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 답사를 하기 위해서 3일에 한번 씩은 답사를 나간다. 예전 같으면 그저 집의 구조를 찍고, 전체적인 정경을 촬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답사를 하는 방법이 전혀 달라졌다.

 

하나하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고, 조금만 특이한 것이 있으면 몇 장이고 담아온다. 그것을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글을 쓰기 때문에, 답사의 형태가 달라지고 나름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은 고가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중전리. 이 고가를 찾기 위해서 애를 먹었다. 번지가 나오지 않고 중전리라고만 소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큰 길에서 찾아 들어간 중전리.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곳을 찾았다. 마을 분들에게 이곳에 고택이 있느냐고 물어도, 그 누구도 모른다는 한결같은 대답이다.

 

몇 바퀴를 돌아보았지만, 고택 같은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할 수 없이 돌아 나오다보니 좌측으로 중정리라는 이정표가 또 보인다. 그 길로 따라 들어갔지만, 길은 구불거리고 마을에 집이라고는 몇 채 되지 않는다. 차를 돌리려는데, 저 안쪽 산 밑에 초가가 보인다. 중전리가 지역적으로 넓어, 처음 찾아간 중전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러니 큰 마을에서는 모를 수밖에.

 

 

중전리 고가는 한 마디로 참 좋은 집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계신다. 집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드리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대문채의 우측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대문의 좌측은 판자벽으로 막은 두 칸의 외양간과 헛간이다.

 

사랑채는 대문에서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그 끝에 터진 대청을 두었다. 사랑채의 두 칸 방은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다. 주위에 집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터진 대청에서 주위의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의 대문채에 지붕은 이어지고 벽이 없이 꺾어진 방들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ㄴ 자형으로 지어진 집이다.

 

 

대문채에 살림방을 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가 있는 대문채는 ㄴ 자로 꺾여있다. 그런데 대문 옆에 있는 헛간과 이어지는 부분은 지붕만 있고, 한 칸 정도가 빈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한데 아궁이가 있으며, 두 칸의 방이 있다. 그리고 까치구멍을 낸 광이 있고, 그 앞에 마루를 놓았다. 이 마루는 안채의 건넌방과 마주하고 있는데, 현재 이 집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의 이야기로는 이 사랑채에 연결된 방이 살림방이라는 것이다.

 

집의 구조로 보면 행랑채에 해당하는 형태로 되어있지만, 이 방이 살림방이라는 말에, 안채에서는 살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안채는 사람이 살았지만, 안주인이 이 사랑채의 꺾인 방에서 살림을 했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 안채로 가려면 판자로 막은 바람벽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대문을 열어도 직접적으로 안채를 볼 수는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되어있어, 중전리 고가의 전체적은 구성은 튼 ㅁ 자형을 하고 있다.

 

 

안채의 건넌방에서 살림방으로 연결이 되다

 

중전리 고가의 집의 구조는 남다르다. 일반적으로 건넌방에는  마당 안쪽으로 방문이 나 있는데 비해, 이 안채의 건넌방은 안마당 쪽으로는 문이 나 있지 않다. 그리고 사랑채의 꺾인 날개채의 끝에 달린 마루와 이어지는 곳에 방문이 나 있다. 즉 안채의 안방에서 대청을 지나, 건넌방에서 이 살림채로 동선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안채는 건넌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꺾이는 부분에 안방과 있고, 다락을 둔 부엌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6칸의 집이지만, 방은 건넌방과 두 칸인 큰 안방으로 구성이 되었다. 대청 끝 안방의 앞부터 부엌의 까치구멍까지 이어서 툇마루를 놓은 것도 특이한 구성 형태다. 부엌에서 뒷문을 통해 안채의 뒤편에 있는 장독대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중전리 고가의 색다른 형태이다. 대청의 안방 앞에는 대나무로 시렁을 놓아 병풍을 올려두었다. 우리의 고택 중에는 대나무 시렁을 둔 집이 상당수 있다.

 

 

방앗간이 있는 중전리 고가

 

중전리 고가는 외딴집이다. 금성면 중전리의 큰 마을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그래서인가 이 고가의 안채와 꺾은 날개채의 터진 부문 뒤편으로 들어가면, 그곳에 초가로 지은 방앗간채가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채는 디딜방아를 놓은 곳과, 곡식을 쌓아두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었다. 산자락 밑에 자리하고 있는 중전리 고가는 안채의 뒤편에 돌로 축대를 쌓고 있어, 나름 운치가 있다.

 

중전리 고가의 사랑채는 원래 초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기와집으로 꾸며졌다. 또 하나 이 중전리 고가에는 외곽담장을 두르고, 그 안으로 대문을 낸 것도 색다르다. 아마 이 곳에 사랑채를 두었기 때문에, 외곽담장을 둔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의 외곽담장은 안채의 부엌 끝과 맞물려 있어, 사랑채에서는 안채의 뒤편으로 들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현재 중전리 고가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집의 구조는 특이하지만, 원형이 바뀐 것이 중요민속자료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집안 여기저기 장작이 쌓여있다. 아궁이에는 불을 땐 흔적이 보인다. 아직도 과거의 생활모습 그대로를 찾아볼 수가 있는 초가집. 초가집이 '고래 등 같다'고 하면 이해가 가질 않을 것이다. 주로 기와집이 덩그렇게 높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은 초가집이면서도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정원태 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되어진다. 넓은 사랑채가 높이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앞을 바라보고 있다. 초가로 만든 작고 소담한 담장에 붙은 일각문이 대문 역할을 하는 정원태 가옥의 안채 역시 초가로 운치 있는 집이다.

 

 

명당에 자리한 초가

 

제천 정원태 가옥은 19세기 초에 지어졌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이 가옥은 전망이 좋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자리한 초가집은 전형적인 길지로 알려져 있다. 안채가 ㄱ자형으로 자리를 잡고 그 앞쪽으로 ㄴ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해, 튼 ㅁ자형으로 꾸며져 있다. 사랑채의 날개 부분이 짧게 구성되어 있어, 서쪽이 트여져 있다.

 

안채는 작은 부엌과 안방, 윗방, 2칸 대청이 있고, 그 끝에 골방을 - 자 형으로 배치를 했다.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두어, 이 건넌방이 집안 살림의 중심 역할을 한다. 현재는 노부부가 집을 관리를 하고 있으며, 이 부부 역시 부엌에 달린 이 건넌방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사랑채 서쪽은 시원한 2칸 대청이 있고, 한편에는 부엌방과 큰 사랑이 반대편에는 작은 사랑방을 드렸다.

 

사랑채의 큰 사랑방. 부엌이 딸린 방은 앞으로 돌출이 되어 있다

 

안채에 거주하는 여인들을 보호한 사랑채

 

정원태 가옥의 특징은 바로 사랑채다. 그 규모는 안채보다도 충실하게 지어졌다. ㄴ자 형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부엌을 동쪽에 두고 부엌과 큰사랑, 대청, 작은사랑 순으로 꾸몄다. 이 사랑채의 특징은 시원하게 꾸며졌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는 돌출된 방이 있고, 그 방 뒤로 부엌을 달았다. 안채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사랑채의 부엌으로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한 것이다.

 

행랑채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집안에 부녀자들이 사랑채를 찾은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사랑채를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사랑채는 앞이 트여있어 전망이 좋다. 큰 사랑은 앞쪽과 대청 쪽에 문을 달아 바람이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작은 사랑방 역시 같은 형태로 되어있다.

 

ㄴ 자로 지은 사랑채는 뒤편으로 돌아가면 서편쪽의 꺾인 부분을 짧게 처리를 하였다. 서쪽이 트여있어 안채의 답답한 점이 없게 꾸몄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꾸며 좌측부터 작은 부엌 사랑방, 대청, 골방을 - 자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는 건넌방과 부엌을 드렸다.

 

사랑채의 앞쪽은 전체적으로 툇마루를 내달아 부엌방이 돌출된 곳까지 연결을 하였다. 사랑채는 원래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 뒤 스레드로 지붕을 올렸다가, 현재는 초가로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 서쪽 끝에 꺾어진 곳은 광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앞면은 -자로 되어있으며, 뒤편으로 돌아가면 ㄴ자형으로 지어졌다.

 

안채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정원태 가옥의 안채는 꺾어진 부분에 2칸 대청이 시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앞쪽은 모두 툇마루를 두었다. 이 툇마루는 끝 작은 부엌의 위에는 다락을 만들었다. 다락은 방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내어 그곳으로 출입을 하게 만들었다. 현재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잡동사니를 두는 곳이라는데,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도 이용을 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한다.

 

툇마루 끝에 걸린 다락. 방안에서 출입을 하지 않고, 툇마루 끝에 문을 달았다. 다락의 밑에는 작은 부엌을 꾸몄다.

 

툇마루 끝에 달린 다락의 밑은 작은 부엌이다. 문이 달리지 않은 아궁이를 둔 이 작은 부엌은 고개를 숙여야만 드나들 수가 있지만, 휑한 곳에서 바람을 맞지 않도록 꾸며졌기 때문에 오히려 아늑함을 준다. 정원태 가옥을 둘러보면 부녀자들이 살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짧은 동선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동쪽 밖의 담장과 안채의 사이에는 텃밭을 만들었다. 그런 것들이 이집을 지을 때 살림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편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투박한 굴뚝이 정감이 간다. 마치 거대한 함포와 같은 모습이다.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도 이 집을 아름답게 보이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함포와 같은 굴뚝, 투박하지만 정감이 있어

 

정원태 가옥을 들러보다가 뒤뜰로 갔다. 그곳에서 투박한 굴뚝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곳에 함포가 서 있기 때문이다. 황토로 옹기처럼 만들고 그 위에 굴뚝을 세웠다. 그리고 굴뚝을 모두 백회로 발라놓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함포처럼 보인다. 이렇게 투박한 굴뚝들이 더욱 정감이 가는 것은, 그 굴뚝과 초가와의 조화 때문인 듯하다.

 

이 집은 배수가 잘 된다고 한다.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물이 차는 법은 없겠지만, 돌로 만들어 놓은 배수로가 집안에 드는 물을 빠르게 밖으로 빠져 나가게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뒤에도 돌로 꾸민 배수로가 있다. 이렇게 돌로 꾸며 놓은 배수로가 이 집과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결국 이 모든 것 하나하나가 집을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정원태 가옥의 문은 크지 않다. 담장에 일각문으로 만들어 놓은 초가지붕의 대문이 멋스럽다.

 

 이 집을 찾아갔을 때 사랑채 곁에 놓인 디딜방아도 정원태 가옥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었다.

 

정원태 가옥의 대문은 일각문이다. 아마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고 주변이 훤히 트여있어, 대문으로 인한 무거움을 굳이 원하지 않았는가 보다. 담 장 사이에 붙어있는 일각문도 초가를 얹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사랑채의 곁에 놓인 디딜방아 공이가 여유를 보이는 것도, 이 가옥의 또 다른 모양새가 아닐까 한다. 초가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는 정원태 가옥. 일생에 한 번 쯤은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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