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 홍산면의 면소재지 안에는 남촌리와 북촌리가 섞여 있는 듯하다. 남촌리에 소재한 홍산 동헌과 북촌리에 소재한 홍산 객사의 거리는, 불과 몇 십 미터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객사란 예전 관리들이나 사신, 혹은 관청에 찾아 온 손님들이 묵는 곳이다. 대개 객사는 동헌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통상적이다.

 

객사는 중앙에 궐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있는 궁을 항해 망궐례를 올린다. 그리도 좌우 양편에는 공무를 보는 관원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한다. 이렇게 중앙에 궐패를 모셔 놓은 곳을 정당이라 부르고, 좌우에 묵을 수 있는 공간을 익실이라고 부른다. 즉 정당에 날개를 붙였다는 뜻이다.

 

 

좌우 크기가 다른 홍산 객사

 

현재의 홍산 객사는 불이나 소실이 된지 9년만인 조선조 현종 4년인 1838년에, 당시 군수이던 김용근이 재건을 한 것이다. 대개 객사의 좌우 익실은 그 크기를 같게 하는 법인데, 홍산 객사는 서로 다르게 만들었다. 동쪽 익실은 다섯 칸으로 동편 세 칸은 대청마루를 놓고, 남은 두 칸에 방을 뒤로 물려 드렸다.

 

서편의 익실은 동편 익실보다 두 칸이 좁은 세 칸이다. 맨 서편 한 칸을 누마루로 처리하고, 남은 두 칸을 방을 드렸다. 동편 익실의 두 칸 방은 마루방이며, 서편 익실의 두 칸 방은 온돌방이다. 중앙 정당의 지붕은 양편의 익실의 지붕보다 높이어, 맞배지붕으로 구성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홍산 객사를 재건을 할 당시 목수 20여 명이 5개월 동안, 연인원 4,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건립하였다고 한다. 중앙의 정당은 아무런 시설이 없이 세 칸으로 구성한 빈 공간이며, 익실과는 다르게 처마 밑을 화려하게 장식을 해 이곳이 특별한 공간임을 알리고 있다.

 

객사 동편에 은행나무에서 객사의 연륜을 알아

 

객사 동편에는 한 겨울 잎을 다 떨어트리고 가지만 남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750년이 넘은 고목이다. 이 은행나무는 현재 홍산객사 은행나무라는 명칭으로, 부여군 향토유적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나무의 높이는 15m 정도이며, 밑동의 둘레는 7.5m에 달하는 거대한 은행나무이다.

 

 

이 홍산 객사의 은행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영험한 나무라고 전해진다. 마을에 변고가 생기거나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는, 나무가 울거나 불빛이 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마을 주민들이 위급한 일이 생길 때, 이 나무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고 전해진다. 마을 주민들은 정월 초하룻날 이 나무에 제를 올린다는 것이다.

 

이 은행나무의 수령을 보면 최초로 홍산 객사가 지어진 것은, 고려 때부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흔히 객관이라고도 부르는 객사는 고려시대에 지방에 두기 시작하였으며, 고려 때는 객사사(客舍史)’라는 향직을 두어 관리하도록 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홍산 최초의 객사는 아마도 고려 때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홍산 객사. 충남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홍산 객사 안을 돌아본다. 동편 익실은 두 칸의 방을 드리고, 남은 세 칸의 대청 주변을 창호로 바람을 막았다. 서편 익실은 개방을 한 형태이다. 겨울이면 따듯한 온돌에서 묵고, 여름이면 시원한 대청에서 바람을 쏘이면 쉬었을 것이다.

 

 

그저 관리들이 공무를 보면서 쉬어가는 곳이지만, 이런 객사 하나도 예술적인 감각으로 지어냈다는 점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한다. 마른가지만 남은 은행나무이지만, 그 당당한 모습을 눈에 담으며 뒤돌아선다. 올 여름에는 수령 750년의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보아야겠다.

국보 제305호인 세병관은 그 규모면으로는 국보 제224호인 경복궁경회루와, 국보 제304호인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한다. 단층 팔작지붕으로 된 세병관은 <통영지> 공해편에 보면,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인 1604년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2박 3일의 통영답사 2일째인 10월 13일 오후에 찾아간 세병관. 통영시 문화동의 이 일대는 사적 제402호인 통영 삼도수군 통제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예전 통제영은 전각이 100여 동이 서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세병관을 비롯하여 운주당, 백화당, 중영, 병고, 교방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이 있던 대규모 병영이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통제영

 

통제영의 중심에 있는 세병관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경상, 전라, 충청 3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이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그 위용은 예전과 다름이 없다. 현재 이곳 통제영은 복원계획을 세워 많은 건물이 세병관 주변에 새로 들어서고 있다.

 

290년 동안이나 3도 수군을 지휘하며 우리나라의 바다를 굳건히 지키고 있던 통제영. 그러나 고종 32년인 1895년에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지고, 일제는 우리민족의 정기 말살정책을 펴 지역의 많은 문화유산과 전통민속 등을 훼파할 때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세병관이 남아있어 고맙다

 

세병관 주변은 공사 중으로 복잡하다. 중장비의 굉음소리가 요란한 공사장을 피해, 세병관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들어선다. 멀리서부터 그 위용을 보았기에 좀 더 자세히 세병관을 들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병관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 2벌대로 쌓았다. 기단의 윗면에는 전돌을 깔았고, 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앞뒤에는 간살을 작게 잡은 퇴칸을 설치하였다. 현재는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원래는 평면의 기능에 따라 벽체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았으며, 중앙 뒷면에는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우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래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의 또 다른 이름 ‘괘궁정’

 

세병관 밖을 한 바퀴 돈 다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측변 벽 위편에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왜일까? 대개 이런 군영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림이 아니던가? 반대편에도 역시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림도 많이 퇴색하고 벽이 높아 자세히 식별을 할 수 없지만, 틀림없이 비천인상이다.

 

세병관 전각 안을 찬찬히 살피면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바깥 세병관의 현판이 걸린 안쪽으로 작은 현판이 높다랗게 걸려있다. ‘괘궁정(掛弓亭)’, 말 그대로라면 활을 걸어두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곳이 군영의 중심이었으니 이해가 간다. 이렇게 삼도수군을 호령하던 곳인 세병관에서 만난 작은 현판하나가, 선조들의 마음의 여유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든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무엇 하나 놓칠 수가 없다. 그래서 일일이 하나하나를 짚어보아야만 한다. 그저 겉으로만 후다닥 보고 다음 일정을 따라갔다고 하면, 나중에 꼭 후회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 때 삼도 수군을 호령하던 세병관, 통제영의 복원이 이루어지는 날 그 위용을 만나러 다시 찾아보아야겠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