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거세다. 장마철에 답사를 떠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맞았다면 그보다 더한 날이라고 해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7월 14일(토),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도착한 남해 보리암. 가는 내내 비가 뿌려댄다. 버스에서 내려 셔틀버스로 옮겨타고, 다시 걸어 올라가는 보리암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카메라가 젖지 않게 하기위해 거기다만 신경을 쓰다가 보니, 옷은 이미 속까지 축축하게 젖어온다. 질척이는 길을 걸어 도착한 보리암은, 자욱한 해무 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어디라고 들릴 사이에 없이 전각 앞을 지나, 바닷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삼층석탑으로 향했다.

 

 

전설과는 거리가 먼 삼층석탑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보리암 경내에 서 있는 경남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이 탑은 보리암 종각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크지 않은 이 삼층석탑은 비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석탑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3년인 683년에 원효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을 이용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허태후가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도 전한다.

 

 장맛비 속에서 남해  보리암으로 오르는 사람들(위)과 비와 해무에 쌓인 보리암(아래)

 

하지만 이러한 전설은 실제와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삼층석탑은 파사석이 아닌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의 조형을 보면 고려 초기의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설과는 차이가 난다.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크지 않은 석탑

 

장맛비가 쏟아지는 데도,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불입상 앞에는 그 비를 맞으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석탑 옆 바위에는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 저 바위와 같이 오랜 시간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을까? 어디를 가나 저렇게 돌에 새긴 이름들을 본다는 것이 이젠 씁쓸하기만 하다.

 

 

삼층석탑 주변의 바위(위)와 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아래)

 

보리암 전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그 크기가 크지 않은 편이다. 석탑에는 특별한 조각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 그저 평범한 모습이다. 커다란 돌 하나로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면석을 놓았다. 면석에는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새겨놓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도 양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처마는 약간 경사가 지게 하여 자연스럽게 처리를 하였다. 상륜부에는 보주가 남아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탑의 유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천년 세월 남해를 바라보고 금산 보리암의 비보석탑으로 지켜 온 고려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보리암 삼층석탑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 자욱한 해무에 쌓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남해를 바라다보면서, 이곳을 들리는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원을 얼마나 들어준 것일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어 고맙다. 이 탑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빗길에 달려온 나그네를 맞는 삼층석탑. 비보석탑인 이 삼층석탑에 고개를 조아리고, 내 주변의 모든 나쁜 기운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충남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번지. 금산읍에서 금산인삼장이 열리는 앞을 지나 제원면으로 들어가, 제원대교를 건너면서 좌측으로 보면 전각이 하나 보인다. 이 전각 안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산천내리용호석’ 중 ‘용석(龍石)’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100m 정도를 천변 둑을 타고 가다가 우측 농로로 들어가면 또 하나의 전각이 보인다. 그 안에는 용호석 중 ‘호석(虎石)이 있다. 천내리 마을 서쪽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돌로 만든 동물상 2기인 천내리 용호석. 과연 이 2기의 석물로 조각된 용호석의 실체는 무엇일까?



공민왕이 두고 갔다는 용호석

공민왕은 고려 27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다. 충목왕 즉위 원년인 1344년에 강릉부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충정왕 1년인 1349년 원으로 건너가 위왕의 딸인 노국대장공주를 비로 맞았다. 충정왕 3년인 1351년 충정왕이 폐위되자 원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귀족회의인 ‘정방’을 폐지하는 등 많은 개혁정치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이 1360년 홍건적이 침입을 하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신을 내려갔단다. 그곳에서 자신의 능묘의 위치를 정해놓고 필요한 석물을 준비하였는데, 이 용호석이 바로 그 석물이라는 것이다.


위 사진들은 용호석 중 용석의 모습이다. 용은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사이네 용을 조각하였다


왕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는데, 이 용호석은 그곳에 그냥 두고 갔다는 것. 만일 이러한 설이 맞는다고 하면 이 용호석은 제작된 지가 700년이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이 용호석은 천내리 강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용호석의 설을 받침 하는 공민왕묘

공민왕의 릉인 ’헌릉은 개풍군 해선리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묻은 능침은 봉명산의 무선봉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데, 서쪽 것이 공민왕의 무덤인 현릉이며, 동쪽 것이 왕비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이다. 1365년 왕비인 노국공주가 난산으로 죽자, 공민왕 지신이 직접 주관하여 9년이란 세월에 걸쳐 무덤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산 천내리의 호석은 꼬리를 앞발 사이로 넣어 앞다리에 걸친 모습이다. 민속화 등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로 앉아있다.


이 무덤은 고려의 모든 천문지리, 석조건축, 조형예술이 집대성되었다고 본다. 맨 위에는 봉분을 구성하고 3개의 층단과 맨 아래는 경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층단에는 조각과 시설을 적절히 배치해,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공민왕의 무덤에 바로 금산 천내리 용호석 중 호석과 흡사한 호석 한기가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금산에서 조각한 용호석을 가져가지 못한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죽고 난 후 능침을 조성하면서 이 석물로 조각한 호석을 만들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호석의 형태가 흡사하다는 것을 보면, 천내리 용호석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낭설은 아니란 생각이다.

아래는 공민왕 무덤의 호석 / 인터넷 검색자료

조각기법이 퇴화한 고려 후기의 조각

금산 천내리의 용호석은 그 모습이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석은 여러 개의 돌기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를 조각하였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입 양쪽으로는 아가미와 수염이 묘사되어 있다. 발톱은 우리나라 용의 네 발가락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비늘은 두텁게 표현을 하였다.

호석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바로 이 모습이 공민왕 능침 앞에 있는 호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천내리 호석은 몸은 서쪽, 머리는 북쪽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털 문양은 두툼하게 솟은 곡선과 동그라미를 교대로 조각하여 표현되었다. 호석의 꼬리는 앞발 사이로 감아 한편으로 조각하였다.

호랑이나 용의 특징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이나, 전체적으로 조각기법이 투박하고 퇴화한 점 등으로 보아, 이 용호석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시기적인 것이나, 공민왕의 능침에 있는 호석 등으로 추론할 때, 이 용호석은 공민왕이 자신의 무덤에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을 했을 것이란 설에 공감이 간다.

공민왕과의 관계설도 그럴 것이라고 공감을 하지만, 용석은 동쪽을 바라보고 호석은 서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용호석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듯도 하다. 700년 세월을 천내리 천변에 자리하고 있는 용호석. 언제까지라도 주인을 기다릴 듯한 자세로, 오늘도 길가를 주시하고 있다.

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345번지에 소재한 충남 전통사찰 제85호 미륵사. 미륵사 상량문에 의하면 미륵사는 통일신라 성덕대왕 2년인 703년 봄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이다.

미륵사는 1948년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화재 후에는 인법당을 모셨으며,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짓고, 산성각, 요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사에는 ‘미륵암(彌勒岩)’이 있다, 두상만 남은 석조불을 바위 위에 얹어 놓은 것이다.



미륵암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 이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바위에 선각은 조성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조각이 나 있다. 안면이나 두광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옆에는 몸만 나온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삼존불 중 협시불인 듯하다.


바위 위에 얹은 석불 두상

지난 8월 28일, 장수,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들어갔다. 보석사의 은행나무와 미륵암을 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암은 현 미륵사로 올라가기 전, 축대 밑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 위에 석불의 두상을 올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두상으로만 보아도 이 석불은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밑으로는 평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두상을 염두에 두고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것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쪼개진 바위조각에 조각을 한 흔적이다.


조각난 바위 뒤에는 전각의 주추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마애불을 보존하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쪼개진 바위조각들은 마애삼존불인 듯?

미륵사로 찾아들었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료를 들고 나와 보여주신다. 이곳으로 부임을 해와 보니, 바위를 절단 한 듯 톱날 등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널린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 어림잡아 크기는 3m가 넘을만한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저것을 맞추어보니, 삼존불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렇게 조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리고 저 바위에 선각을 한 것은 무엇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림잡아도 10여 조각은 되는 듯하다. 미륵사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숲 속에도 조각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면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선각을 한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조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을 추론하여 볼 때 마애불을 새긴 바위의 높이는 3m를 넘었을 것만 같다.



주변에 널려진 바위조각에는 마애불을 새긴 흔적이 보인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을 한 것의 기법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작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낸 것일까?


무지가 빚은 참화, 눈물이 난다

그리고 바위는 넓적한 돌에 마애불을 새겼을 것만 같다. 그 마애불을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이다. 현재 조각난 마애불 주변에는 옛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고, 바위 한편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새기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각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기와의 와편은 보기 힘든 꽃이 새개져 있다. 와편만 보아도 이 마애불을 보존하기 위한 전각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 역시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을 터, 그런 문화재급 마애불이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애불을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일까? 조각난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세상에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다니. 무지가 불러온 문화재 훼손. 그것도 알만한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것인지. 이 나라에서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돌아 나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배꽃재’라고도 하고, ‘배꽃고개’ 혹은 ‘배티재’라고도 했다. ‘이치재’는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대둔산 옆 자락을 끼고 넘는 도로의 정상에 있는 고개마루턱이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와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을 연결하는 고개를 말한다.

이 이치재는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지의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산대첩과 행주대첩, 그리고 이치대첩을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이치전투는 그럴 만큼 적을 완전 섬멸한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황진장군의 전승기념비가 서 있는 곳

그 고개마루의 휴게소 앞이 바로 임진와란 때 대승을 거둔 뜻 깊은 장소이다. 지금은 그저 이치대첩지란 비가 서 있고, 후에 세운 ‘황진장군의 이치대첩비’ 가 있다. 그곳에서 조선조 선조 25년인 1592년 왜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곳이다. 당시 왜병의 시체가 수 십리에 즐비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만하다.

왜장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수만의 왜병은 금산에서 웅치 방어선을 뚫고 호남의 수도라는 전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는 하동을 거쳐 올라온 왜병들과 연합으로 전주를 침공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동북현감 황진장군은 남원진에서 급히 전주로 올라와, 안덕원까지 침입한 적을 물리쳤다. 그리고 바로 이치로 자리를 옮겨 휘하의 장수인 공시억, 위대기, 의병장 황박 등과 함께 사력을 다하여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금산군 진산면의 어르신들께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당시 아군들의 치는 징 소리가 골짜기를 울려, 떠날 갈 듯 했다는 것이다.

계룡산과 지리산의 산신들의 각축장이 된 대둔산의 전설

예전에 대전KBS에서 방송을 할 때, 책을 내기 위해 이치재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전라북도 완주를 거쳐 금산으로 넘어오다가 진산면에서 들은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치재에서 대둔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전라도 쪽은 기암괴석으로 되어있고, 충청도 쪽은 밋밋한 산이기 때문이다.


왜 대둔산의 형태가 양편이 그리 달라진 것일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양도의 산이 달라진 것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이 들려주신 대둔산의 전설

옛날에 지리산 산신과 계룡산 산신이 만났어. 바로 이 대둔산이 양산의 중간쯤이 되거든. 그래서 두 산신이 음식을 준비해서 이곳에서 만났는데, 지리산과 계룡산의 산신이 둘 다 여자였던 거야. 두 산신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언니, 동생을 정하기로 했지. 그래서 내기를 해서 언지 동생을 정하기로 한거야.

두 산신은 하나, 둘, 셋을 세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대둔산에 있는 돌들을 바람으로 날려 상대 쪽으로 많이 날려 보내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했지. 다음날 아침 두 산신이 하나, 둘을 세었는데, 그런데 계룡산 산신이 셋을 세기 전에 미리 바람을 불어버린 것이야. 그래서 충청도 쪽 돌들이 모두 날아가 전라도 쪽에 쌓였다고 전하지.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듯도 하다. 9월 4일 늦게 도착한 대둔산 이치재. 주말 이치재를 넘는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고 있지만,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무심히 지나쳐버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아쉽기만 하다.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가급적이면 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향교와 서원이다. 향교나 서원은 예전 교육기관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기관인 향교나 서원을 가급적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내어 깊숙이 자리한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보았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 향교나 서원은 꼭 문을 닫아 놓는 것일까? 그것도 보물 등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곳은 오히려 개방을 한다. 또 어느 지역을 가면 그 안에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거개의 향교와 서원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다.


꽁꽁 닫혀있는 향교, 연락처 하나 없어

출장을 가는 길에 문화재 한 점이라도 조사를 할 양으로, 일부러 금산으로 길을 잡았다. 대둔산을 넘어 금산으로 가는 길은, 이치재를 넘어서 바로 진산면이 된다.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 355번지에 진산향교가 있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역시나’ 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는데,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남겨놓지 않았다. 이렇게 굳게 잠가놓을 것 같으면, 전화번호라도 하나 남겨주던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일부러 길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교까지 찾아들어 갔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여기 관리자가 없느냐고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다.




하긴 요즘 사람들,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도통 신경을 쓰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라서 어디 연락을 할 수도 없다. 향교 담장 밖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그러나 외형만 찍는 사진, 답답하기만 하다.

조선조 영조 51년에 복원한 진산향교

현재 충남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진산향교는, 원래는 조선조 초기에 현 진산중학교 자리에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영조 51년인 17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다시 지었다고 한다. 그 뒤 6, 25 한국전쟁 째 훼손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보수하였다.



진산향교는 외삼문, 내삼문, 전교실, 유생들이 공부하는 강의실인 명륜당과, 그 뒤편에 마련한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선철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폐를 모셔 놓고, 봄과 가을에 석전제를 지내고 있다.

진산향교는 비탈을 그대로 이용하여 건물을 지었다. 향교를 바라보면 맨 아래 쪽에 외삼문이 있고, 그 뒤편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진산향교를 찾아간 것은 바로 이 명륜당 때문이다. 누각 형태로 지은 명륜당은 딴 곳의 전각과는 다르다. 비탈진 곳에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형기둥을 세웠다.



마루를 어떻게 깔았는지 볼 수가 없지만, 누각 형태로 되어있기 때문에 온돌은 없고, 누마루의 형태로만 되어있는 듯하다. 누각은 계단을 이용해 오르게 하였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지붕이다. 문은 정면과 후면을 세 칸의 판문을 달아냈다. 좌우에는 한 칸의 문을 내었으며, 양편으로는 풍판을 달아냈다.

주심포계로 지어진 진산향교. 밖에서 아무리 돌아다녀 보았지만,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전혀 없다. 할 수 없이 담장 밖에서 명륜당 몇 장을 촬영하고 돌아서는 수밖에. 이럴 때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는 가까이서 살펴보고, 느껴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렇게 꽁꽁 닫힌 향교와 서원, 과연 바람직한 행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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