 정철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사촌 김윤제와의 인연으로 정철은 과거에 나아갈 때까지, 십여 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정철은 환벽당에서 김윤제를 비롯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송촌 양응정 같은 당대의 기라성 같은 문인과 학자들을 스승으로 만난다. 그들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송강 정철, 그런 연유로 가사문학을 대표하게 된다.

한적한 환벽당, 아직도 옛 풍취는 그대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환벽당은 선비의 고고한 자태가 배어있다. 비탈진 곳에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정자는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 한 칸은 누마루를 두고,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렸다. 문은 모두 걷어 올려 천정에 매달 수 있게 하였다. 방 앞으로는 측면 반 칸을 앞마루를 깔아 마루와 연결이 된다.



앞으로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측면으로 흐르는 내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이곳에서 살았을 많은 문인들. 그들은 속을 비워냈을 것이다. 세상의 풍파에 휩싸이지 않은 방법은, 그렇게 속을 비우고 초야에 묻혀 시를 읊고 술 한 잔을 기울이는 일이 아니었을까? 속이 다 비어버린 배롱나무 한 그루가, 당시 이곳에 찾은 든 많은 문인들의 속을 보여주는 듯하다.

벌써 한참이나 지난 6월 18일 찾아간 환벽당. 그곳에는 김윤제도 정철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정취만은 그대로 환벽당에 남아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2-1번지에는 옛 가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폐교가 된 이 초등학교 교정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경남 기념물 제197호로 1997년 12월 31일자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35m 정도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는, 1480년경에 훈도인 전경륜심었다고 한다. 전경륜이 이 마을에 집터를 잡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배(=船)와 같다고 하여, 서편 냇가 남북 400m까지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하여 마음의 풍림 겸 배의 돛대로 삼았다고 전한다.



일제 말에 베어버린 숲

2,000평이나 되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마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 넓은 장소에 서 있던 느티나무들을 일제 말에 모두 베어버리고, 현재 남아있는 한 그루만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정천, 혹은 ’샘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사후에 대사헌으로 추증이 된 전팔고 선생의 호를 따 ‘원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592년에는 의병들이 이 숲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모든 나무를 베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0여 평이나 되는 느티나무는 선비들의 풍류장소로 이용이 되다가, 임진왜란 때 수난을 당했으며, 그 뒤 한일합병의 슬픔까지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무에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

지난 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가조면 원천리. 옛 가산초등학교 교정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주변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폐교가 된지 시간이 흘렀는지, 담장에는 넝쿨이 타올라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이리저리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철문 옆에 조그마한 공간이 보인다.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바로 학교 교정 안이다. 느티나무는 옛 학교 건물과 마주한 곳에 서 있다. 낮은 철책으로 보호막을 둘러놓은 느티나무. 나무의 밑동에는 혹처럼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생명의 원천, 느티나무

오래된 고목에는 정령이 산다고 하더니, 저 혹에 생명이라도 깃든 것일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느티나무가, 소리가 사라진 지금은 왠지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 가까이로 가서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거친 감촉사이로 온기가 느껴진다. 생육이 좋은 이 원천 느티나무는 홀로 이렇게 폐교가 된 교정에 서 있다.

밑동 근처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달라붙어 있는데, 위를 보니 중간이 잘려있다. 아마 원줄기의 한편이 잘려나간 듯하다. 이것도 일본에 의한 아픔은 아니었을까?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일제의 만행, 그리고 뒤이어 맹목적인 종교적인 훼손. 거기다가 도적 떼들까지. 도대체 이 나라의 문화재가 정말 마음 편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를 들러보고 있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나무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모든 생명을 감싸고 있건만, 이제 인적 끊긴 폐교의 안마당에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온전할 것인지. 교정을 떠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무 밑동에 검은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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