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북상면 중산마을에는 지은 지가 150년 정도 되어 보이는 고택 한 채가 있다. 주인인 임종호는 2~3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현재는 구 가옥 곁에 새로 거처를 마련하고 모친이 살고 있다고 한다. 주변 제각 앞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은, 그 집에 살고 계신 분이 자신의 질부라고 하시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신다.

이 집은 치목구조나 여러 가지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선조 말경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어르신은 120~130년 정도 되었다고 하신다. 솟을대문 안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고, 그 뒤편 우측에 광채가 있다. 그리고 사랑채와 나란히 뒤쪽으로 안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돌담으로 집 전체를 둘러놓았다. 집의 형태로 보면 이곳에서 꽤나 잘 살았던 집안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다섯 칸으로 지은 사랑채의 풍취

사랑채는 모두 다섯 칸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자연석 주초를 그대로 쓴 집은 기둥을 모두 사각으로 치목을 하였다. 이런 치목의 방법이나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목재들을 보아도, 지방의 목수들이 다듬은 손길이 아니다. 사랑은 바라다보면서 좌측에 아궁이를 두고, 두 칸 마루방을 드렸다. 그리고 안채로 드나들 수 있는 누마루 한 칸과, 온돌방 한 칸을 계속 두고 있다.

우측 온돌방 앞으로는 누마루에 난간을 둘러 정자방으로 꾸며 놓았다. 사랑채 뒤편으로 길게 늘어선 광채는 중문채를 겸하고 있는 듯 보인다. 광채 옆으로는 담을 터 바깥으로 출입을 하게 하였는데, 그 문을 통해 제각으로 드나든 듯하다. 광채는 우측 한 칸은 방을 드리고, 가운데는 광채를 그리고 좌측으로는 뒤주를 삼았다.


광채

그리고 그 끝에는 다시 한 칸의 방을 드린. 네 칸으로 구성이 되어졌다. 아마도 사랑채 쪽의 방은 남자가, 안채 쪽의 방은 여자가 사용한 듯하다. 사랑채 방향의 방이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어, 남은 공간에는 활주를 대고 지붕을 내어 달았다.

안채에도 굴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채와 나란히 뒤편에 조성한 안채 역시 다섯 칸이다. 좌측으로부터 한 칸의 부엌과 안방, 윗방 그리고 대청마루 뒤편에 문을 달아 신주방으로 꾸민 듯하다. 맨 오른쪽의 건넌방은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난간을 두르고 높임마루를 달아냈다. 임종호 가옥의 특징은 대청마루 뒤편에 마련한 신주방이다.


안채

부엌의 뒤편에도 작은 부엌방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런 구성은 딴 곳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사랑채와 광채, 그리고 안채의 동선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조성한 임종호 가옥. 전체를 이으면 ㄷ 자 모형으로 구성이 되어있는 앞으로는, 안마당을 시원하게 만드는 정원이 있다. 그 정원 한 가운데 흙담으로 꾸민 굴뚝이 서 있다.

“어르신 저 집의 마당 가운데 굴뚝은 사용하는 것인가요?”
“얼마 전까지도 사용을 했지. 지금은 살림을 하지 않으니 쓰지 않지만”
“그런데 왜 마당 가운데에 굴뚝을 마련했나요?”
“낸들 아나 여기저기 연기가 나면 안 좋으니까 그랬나보지.”
“그럼 안채와 사랑채에도 굴뚝이 모두 저 가운데로 빠지나요?”
“처음엔 그렇게 만들었지. 지금은 잘 모르겠구먼.”


안채 안마당에 조성한 굴뚝과 터진 담

왜 모든 연도를 마당 한 가운데로 모아 굴뚝을 낸 것일까? 주인 잃은 집은 휑하기만 하다. 언제가 다시 시간을 내어 후손들이 모인다는 명절 때 찾아보아야겠다. 궁금증을 풀 수 있으려는 가는 모르겠지만.

요즈음 들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이는 고택만이 아니고, 각종 문화재나 먹거리, 심지어는 우리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길과 동, 식물 등 다양한 방면에서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이렇게 무궁한 소재를 갖고 있는 것 중에서, 아무래도 문화재라는 것은 약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고택. 그것이 사적이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던 간에, 그저 찾아가 보는 것보다는 이모저모를 따져보는 것이 한결 재미있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이냐를 먼저 생각하고 그 집의 특징을 살펴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집이 눈앞에 그려지기도 한다.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소재한 경남유형문화재 제407호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 우리 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펴본다.



함양 오담고택은 사랑채와 안채가 깉은 형태로 구성이 되어있다. 건축물을 볼 때 그 형태를 보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주변의 대지(아래)를 살펴보면 과거 그 집의 가세를 판단 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종가에서 분가한 양반저택인 오담 고택

오담 정환필(1798~1859)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의 12대손이다. 선생은 종가에서 분가해 와 정여창 선생의 고택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종두리에 기록된 상량문을 보면 사랑채는 1838년에, 안채는 1840년에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으며, 자연석을 3~4단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오담 고택은 종가에서 분리해 온 영남 양반집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조선 후기 주거건축의 양식과 가구기법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오담 고택은 최근 복원과 보수를 한 듯한데, 이런 면을 찬찬히 살펴보면 우리 고택이 좀 더 자세히 보인다.

1) 먼저 집의 전체적인 구조를 알아보자




집의 전체적은 구조란 와가인지 초가인지를 본다. 이런 형태야 한 눈에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와가에도 팔작지붕, 맞배지붕, 합각지붕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다. 위 오담 고택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벽에 달아낸 형태로 자칫 팔작지붕으로 볼 수도 있다. 초가의 경우에도 그 이엉을 얶어 용마름을 앉는 방법이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그 집의 툇마루나 대청, 방의 꾸밈과 기단, 기둥 등을 자세히 살펴본다. 기단은 장대석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일반 부정형의 돌을 사용했는지를 본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인지, 팔각이나 사각,혹은 원형기둥인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집의 구성고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고택에는 수 많은 집이 있다.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행랑채, 대문채, 아래채, 광채, 별당채 등 그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2) 집의 뒤편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




고택에는 많은 문들이 있다. 대문을 비롯해 중문, 협문, 쪽문 등 큰 집의 경우에는 집 안에 문에 10여 개가 되는 수도 있다. 하기에 그 문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느 용도로 사용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문의 경우에는 바깥 중문과 안 중문이 있고, 때로는 담에 쪽문을 내어 사용하기도 한다. 하기에 그 문의 특징을 살펴보고 그 쓰임새를 알아보아야 한다.


오담 고택에는 문이 그리 많지는 않다. 최근에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랑에서 안채로 통하는 협문은 나무로 꾸몄다. 대문의 경우에는 소슬대문 옆에 쪽문을 달아낸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문은 대개 대문을 열지 않고, 집안의 식솔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우리 고택은 문 하나라도 그냥 내는 것이 아니다. 문을 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거기에 따른 내적 사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집 뒤편을 돌아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대개는 정면을 많이 보는데, 집 뒤편에는 굴뚝을 비롯해 벽의 형태, 배수로 등 볼 것이 많다. 또한 굴뚝은 어떤 형태로 만들어 졌는지도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3) 볼품 없는 작은 것 하나도 글이 된다.





고택을 둘러보면 가재도구가 있다. 실생활에 사용했을 이런 것들은 고택을 둘러보면서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툇돌은 어떻게 놓았는지, 마르 밑의 공간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보아야 한다. 부엌은 창문을 어떻게 내었으며, 환기를 돕는 까치구멍은 어떤 형태인지도 살펴보자. 그리고 시렁은 어디에 놓았는지, 시렁 위에는 무엇을 올려 놓았는지도 빠트리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도 여기저기 널려있는 많은 가구들과 문짝의 형태, 또는 난간은 어떻게 꾸며졌는지도 보아야 하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찾아보다가 보면, 집집마다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 제대로 꾸민 집인지를 알아보자



오담 고택을 돌아보면서도 그렇지만 복원을 하면서 정확하게 하지 못할 경우가 있다. 복원이란 말 그대로 예전에 형태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복원이 되었다는 집을 찾아가 보면, 황당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오담 고택의 경우에 사랑채와 안채 중간 한편에 장독대를 마련하였다. 시멘트로 바른 것은 그렇다치고 장독대에 담장을 둘러 놓았다. 보기가 좋은 수도 있지만, 문화재란 항상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담장을 둘러 놓은 것도 보기가 껄끄러운데, 사랑채 뒷방을 보면 앞쪽 방보다 방바닥이 낮게 되어있다. 그리고 방의 층 간격이 넓어 오르내리기도 버겁게 보인다. 원래 이런 형태였는가를 알아보니, 복원을 하면서 형태가 달라졌다고 한다. 고택 답사를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렇게 원형이 변형이 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돌아보면서, 그 소중함을 먼저 깨우치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런 문화재 답사는 단지 사진을 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사고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쉽지 만은 않은 문화재 답사. 앞으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생각한다. 답사를 하시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쓰기 싫은 글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 혹은 ‘복원이 잘못 되었다’라는 글 등이다. 나는 그냥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전국을 발품을 팔며 다니는 것도 힘이 버거운데, 문화재의 잘못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자연 열이 뻗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택과 정자가 많은 곳이니, 들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는 한옥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만만찮다. 잘만 관리를 했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러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솟을대문의 안쪽

하동정씨 고가의 아름다움

지곡마을이라고 하는 개평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옷 안에 감추고라도 답사를 다닐 수밖에. 이 마을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이 된 하동정씨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너른 정원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게 펼쳐진 정원에 나무 몇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다.

뒤편에 멀찍이 서 있는 - 자형의 고택이 바로 이 집의 안채이다. 1880년에 지은 이집은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 안채만 남아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이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 자형으로, 남도의 특징인 개방형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한편에 부섭지붕을 달아 멋을 더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팔작지붕으로 오해를 살만도 하다.



- 자형의 6칸 안채와 벽에 달아낸 부섭지붕(가운데), 그리고 부섭지붕 아래 툇마루(아래) 


부섭지붕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대개 부섭지붕은 측면에 놓고 그 밑을 좁은 마루를 놓는다. 하지만 이 부섭지붕을 달아 전체적인 집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꾸민다. 지곡마을에는 이 부섭지붕을 단 집들이 보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된 집이다. 툇돌 아래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지 않도록, 기와로 마감을 한 것이 정겨워 보인다. 시원한 두 칸 대청은 뒷문이 열려 돌담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다. 집은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두 칸 대청을 내었다. 그리고 두 칸 방과 한 칸 부엌이 있다. 간결하게 꾸며진 집이 선비의 단아함을 보는 듯하다.



대청 뒷벽에 시원하게 낸 문과 툇돌아래 낙수가 떨어지는 곳(가운데) 그리고 안방의 외벽(아래)

뒤로 돌아가 본다. 안방의 벽이 남다르다. 기둥을 여러 겹으로 가로 질러, 그것이 그대로 문양이 되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동편 부섭지붕 밑으로는 마루를 놓아 시원하게 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또한 남부지역의 특징 있는 가옥구조이다.

반대편 서편 벽에도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벽 위로 까치구멍이 있는데, 안을 모두 발라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까치구멍을 막아놓았을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을 보일러실로 개조를 하였다. 그리고 안에는 부엌의 벽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부섭지붕은 후에 달아낸 것일까?



세상에 이럴 수가. 부엌문 안을 벽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부엌 밖 부섭지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엌문을 열어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엌문 안에 담이 있고, 위는 창으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이 부엌은 어떻게 출입을 할 수 있을까? 방 앞으로 난 툇마루 끝에 달린 문으로 출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문의 안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집을 고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된 곳이 있다면 제대로 해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솟을대문 안에 새로 지은 집이 있다. 뒤편을 보니 굴뚝이 이상하다. 이건 또 무슨 굴뚝일까? 굴뚝이야 마음대로 형태를 할 수 있으니, ‘이렇게도 하나보다’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우진각지붕을 올린 세 칸짜리 집 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까?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도 사랑채가 있을 장소는 아닌 듯하다.


솟을대문 안 우측에 새로지은 우진각 지붕의 집. 사랑채인 듯하다. 뒤편의 굴뚝

문화재의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가가 이렇게 여기저기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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