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공'

 

이란 육신이 살아있는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오르면서, 몸은 벗어버리고 영혼만 부처님의 연화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등공은 염불만일회에서 이루어진다. 염불만일회란 일념으로 염불을 목적으로, 살아서는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은 후에는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법회를 말한다.

 

염불만일회의 시작은 신라 경덕왕 17(758, 무술년)에 발징화상께서 원각사를 중수하고 염불만일회를 베푸니, 이것이 한국불교 염불만일회의 효시이다. 이 때 발징화상이 정신, 양순 등 스님 31명과 염불을 드렸는데, 뜻을 같이하는 신도 1,820명이 환희심이 일어 자원을 하였다.

 

 

그 가운데 120명은 의복을, 1,700명은 음식을 시주하여 주야로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는데, 신라 원성왕 3년인 787년 염불만일회에서 선행을 닦던 스님 31명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났으며, 시주를 하던 신도들도 모두 극락왕생을 하였다고 전한다.

 

건봉사 북쪽 금강산에 자리한 등공대

 

건봉사 북쪽에 위치한 등공대는 만일(275개월)동안 기도하시던 스님들이 원성왕 3년인 787년 회향을 할 때, 건봉사를 중심으로 사방 허공으로 몸이 그대로 떠올라 날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1.5km 정도를 날아오른 스님들은 육신의 허물은 그대로 땅에 떨어트리고, 맑고 밝은 정신만 등공을 한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00년인 광무4년에 들어, 스님들의 다비식을 거행한 곳을, 몸을 살랐다고 하여 <소신대(燒身臺)>라고 하였다. 소신대는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뜻을 기려 기도에 정진을 하였는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져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에서 기도를 하던 양씨 성을 가진 연대월 보살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백원을 희사하고, 기념탑을 세워 봉안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를 가상히 여긴 스님들과 신도들이 동참하매, 순식간에 모인 돈이 천원이 모였다. 갑인년(1914) 4월에 역사를 시작하여, 을묘년(1915) 5월에 역사를 마치고 등공탑을 세워 그 뜻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 후 소신대를 등공탑이 있다고 하여서 <등공대>라고 불렀다.

 

'휴거'는 건봉사에서 이루어졌다?

 

 

건봉사 등공대는 이렇게 31명의 스님들이 살아있는 몸을 그대로 허공으로 올랐다는 기록이 있어 유명하다. 신라 때부터 많은 스님들이 금강산 건봉사를 수행처로 삼은 점이나, 우리나라의 4대 사찰에 건봉사가 들어가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915년 세워진 등공탑 비문에 보면(운고 김일우 지음) 절 북쪽 5리쯤에 아직도 몸을 불사른 대가 있는데, 오랜 세월을 겪다보니 꽃이피고 잎이지는 변천을 겪었다. 많은 시일을 보내자니 바람에 닳고 비에 씻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폐허에 돌을 포개놓고 구경하게 두매, 산도 이로 인해 무안해 하고, 물도 이 때문에 소리를 삼킬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萬日)의 정진으로 인해 살아있는 육신 그대로 몸이 떠올라, 1.5km나 위로 올랐다는 기록에 아연할 수밖에 없다. 신라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 아직도 그 뜻을 기리는 건봉사. 그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한 때 이곳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닐까? 오늘 등공대에서 합장을 한다.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산136-11에 소재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4호인 고성화암사(高城禾岩寺)’는 신라 혜공왕 5년인 769년에, 법상종의 개조인 진표율사가 화엄사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이 절은 조선 인조 1년인 1623년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3년인 1625년에 고쳐 짓는 등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그 뒤 고종 1년인 1864년에는 지금 있는 자리인 수바위 밑에 옮겨 짓고, 이름도 수암사(穗岩寺)라 하였다가 1912년에 다시 화암사(禾岩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전쟁 때 다시 한 번 불에 타 모두 소실이 되었던 것을 훗날 법당만 다시 지었다. 화엄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들은,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 준비를 위해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 지은 것이다.

 

 

화암사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일주문, 대웅전, 삼성각, 명부전, 요사채 등이 있으며,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군과 일부 계단석이 남아 있다. 화암사는 금강산 일반 이천봉 팔만 구암자 중 남쪽에서 시작하는 봉우리의 두 번째인 신선봉의 바로 아래 세워져 있다고 한다.

 

수바위에 얽힌 전설

 

속초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금강산 화암사라는 이졍표가 보인다. 또 한 곳은 속초에서 미시령 터널로 향하다가 미시령 옛 길로 접어들어도 같은 이정표가 보인다. 어느 방향을 택해도 화암사를 찾기에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화암사경내를 향해 가다가 좌측에 보면 희게 보이는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 바위를 수바위라고 부른다.

 

이 절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화암사라 부른 것은 1912년부터이다. 절 이름을 바꾸게 된 것도 화암사 남쪽 300m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 모양의 바위인, 이 수바위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화암사의 스님들은 모두 수바위 위에 편안히 앉을만한 곳을 찾아 좌선을 시작했다. 이 수바위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그곳에서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의 공양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주를 해오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수행을 하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지팡이로 세 번만 두드리면 쌀이 나올 것이다. 그 공양미로 밥을 지어먹고 열심히 수행에만 힘쓰라고 사라졌다. 꿈에서 두 사람이 같은 백발노인을 본 것을 이야기를 한 스님들은 백발노인의 말대로 했더니 정말 쌀이 나왔다.

 

 

지금도 이 수바위에서 기도를 한 스님이나 신도들이 밤에 꿈을 꾸면 이 백발노인이 나타나 미리 닥칠 일을 알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회암사로 이름을 바꾸게 한 그 수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은 어찌되었을까? 여기도 마찬가지로 욕심이 많은 한 사람에 의해 그 쌀이 나오는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전설은 그렇게 어디서나 똑 같이 마무리를 한다.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

 

봄이 금강산 줄기 아래 고성 땅에 꽃소식을 몰고 올 때 찾아갔던 회암사. 한편에서 봄을 알리는 벚꽃이 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삼성각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미 촬영을 다 마치고 여유롭게 삼성각을 합 바퀴 돌아보고 싶어서이다. 화암사 삼성각은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서원이 이루어지려나?

 

 

삼성각 안 벽면에는 금강산 천신대, 상팔달, 세선봉, 삼신대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하긴 이 화암사에서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고 난 뒤 그의 제자 100명이 화엄경을 배우다가 그 중 31명이 하늘로 올라가고, 남은 69명은 무상대도를 얻었다고 하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는 고성 끄트머리에 있는 절 건봉사에도 전한다. 건봉사에는 그렇게 많은 스님들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곳에 등공탑이 서 있어, 이곳보다 더 실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삼성각에서 참배를 하고 전각 밖으로 나온다. 수바위에서 불어온 바람 한 점이 108배에 흐른 땀을 식혀준다. 이런 행복함에 절을 찾는 것이다 아닌지.

 

이상하게도 고성에 있는 건봉사의 능파교를 찾을 때는 꼭 날씨가 추웠다. 지난 118일부터 23일 일정으로 돌아 본 강원도. 그 첫날 건봉사를 찾은 날도 갑자기 날이 쌀쌀해졌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통일전망대를 돌아본 후 건봉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이문을 건너 산영루로 들어가는 길에 만나는 다리가 바로 능파교이다.

 

금강산의 한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절의 앞 계곡으로 맑은 물을 흘려보낸다. 그 위에 석재로 된 다리는 우리나라의 많은 홍예교 중에서도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다. 보물 제1336호인 능파교’.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 다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8 건봉사 경내로 들어가는 다리이다.

 

 

다리가 있는 곳은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스님이 창건을 해 원각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이다. 그 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처럼 생긴 돌이 있다고 하여, 서봉사라고도 불렀다. 현재의 명칭인 건봉사는 고려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나옹스님이 붙인 이름이다.

 

여러 번 수난을 당한 능파교

 

118일 찾아간 고성에서 만난 다리. 능파교는 건봉사의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이다. 다리는 한 칸의 홍예를 조성한 것으로는,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폭이 3m에 길이는 14.3m에 이른다.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m이다.

 

능파교는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에 건립된 능파교신창기비(凌波橋新創記碑)가 남아있어, 축조된 시기 및 내력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숙종 30년인 1704년부터 숙종 33년인 1707년 사이에 처음으로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영조 21년인 1745년에 대홍수로 인해 붕괴가 된 것을,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7년인 1880년에 다시 무너져, 그 석재를 대웅전의 돌층계와 산영루를 고쳐 쌓는 데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능파교 홍예틀과 접하는 호안석 중 변형을 해체하여 원형을 찾아 보수를 하였다. 그러나 보수를 하던 중에 능파교가 훼손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도움으로 200510월에 원형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뛰어난 조형미를 보이는 홍예교

 

능파교는 다리의 중앙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쌓아서 다리를 구성하였다. 홍예는 하부 지름이 7.8m이고 높이는 기석의 하단에서 4.5m이므로, 실제 높이는 이보다 조금 더 높다.

 

고성지역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능파교. 날이 쌀쌀한데도 많은 사람들이 능파교를 건너 산영루 밑을 통과한다. 능파교 밑으로 흐르는 물은 맑기만 하다. 능파교의 교각 밑으로 들어가 본다. 밑에서 바라보니 능파교의 양편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민 산영루의 처마가, 마치 능파교에 날개를 달아놓은 듯하다. 장대석으로 고르게 쌓은 홍예를 바라보고 있자니, 과거 석재를 이용한 조상들의 조형술에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어떻게 이렇게 반듯하니 돌을 쌓아올려 서로 버티는 힘을 이용할 수가 있었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지나 대웅전을 향하고 있지만, 그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도록 축조를 하였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에 손을 넣어본다. 폐부 깊숙이 한기가 전해진다. 한 여름에도 이곳은 물이 차가워 오래 물속에 있지를 못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석조조형물

 

석재를 이용해 조성한 다리 하나가 갖는 의미. 그저 다리라는 것이 사람들이 건너기 위한 조형물이려니 생각을 하겠지만, 그 다리가 결코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모든 건축물은 결코 자연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능파교를 건너본다. 그저 그 위에서 11월의 찬바람을 맞으며 한 없이 서 있고 싶다. 오랜 세월 그렇게 자리를 지켰을 능파교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함이다. 사람들에게는 다리이겠지만 30년 세월 문화재를 찾아 전국을 돌아본 나에게는, 능파교는 다리가 아닌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내년 봄 산수유가 계곡에 흐드러지게 필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비가 오는 날 찾은 울진 평해. 솔향이 짙은 해송 숲에 자리한 정자. 그저 바라다만 보아도 절로 시 한 수가 나올듯한 곳이다. 정철의 관동팔경 중에서 제일경이라고 하는 월송정은 고려시대에 창건이 되어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퇴락하였던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연산군 때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중건하였다.

 

그 후 낡고 무너져서 유적만 남았던 곳을 1933년 이곳 사람인 황만영, 전자문 등이 다시 중건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월송에 주둔한 해군이 적기 내습의 목표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 1969년에는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재일교포로 구성된 금강회가, 2층 철근콘크리트 정자를 신축하였으나 옛 모습을 살필 길 없어 1979년에 헐어 버리고, 1980년에 고려시대의 양식을 본떠서 지금의 건물을 세웠다. 제일경이란 곳이기에 그만큼 많은 수난을 당했는가 보다.

 

 

비가 오는 날은 답사를 하면 안 되는지?

 

비가 추적거리고 온다. 지난 한 해, 이상하게 맑던 날이, 답사 길에 오르기만 하면 비가 뿌린다. 한번 길을 나서면 2~3일을 돌아오지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계획을 세우고 떠난 길이 무색하다. 그래도 어찌하랴, 내딛은 발길이니 다는 못 다닌다고 해도, 쉴 수는 없지 않은가?

 

월송정을 찾은 날은 딴 날마다 비가 더 내린다. 치에서 내려 한창을 망설인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그래도 입구까지 왔는데 길을 돌릴 수는 없다. 천천히 숲길을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에서 뿜어 나오는 향내가 코를 간질인다. 아마 이 월송정을 찾았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 소나무의 향기에 취하지는 않았을까?

 

 

 

화랑의 이야기는 동해안으로 이어지고

 

해송 숲에 둘러싸인 월송정. 월송정은 신라 때 사선(四仙)이라고 하는 영랑, 술랑, 남속, 안상이라는 하는 네 화랑이 울창한 소나무 숲에서 달을 즐겼다 해서 ‘월송정’이라고도 하고,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옮겨 심었다 하여 ‘월송’이라고도 한단다. 아름다운 곳은 전설이 만들어지고, 그 전설은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에 남게 하는 것이 우리네의 조상들이었다.

 

그만큼 멋과 여유를 즐겼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보면 위에 네 화랑은 강원도로 길을 잡아 금강산까지 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속초에서 한 호수에 반했다. 그 중 한 명인 화랑 영랑은 그곳을 떠나지 못했는데, 그가 반한 호수가 바로 설악산을 품고 동해와 맞닿은 석호인 ‘영랑호’이다.

 

 

영랑은 결국 그곳에서 공부를 하다가 속초 보광사 뒤편의 관음바위라는 곳에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도 있다. 동해 안에는 그만큼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겨울 설화가 아름다운 곳

 

월송정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니 이층 누각으로 된 누정답게 시야가 확 트인다. 그래서 이곳은 동해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울 경치가 더 아름답다고 하는 월송정. 아마 해송에 가지에 부러지게 쌓인 겨울눈인 ‘설화(雪花)’때문이란 생각이다.

 

 

정자를 내려 소나무 숲을 걸어본다. 비가 잠시 멈춘 듯 해 우산을 접는다. 해송가지에 맺혔던 물방울이 탁탁 소리를 내며 주변에 떨어진다. 그 소리가 더욱 경쾌하다. 신라의 사선인 영랑 등이 이곳을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월국에서 소나무 씨를 가져다 심었다는 전설도 다 그랬을 것이란 생각에 혼자 미소를 머금는다.

 

이곳을 찾은 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까? 아니면 조금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까? 그것은 여유의 차이일 듯하다. 아마 비가 오는 날 월송정을 찾았다면 누구나 다 수긍을 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비가 오는 날 그럼 험한 꼴로 정자를 누비고 다니느냐고. 글쎄다.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리지를 못했다. 이제 돌아본 정자가 불과 100여 개. 전국에 얼마나 많은 정자가 있는 줄 모른다. 한 고장에만도 100여개가 넘는 정자를 가진 곳도 있으니 말이다.

 

사연도 참 많다. 정자마다 그 안에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바람이 늘 머무는 곳이다. 그 바람들이 세상이야기를 전해주는 곳이 바로 정자이다. 그래서 난 정자를 찾을 때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바람이 전해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속초시 동명동에 소재한 보광사는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산사의 느낌을 받는 곳이다. 앞으로 20m 정도를 나가면 영랑호와 닿고,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시내 중심가까지도 걸어서 15분 정도면 나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사의 분위기를 맞볼 수 있기도 하다.

이 절은 예전 원효스님이 도를 닦던 자리라고도 전해지며, 골짜기 이름을 불당골이라도 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관음'이라고 각자를 해 놓았으며, 이 관음바위 위에서 '영랑스님'이 동해와 금강산을 바라보고 공부에 전념을 했다고도 한다.



소나무 숲길, 정말 명품이야

보광사 경내를 벗어나면 소나무 숲길이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숲길로 접어들면 온갖 산의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길 밖으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는 소나무 뿌리들을 보아서도 이 숲이 어제오늘 조성된 숲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도 그리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걸어오르면, 어린 아이들도 따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고는 한다.

산이라고 해도 그저 작은 소나무 동산 정도이다. 그 위로 오르면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 바위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과 눈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한다. 이 바위가 바로 영랑스님이 날마다 공부에 정진하던 '관음바위'라는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면 바위에 커다랗게 '관음'이라는 글자를 각자해 놓았다.




이렇게 좋은 바위에 마애불 하나 있었다면 정말 제격이었을 것이다. 동해에 뜨는 해를 바라다보는 마애불의 자비스런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이 바위를 볼 때마다 나는 저 각자가 마애관음이란 생각을 한다. 아마도 마애불을 그리고 싶은 어느 사람이 그럴 수 없어 대신 글자를 새긴 것이나 아닌지.



콧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나무 길

바위 한편에는 누군가 일부러 파 놓은 듯한 자국이 보인다. 저 밑에 혹 삼존불이라도 모셔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관음바위 위에 오르면 펼쳐지는 동해와 설악산, 그리고 금강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밑으로는 영랑호의 푸른 물이 소나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관음바위를 떠나 봉우리 위의 바위 밑을 통과한다. 흡사 석문과 같은 바위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사 저리 의지를 하고 믿고 살면 참 좋으련만. 한 20년 전에는 이 바위 아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시끄럽게 징을 두드려대고는 했다.




영랑호가 보이는 길로 접어든다. 몇 사람이 바삐 걸어 지나친다.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일까? 이 명품길이라는 소나무 숲길. 그리고 앞으로 펼쳐지는 자연경관. 이런 것을 어찌 그리 즐길 줄을 모르는 것인지. 그저 마음 바쁜 버릇은 어딜가나 볼 수가 있다. 괜히 나 혼자만 할일 없는 사람인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을 붙잡을 수 없으면, 세월을 타고가면 될 것을, 무엇을 그리 앞서려고 하는지.



그 길 끝에는 소나무 줄기에 흰 표식을 해놓았다. 숫자를 보니 1부터 10까지가 있다. 짧은 거리를 도는 곳이니, 이렇게 표시를 해놓고 한 바퀴를 돌 때마다 하나씩 옮기는 것인가 보다. 괜히 몇 개를 한 편으로 밀어본다. 바쁠 것도 없고, 굳이 다시 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곳 나무 틈사이로 보이는 동해와 영랑호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까지 한 마리 소나무 가지에 앉아 시끄럽게 짖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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