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안개가 심하게 끼었다. 안개가 걷히면 답사를 가리라고 마음을 먹고 오전 내내 기다려 보았지만, 안개가 걷힐 것 같지가 않다. 오후 두시가 지나 충북 음성으로 향했다. 네 시가 다 되어서 도착한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공산정 마을. 마을 입구에서 게이트볼을 즐기고 계시는 어르신들께 고택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친절히 가르쳐 주신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초가지붕이 보인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3호인 음성 서정우 가옥이다.

 

대문채를 붙여지은 사랑채의 단아함

 

우선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편안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돌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는 뒤편에 대문채를 달았는데, 이러한 형태가 우리나라 가옥 구조상의 한 형태란다. 앞에 사랑채를 두고 뒤편으로 대문채를 붙여 내었다. 사랑채와 대문채가 ㄴ 자 형태로 자리를 잡고 안채가 뒤편에 ㄱ 자 형태로 자리해, 전체적으로 보면 ㅁ 자형의 가옥구조를 하고 있다.

 

 

사랑채는 잘 다듬지 않은 돌을 이용해 이단으로 축대를 쌓은 후 그 위에 마름모꼴의 주추를 놓았다. 앞에는 마루를 놓고 뒤편으로 방을 드렸다.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좌측에는 창고 방을 한 칸 드리고 방 두 칸에 이어서 큰 문을 단 사랑방을 만든 소박한 사랑채의 모습이다. 사랑채 뒤편으로는 대문채를 이어지었다. 대문채는 방 한 칸을 사랑채에 달아내고, 대문과 두 칸의 곳간을 이어 단출한 모습이다. 전체적은 집안 구조가 중부지방 민초들의 삶이 배인 듯한 형태이다

 

돌과 기와를 이용한 아름다운 담벼락

 

서정우 가옥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사랑채와 안채 등의 담벼락이다. 일반적으로 집의 담벼락에 문양을 넣을 때는, 꽃이나 나무, 새, 동물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러나 서정우 가옥의 담은 돌과 기와를 이용해 문양을 만들었다. 돌은 네모난 것들을 구해 마름모로 놓고, 그 위에 기와를 이용해 줄을 맞추었다. 얼핏 보아도 아름답다.

 

 

 

그저 무료한 담벼락을 만드는데 비해, 서정우 가옥의 담벼락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멋을 내었다. 마침 함께 답사 길에 나선 친구가 한옥을 지을 때 관계하는지라, 이 담벼락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한다. 전통 가옥을 보수하느라 전국을 다녀보았지만, 이런 담벼락의 형태는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무료한 담벼락을 돌과 기와로 못을 낸 서정우 가옥.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가보다.

 

평범한 안채의 부엌에도 무엇인가 있다

 

사랑채의 뒤편에는 ㄱ 자로 꺾어 지은 안채가 있다. 안채는 중부지방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배열하고, 꺾인 부분에 대청을 드리고 건넌방을 꾸몄다. 대청은 두 칸으로 달았으며, 뒤편에 커다란 창호를 두 곳을 내어 전체적으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대개는 판자문을 하는데 비해, 서정우 가옥은 대청의 뒷문을 창호로 내어 멋을 냈다. 아마 이집을 지을 때부터 집주인이 꽤나 멋을 아는 분이었을 것 같다.

 

 

 

서정우 가옥은 안채의 건축연대가 19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한다. 상량문에는 1924년에 다시 고쳐지은 것으로 적고 있다. 사랑채도 안채를 보수할 때 지은 것으로 본다. 그저 평범한 안채에는 부엌이 조금 특이하게 만들어졌다. 커다란 부엌문을 달고 그 옆에 작은 문을 하나 만들었다. 그리고 부엌 바깥 담벼락의 위에는 나무를 넓게 띄어 창을 낸 까치구멍을 냈다. 연기가 잘 빠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람을 피하느라 비닐로 까치구멍을 막고 환풍기를 달아, 조금은 멋이 감해졌다는 느낌이다. 부엌의 담벼락 역시 사랑채의 담벼락과 같이 돌과 기와를 이용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색다른 멋을 낸 서정우 가옥.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뒤울안 텃밭과 판자굴뚝이 백미

 

서정우 가옥의 또 하나 아름다움은 뒤울 안에 있는 텃밭이다. 안채의 뒤편이 비탈이 진 것을 축대를 쌓아 평평하게 만들고 그 곳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다. 텃밭 옆에는 역시 축대를 쌓은 후 장독대를 꾸몄다. 담장이 둘러쳐진 안에 아기자기한 민초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안채의 뒤편에 선 굴뚝이 눈에 들어온다. 널판자로 네모나게 만든 굴뚝이다. 굴뚝의 끝에도 사이를 띄워 덮개를 만들었다. 작은 것 하나하나가 참으로 아름답다는 느낌이다.

 

 

 

중부지방 전형의 민가 가옥이라는 음성 서정우 가옥은 오밀조밀한 멋이 있다. 튀어나지 않고, 안으로 스며드는 멋. 우리 고택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작은 멋 하나가, 사람을 참으로 기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 고택 답사는 늘 즐겁다. 사람이 살고 있어 여기저기 촬영을 하는데 힘이 들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훈훈함이 있어서 더 좋다는 생각이다. 서정우 가옥을 뒤로하며, 앞으로 만날 많은 고택들을 미리 그려본다. 그래서 안개 자욱한 날이지만, 답사 길이 즐거운가 보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고개 너머를 ‘잿말’이라고 한다. ‘잿말’이란 <고개마을>이라는 뜻이다. 잿말은 충주군 감미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시 음성군에 편입된 지역이다. 산세가 수려하고 물이 맑아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이수일, 병조참판을 지낸 정우명 등이 이 잿말 출신이다. 특히 효자를 배출한 마을이란 점에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이 상당한 곳이기도 하다. 효자 김대환은 부친이 심부전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자, 20세의 젊은 나이에 스스로 장기를 이식해 부친을 회생시키기도 했다.


이완대장의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곳

이러한 잿말에 중요민속문화재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김주태 가옥이 유명한 것은 이곳에서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꿈을 키웠다는 것이다. 이완(1602∼167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인조 2년인 1624년 무과에 급제한 후 평안도 병마절도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등의 자리를 역임하였다.

이완대장은 48세인 1649년 효종이 북벌 정책을 계획할 때, 어영대장, 훈련대장을 시작으로 병조판서를 지냈다. 이완대장은 당시 제주도에 표류했던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신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승하하자, 북벌 계획이 전면 중단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종 때에는 수어사로 임명되었으며,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사대부가의 위엄이 서린 사랑채

이완대장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김주태 가옥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지닌 고택이다. 김주태 가옥은 300여 년 전에 건립하였다고 하지만, 이완대장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의 집이 현재의 김주태 가옥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사랑채는 상량문에 고종 광무 5년인 1901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김주태 가옥의 사랑채는 솟을대문을 지나 석축으로 2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 자로 사랑채를 앉혔다. 남향으로 지어진 사랑채는 지체 높은 사대부가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준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를 오르려면 계단을 올라 앞마당이 있고, 그 위에 축대를 올려 사랑채를 지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사랑채는 솟을대문의 지붕과 같은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을 들어서 사랑채를 마주하면 좌측으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아궁이는 앞에서는 벽으로 막혀 볼 수가 없다. 우측 끝에는 누마루를 한단 높여 누정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전면 모두 창호로 문을 냈으며, 뒤편에는 양편으로 작은 문을 만들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하인들이 묵을 수 있는 행랑방들이 줄을 지어있다. 굳이 사랑의 어르신을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를 한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지어진 집이라는 느낌이다.



 

대문채엔 난 쪽문의 비밀

김주태 가옥의 대문채에는 방이 없다. 대문의 양 편으로는 곳간을 드렸다. 그런데 이 대문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대문을 마주하고 우측을 보면 작은 문이 하나 있다. 쪽문이라고 하는 이 문을 열면, 천정이 낮은 곳으로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즉 대문을 열지 않고도, 이 문으로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만들었다.

이 문은 언제 사용하였을까? 혹 사랑채에서 바라보면 대문으로 드나들기가 버거운 하인들이 이문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굳이 번거롭게 대문을 열지 않고, 이문을 통해 출입을 하였을까? 그렇다고 하면 위에 처정을 두어 굳이 머리를 숙이지 않도록 했을 터인데.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생긴 질문과 답이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재미를 느껴보기도 한다.



철저히 통제가 된 안채

사랑채의 뒤편에 자리한 안채는 안 담장을 둘렀다. 그러나 사랑채를 지나 안채를 들어가려면 좌측으로 난 문과, 우측에 사랑채와 안채와 연결이 된 담장의 일각문을 통하지 않고는 안채를 들어갈 수가 없다. 안채의 담장에는 또 다시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곳을 통하지 않고 안채를 출입하기는 어렵다. 결국 철저하게 통제가 되어있는 형태이다.

김주태 가옥의 안채는 T 자 형태로 지어졌다. 이런 형태는 경기지방의 사대부 가옥에서나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안 담장에 낸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ㄱ 자형으로 자리하고 좌측에는 광채가 있다. 안채는 앞마루를 높인 건넌방과 두 칸 대청, 그리고 사랑방이 있다. 꺾인 부분에도 방과 부엌이 달려있다. 장대석으로 놓은 기단 위에 안채를 지었는데,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그대로 지켜냈다.



담장과 굴뚝의 멋스러움

김주태 가옥의 또 하나의 멋은 담장이다. 황토와 기와를 이용해 쌓은 담장의 문양, 수키와를 엎어놓고, 그 사이에 황토를 넣어 문양을 만들었다. 밑에는 돌을 다듬지도 않고, 그냥 황토와 섞어 쌓았다. 김주태 가옥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담장이다. 예전부터 이런 담장을 했는지, 아니면 최근 보수룰 하면서 이런 담장을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담장 하나가 주는 재미는 상당하다.

또 하나의 멋을 찾으라 한다면 굴뚝이다. 기와와 백회를 이용해 조성한 굴뚝은 낮고 작다. 전체적인 집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거의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굴뚝은 중간에 네모난 작은 창을 내고, 위는 사각형의 낮은 피라미드처럼 만들었다. 이런 작은 것 하나까지도 주의 깊게 꾸민 집이다. 이러한 담장과 굴뚝이 있어,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멋스럽게 만들었다. 김주태 가옥만이 갖고 있는 공간 구성은 그래서 뛰어나다.

굴뚝 이야기, 알고 보면 흥미롭다. 옛 고택 답사를 하면서 옛 집에서 보는 것들이 비단 굴뚝만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굴뚝도 굴뚝이지만 옛 집에는, 집집마다 나름대로의 볼거리들이 많이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은 굴뚝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굴뚝이 그냥 연기를 빼는 용도로만 사용이 되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다. 굴뚝을 보면 나름대로의 형태에서 그 지역적 특색이나, 집 주인의 성품, 심지어는 그 집안의 가세를 짐작할 수도 있다. 왜 굴뚝에서도 그런 특색이 있다고 보이는 것일까? 물론 추론일 수도 있겠지만, 그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장굴뚝이다. 아래는 속초 김근수 가옥의 담장 안에 연도를 뺀 굴뚝이다, 아마도 심한 바람을 이겨낼 수 있도록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에 따른 굴뚝의 형태

굴뚝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고 앞서 설명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굴뚝은 강원도 동해안 등 3 ~ 4월 심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는 굴뚝을 별도로 조형을 하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담장 안에 연도를 이어 굴뚝을 만든다. 굴뚝도 상당히 견고하게 쌓는 편이다. 아마도 그러한 것들은 바람으로 인해 굴뚝이 넘어가지 않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위는 경기 양평의 이항로 생가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전북 고창의 인촌생가의 낮은 굴뚝이며, 아래는 익산 가람 이병기 생가의 굴뚝이다. 내룍이라 그런지 굴뚝이 낮게 조성이 되었다.


서해안 인접 지역 역시 상당히 견고한 굴뚝을 조성한다. 이곳도 바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와는 달리 내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굴뚝들이 나타난다. 지역으로 보면 경상도 지방의 굴뚝이 화려하고 크다. 이렇게 화려하게 굴뚝을 조성하는 것은, 이 지역의 고택들이 상당히 넓고, 큰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굴뚝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집 자체가 크기 때문이다.

경기도 지역과 충청남도 지역의 굴뚝들은 대개가 낮다. 집이 넓다고 해서 굴뚝을 높게 만들지를 않는다. 이런 것은 그 지역의 특징이다. 이렇게 낮은 굴뚝을 조성한 것은, 일기가 비교적 순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위는 서천의 이하복 가옥의 굴뚝이다. 아래는 부여 민칠식 가옥의 굴뚝이다. 큰 집에 비해 낮은 굴뚝을 조형했다. 


가세에 따른 굴뚝의 형태

집안의 가세를 보려면 광을 보라고 했다. 오래도록 권력을 잡았던 집인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작은 집이 있는가 하면, 안채나 사랑채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곳간채가 상당히 큰 집들이 있다. 이런 경우 그 집의 굴뚝을 보면 상당히 높게 축조가 되었다. 바로 부의 상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만 같다.



위는 강원도 강릉 지역이 대표적인 선교장의 굴뚝이다. 가운데는 경남 거창의 정온 생가의 굴뚝이며, 아래는 함양 오담고택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게 조형되었다.


또 오랜 세월동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나 든 집들을 보아도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그만큼 많은 불을 땠다는 것이다. 많은 양을 불을 때려면 아무래도 낮은 굴뚝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굴뚝의 형태는 단순히 불을 때고 그 연기를 뿜어대기 위한 용도만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200여 채 이상의 고택을 답사하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면, 굴뚝 하나에도 그 집안의 내력이 함께 자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는 서산 김기현 가옥의 굴뚝이며 아래 좌측은 전주 학인당의 굴뚝이고, 우측은 충북 괴산 청천리 고가의 굴뚝이다. 굴뚝이 높고 화려하게 조성이 되었다.


집안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하기 위한 조형물인 굴뚝. 아마도 지금까지 보아온 고택의 몇 배를 더 답사를 하고나면, 나름대로 ‘굴뚝의 미학’ 정도 한 권쯤은 쓸 수 있지는 않으려는지. 그래서 고택답사의 발길은 늘 바빠진다.(연재 끝)

처음에 굴뚝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일 먼저 궁궐의 화려한 굴뚝에 대한 글을 썼다. 그리고 사대부가의 기와집의 굴뚝에 대한 글을 적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대부가도 있지만, 주로 민초들이 살던 초가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궁궐의 굴뚝과 사대부가인 기와집의 굴뚝도 특징이 있지만, 초가의 굴뚝은 또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초가는 지붕을 얹은 짚이 불에 잘 붙는다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비교적 굴뚝을 높게 올리거나, 멀리 떨어져 세운다. 대개의 경우는 높이 올리는 편인데, 이는 낮은 굴뚝을 통해 불똥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48호 정원태 가옥의 사랑채 굴둑. 전형적인 초가의 굴뚝이다. 제천시 금성면 소재. 이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 


초가의 굴뚝은 높거나 멀거나

문화재 답사를 다니면서 한 가지 답답한 일을 겪는다. 그것은 바로 복원이라는 허울아래 망가지고 있는 우리의 문화재들이다. 전문적인 보수 기술자들이 복원을 한다고 믿고 있는데, 정작 돌아보면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괜히 겉멋을 부리려고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 마음이 아프다.

초가의 굴뚝인 그 구조상 굴뚝이 지붕보다 높아야 한다. 아니면 연도를 길게 빼어 집과 멀리 떨어트려 놓는다. 이러한 이유는 불을 붙기 쉬운 지붕 때문이다. 사대부가에서는 장작을 주로 때지만, 민초들은 삭정이나 검불 등을 주로 땐다. 그러다가 보니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짚으로 이은 초가는 불똥만 튀어도 불이 붙을 수가 있다.

(사진은 용인 한국민속촌에 있는 초가집 굴뚝이다. 하나는 지붕보다 높게 올라가고, 돌로 쌓은 굴뚝은 집에서 떨어져 있다)

그런 화재를 염려해서 굴뚝을 높게 올리는 것이다. 굴뚝이 높으면 그만큼 불똥이 튈 확률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높게 할 수가 없을 때는 굴뚝을 연도를 길게 빼서 멀리 놓는다. 이 또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어이없는 요즘 초가의 굴뚝, 아예 굴뚝이 없기도

초가의 굴뚝이 더 높은 이유는 민초들의 아픔이기도 하다. 잘 마른 장작하나 제대로 땔 수가 없는 지난 시절, 그나마 나무 삭정이나 검불이라도 많이 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땔감들은 굴뚝을 통해 곧잘 시뻘겋게 불똥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서 화재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뚝을 높이거나 멀리 설치를 해야만 한다.


위는 사적 제230호인 천안의 유관순 생가지의 굴뚝이다. 전형적인 민초들의 굴뚝 모습이다. 아래는 충북 문화재자료 제38호인 청원 낭성 관정리민가의 굴뚝이다. 연도에서 솟은 연소통이 짧다. 이 집이 있던 곳은 바람이 많지 않았다고 하지만, 초가의 연소통치고는 너무 짧은 감이 있다.


이런 초가 굴뚝의 특성은 복원이라는 허울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질이 되어버렸다. 굴뚝의 연도를 뺀 후 길게 연소통을 올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굴뚝 연도 끝에 작은 통 하나를 박아놓는 것으로 그쳤다. 만일 그런 곳에 검불이나 삭정이들을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을 지핀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조심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그런데 여기저기 옛 집들을 돌다가보니, 더 가관인 집도 있다. 아궁이는 있는데 아예 굴뚝이 없다. 세상에 굴뚝이 없는 집도 있을까? 그렇다면 연소는 어떻게 할까? 그저 대충 집만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굴뚝은 집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런 굴뚝이 없이 집을 지어놓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위는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의 초가집 굴뚝이다. 바람이 강한 곳이기 때문에 담장에 연도를 집어 넣었다. 가운데는 중요민속문화재 제39호인 고창 신재효 생가의 굴뚝이다. 낮지만 연도를 길게 빼어 집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아래는 삼척시 도계의 신리 너와집 굴뚝이다.


사는 집과 살지 않는 집의 차이

이런 오류는 사람이 살고있는 집과, 사람이 살고있지 않은 집이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사람이 살고 있으면 제대로 된 굴뚝이 보인다. 문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집들이다. 거의 제 몫을 못하는 보여주기 위한 굴뚝을 만들어 놓고 있다.

초가집에도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 가면 굴뚝이 담장에 올라앉아 있다. 그것도 항아리로 마련하였다. 바람이 센 지역에서는 이런 굴뚝이 보이기도 한다. 담장 안에 연도를 집어넣고, 그 위에 항아리를 올려놓은 것이다. 바람에 무너지거나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위는 수원 파장동에 있는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광주이씨 월곡댁의 굴뚝을 세우는 연도이다. 연도만 마련하고 연소통은 마련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가운에와 아래는 남원 운봉에 있는 가왕 송흥록의 생가지에 세워진 집이다. 측면을 보고, 뒷면을 보아도 굴뚝이 아예 보이지를 않는다.


굴뚝 하나에도 철학이 있는 우리네의 집들. 그 굴뚝을 돌아보면, 나름대로의 멋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의 미학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늘 쓰고 싶었던 글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굴뚝’에 대한 글이다. 남들이 들으면 ‘문화재 답사가 맞아? 무슨 굴뚝을’이라고 핀잔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뚝은 단순히 연기를 내는 곳이 아니다. 물론 그 용도야 연기를 내보내 불이 잘 들게 하기 위한 용도지만 말이다.

굴뚝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 그 종류가 어지간히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궁이나 반가의 집, 또한 민초들의 집을 다닐 때마다 난 굴뚝을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다. 굴뚝 하나에도 조형의 미가 있는 우리의 집들.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그 첫 번째로 경복궁의 굴뚝을 둘러본다.


왜 하필이면 굴뚝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 그런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하나뿐이다. ‘굴뚝이 없는 집은 존재할 수 없다. 필요 없는 것 같지만, 굴뚝은 그 어느 것보다도 필요한 구조물이다. 그러면서도 굴뚝은 나름의 철학을 지니고 있다’

두 개의 보물을 지닌 경복궁의 굴뚝

사적 제117호인 경복궁은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로도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경복궁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태조 3년인 1394년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경복궁에는 두 개의 유명한 굴뚝이 있다. 바로 자경전 뒷담에 붙어있는 <보물 제810호인 십장생 굴뚝>과 <보물 제811호인 교태전 뒤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굴뚝만 갖고도, 경복궁의 굴뚝이 얼마나 딴 곳에 비해 아름답게 꾸며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십장생 굴뚝의 안담과 바깥담(아래)

목조건물을 본 단 자경전 십장생 굴뚝

자경전은 현재 그 전각 자체만으로도 보물 제80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 뒤쪽 자미당 터에 조대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자경전 뒷담에 조형한 십장생 굴뚝은 궁궐의 굴뚝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것으로 꼽힌다.

십장생 굴뚝은 담의 한 면을 앞으로 한 단 돌출을 시켜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다. 굴뚝의 전면 중앙에는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였으며,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벽면을 구성하였다. 벽면의 십장생 도판에는 해, 산, 물, 구름, 소나무, 사슴, 거북, 바위, 학, 불로초, 포도, 새, 국화, 대나무, 연꽃 등이다.


이 가운데 해와 거북 등은 장수를 뜻하고, 알이 많이 달린 포도는 자손의 번성을, 박쥐는 부귀를, 나티 불가사리는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기운을 뜻한다. 담장의 윗부분에 마련한 굴뚝의 덮개는 목조 건물의 지붕을 모방하였으며, 꼭대기는 집 모양을 본떠 만든 ‘연가(煙家)’를 10개 올려놓았다.

경복궁 아미산 동산의 굴뚝

보물 제811호인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굴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적인 조형물이다. 아미산은 교태전 뒤에 조성한 인공동산이다. 교태전은 왕비의 침실이 있는 중궁전이다. 이 인공동산에 서 있는 굴뚝은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도를 연결이 되어있다. 이 굴뚝은 처음 경복궁을 지을 때 조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 2년인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한 것이다.

교태전 후원 인공동산인 아미산의 굴뚝 

현재 4개가 남아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육각형으로 굴뚝의 기둥을 마련하였다.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소나무, 매화, 봉황, 국화, 불로초, 바위, 사슴 등을 벽돌로 구워 만든 도판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하나의 후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조형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아미산 동산 굴뚝은 십장생과 사군자, 장수와 길상을 상징하는 무늬 및 악귀를 쫓는다는 상서로운 짐승들을 함께 표현하였다.

아미산 동산의 굴뚝은 우리나라 궁에서 만나는 굴뚝 중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창경궁이나 창덕궁의 굴뚝들이 흙과 백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다면, 경복궁의 굴뚝은 채색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그 외에 경복궁에서 만나는 굴뚝들

경복궁의 연희장소인 경회루 옆에는 수정전이 있다. 현재 수정전이 있는 자리는 세종 때 한글창제의 산실인 집현전이 있던 장소이다. 이 수정궁 벽에는 연가를 세 개씩 올린 담에 붙은 굴뚝이 있다. 이러한 담에 붙은 굴뚝은 경복궁 어디서나 만날 수가 있다. 이러한 굴뚝의 특징은 모두 전벽돌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교태전에서 조금 비켜난 곳에 난 일각문인 선장문 앞에도 아미산 동산의 굴뚝과 외형이 비슷한 사각형의 굴뚝들이 서 있다. 이곳에는 각종 십장생의 문양은 보이지 않고, 평범하게 조성을 하였으나 우직한 것이 장부를 상징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교태전 주변의 굴뚝들은 문 옆이나, 혹은 벽과 벽이 마주하는 곳에도 굴뚝이 자리한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굴뚝을 조형한 것일까? 그것은 굴뚝을 단순히 연기를 배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완전한 독립된 조형물로 인정을 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기에 경복궁 안에는 숨은 굴뚝 찾기를 해도 좋을만한 많은 굴뚝들이 각양각색으로 숨어있다. 아이들과 함께 그것을 찾아내는 재미역시 쏠쏠할 것이란 생각이다.

단순한 굴뚝 하나에도 미학을 담아낸 선조들의 놀라운 예술세계. 지금 우리가 가장 눈여겨보며 기억을 해야 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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