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사람을 만나서 밥이라도 먹으며 담소를 하고자 하면, 딱히 어디로 가야 좋을지 난감할 때가 있다. 전국을 이곳저곳 답사를 할 때는, 더 더욱 먹을 것 때문에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 낯선 곳이라 어느 집이 음식을 맛깔스럽게 하는 집인지, 선뜻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입이 까다롭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적당히 맛이 있어도, 하루 종일 걷고 난 다음 먹는 음식은 꿀맛일 경우가 있다. 워낙 음식의 맛에 대해서는 남들처럼 미식가가 아닌 나이기에, 항상 정해놓고 음식점을 드나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나지만 전국을 다니면서 몇 집은 나름대로 잘 찾아가는 곳들이 있다.


수원 영통의 장수 돌 곱창

수원 인근에서는 나름대로 몇 집의 단골집들이 있다. 음식 맛도 좋으려니와 주인장의 후덕한 마음 씀씀이 때문이다. 언제 찾아가도 항상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집이지만, 늘 살갑게 맞아주는 안 주인장의 따스한 마음이 사람을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수원시 영통구 영통동 1036-4번지에 소재한 ‘장수 돌 곱창’ 집은, 국내산 횡성 한우를 이용해 조리를 하는 곱창집이다. 음식의 종류야 이것저것 몇 가지가 있지만, 내가 즐겨먹는 것은 ‘마늘곱창구이’와 '곱창전골'이다. 불판에 횡성한우 곱창 안에 통마늘을 넣어서 맛을 낸 것인데, 잘 익은 것을 한입 베어 물면 마늘의 향이 입안에 가득차는 것이 좋다.



이 집 마늘곱창구이의 특징은 심한 마늘 냄새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함께 불판 위에 올라오는 대창은, 찧은 마늘을 넣어서 건강에도 좋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랄 수밖에.

몸에 좋고 독성을 해소하는 곱창

곱창이 좋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이다. 『동의보감』에는 곱창의 효능을, 「정력과 기운을 돋우고, 비장과 위를 튼튼히 해준다. 오장을 보호하며, 어지럽증(혈압)을 다스리는 효과가 있다. 당뇨, 술중독, 몸의 독성해소, 장내해독, 이뇨, 피부미용, 피로회복, 골다공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본초강목』에도 「음식의 성질로는 온하다고 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 비위를 보호하고 게우거나 설사하는 것을 멎게하고, 소갈과 수종을 낫게한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곱창에 마늘까지 들어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영통 장수돌곱창 집은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집을 찾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맛도 맛이지만, 주인과 종업원들의 살가운 손님맞이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한다.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집

그래도 전국을 다니면서 꽤 많은 음식을 맛본 나이다. 그런데도 영통 장수돌곱창 집을 찾아가면 늘 기분이 좋다.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하면 더 더욱 편해지는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12월 7일, 오후에 들린 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님들로 북적인다. 그 많은 사람들로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한 사람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이 이집 주인의 심성이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지만, 늘 웃음 띤 얼굴로 맞아준다. 장수돌곱창은 그야말로 사람 사는 정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집이다. 요즈음에는 두 곳에 체인점을 냈다고 한다. 이젠 어엿한 체인망을 갖춘 본점인 셈이다. 부부가 정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젠 체인망까지 갖추는 모양이다. 그도 기분 좋은 일이다.

고단백 저 콜레스테롤 성분인 곱창. 씹는 맛도 일품이지만 술안주로 함께 먹으면, 분해작용이 뛰어나 위벽 등을 보호한다고 한다. 이러한 곱창에 20여 가지의 각종 양념을 첨가해 맛을 더했다. 맛이 고소하고 쫄깃해 씹는 맛이 일품인 수원 장수돌곱창.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을 때 찾아가면 좋을 듯하다. 작은 방도 준비되어 있어, 늘 편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수원지역의 맛집을 소개하라고 한다면, 그 중 몇 안 되는 집 중 한곳으로 늘 추천하는 집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두현리. 전주에서 순창으로 나가는 국도(면 소재지인 원기리를 통과는 도로는 옛 길이다. 지금은 마을 뒤편으로 전용도로가 생겼다)에서 구이면 소재지 방향으로 접어들면, 좌측에 있는 원두현의 마을 안쪽에 정자 하나 자리하고 있다. 원두현은 통천 김씨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마을의 형성 시기는 600년 정도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남계정. 남계 김진이 자시의 호를 따서 세운 정자이다. 남계정 마루에서 내다보면 앞으로 모악산이 지척에 보인다. ‘어머니의 산’이라는 이 모악산을 바라다보면서, 남계 김진은 어떤 생각을 라며 살았을까? 벼슬도 마다한 남계가 이곳을 찾은 까닭은?


고목과 어우러진 남계정, 운치 있어

늦은 가을 날 찾은 남계정. 계단 앞에 느티나무 고목은 이미 앞을 다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나 남계정 앞에 선 작은 산죽들은 푸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남계의 곧은 성격을 알려주는 듯하다. 볼품이 없다고 한다.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따듯한 정자이다, 남계정은 그렇게 모악을 바라다보며 오롯이 자리를 하고 있다.

남계 김진은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남계정이란 작은 정자를 하나를 지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오직 아이들의 교육에만 전념했다는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정자는 그래서 더욱 따스함이 배어있다. 남들은 벼슬을 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벌이는데, 남계정의 주인은 초연히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이런 남계 김진이 바보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 깊은 속을 아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을 듯하다. 남계 김진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다. ‘남계(南溪)’는 그의 호로 자는 ‘이온(李溫)’이며, 본관은 통천이다.

김진의 검소한 성품이 보이는 정자

김진은 조선조 중종 22년인 1527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했다는 김진은 25세에 초급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여 생원이 되었다. 선조 7년인 1574년에는 합천에서 훈도로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오직 학문과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만 정성을 쏟았다.




이 남계정은 김진이 후학을 양성할 목적으로 지은 정자이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스스로 훈장을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이다. 남계정은 선조 13년인 1580년에 처음으로 지었다. 조선조 헌종 14년인 1673년과 1859년에 두 차례 중수를 하였다. 남계정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고목을 비켜 서 계단을 오른다. 정자는 붉은 벽돌로 담을 둘러쌓고, 안으로 들어가는 담장에 걸린 문은 잠겨 있다. 아마 후손들이 정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잠을 통을 채운 듯하다. 정자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있으며, 앞쪽으로는 마루가 연결이 되어있다. 정자 안에는 의병장 조헌과 고경명 등이 김진의 높은 덕을 기리는 글들이 걸려있다.


그저 초야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여생을 받친 남계. 벼슬길도 마다하고 이곳에 들어와 생을 마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악의 정상에 걸린 구름 한 덩이가 세월의 덧없음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잎이 떨어진 고목나무에,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나뭇잎 몇 개가 바람에 흔들린다.

문화재란 참 기묘한 것이란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문화재를 답사할 때는, 가급적이면 철마다 한 번씩 찾아간다. 물론 일부러 철마다 찾아가는 곳도 있으나, 대개는 그 지역을 지나칠 때 들려가는 경우가 많다. 10월 29일 전주에서 ‘오마이뉴스’ 전북지역 시민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곳 가까운 곳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 놓은 경기전이 있다.

경기전은 가을마다 한 번씩은 꼭 들리는 곳이다. 가을경치가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옥마을에는 주말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전 역시 여기저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깊어진 가을의 정취를 느끼려고 북적인다. 경기전 안에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6호인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자리하고 있다.


단풍과 어우러진 문화재, 분위기 정말 좋아

가을에 많은 문화재를 만나기 위해 답사일정을 많이 잡는 것은, 바로 아름다운 주변 경치와 아울리는 문화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함이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철마다 왜 문화재의 모습이 그리 달라져 보이는 것인지. 그렇다고 문화재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문화재 주변의 경치가 달라지는 것이지.

29일 찾아간 경기전의 예종대왕 태실과 비도 마찬가지이다. 딴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주변을 아름답게 수놓은 형형색색의 단풍 때문이란 생각이다. 그냥 볼 때는 조금은 삭막한 석재들이 단풍과 어우러지면,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한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을에는 이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문화재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기도 한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칠 사람들도,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을 보면서 한 번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 주변에 단풍을 심을 수는 없을 테니,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문화재 중에 복을 받았다고나 해야 할까?

태 항아리를 가져간 조선총독부, 좋아할 수 없는 이웃

이웃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난 일본이라는 나라를 한 번도 이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문화재를 답사하는 나로서는 일본은 죽어도 이웃이 될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그 수많은 문화재가 아직도 일본 땅 곳곳에 있다니, 이런 나라를 어떻게 이웃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한 두 사람이 태실의 돌난간에 앉아 사진을 찍는다. 그것마저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라도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홍보를 해주기만 한다면.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안내판이라도 한 번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태실(胎室)’이란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석실에 보관하여 땅에 묻는다. 우리나라의 지명에 ‘태실’ 혹은 ‘태봉’이란 지명은 태를 묻은 곳이란 뜻이다. 예종대왕의 태도 항아리에 담아 놓은 것이다. 원래 이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 현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마을 뒷산에 묻었다가, 영조 10년인 1734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가면서 태실이 파괴되어 구이초등학교 근처에 방치가 된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결국 이 태실 안에는 예종대왕의 태는 없고, 그 태를 감쌌던 석조물과 비만 남은 것이다.



화려하지 않은 태실과 비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는 화려하지 않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조성한 돌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배가 부른 원통형의 돌을 놓고 지붕돌을 올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도탑의 형태이다. 난간은 두 개의 6각형 장대석을 이용해 난간을 둘렀는데, 이음새 부분에는 문양을 한 받침돌을 놓았다.


석비는 태실과 함께 옮겨온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임을 알리는 글귀가 적혀있고, 뒷면에는 비석의 건립연대를 음각하였다. 머릿돌은 뿔이 없는 용의 얼굴과 구름 등을 새겨 넣었다. 앞뒤로 새긴 용은 금방이라도 불을 뿜어날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는 평범하게 조각이 되었다. 다만 거북의 귀갑문을 사용하지 않고, 다채로운 문양으로 꾸민 것이 특이하다.

가을이 되면 문화재도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본질이야 어디로 갈 것인가? 예종대왕의 태실과 비를 보면서, 이 가을에도 미움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 태를 훔쳐다가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이 아름다운 단풍도 그 마음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 같다.


모악산에 자리한 대원사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번지에 소재한다. 대원사는  모악산 동쪽 중턱 어머니 품속 같은 형태에 자리잡고 있으며, 삼국유사 권제3 <보장봉로 보덕이암> 조애는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에 열반종 개산조 보덕의 제자인 대원, 일승, 심정 등의 고승이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조 인종 8년인 1130년에 원명국사 징엄 스님(1090~1141)이 중창 하고, 이어서 공민왕 23년인 1374년에는 나옹 혜근스님(1320~1376)이 중창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태종 15년인 1415년에 중창 흔적의 기록이 있으며, 그 뒤 선조 30년인 1597년의 정유재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선조 39년인 1606년 진묵스님(1562~1633)이 다시 중창하였다.

 

어머니의 절 대원사

 

▲ 벚꽃이 만개한 경내 모악산 대원사 주변에는 수령이 300년 이상이 되었다는 산 벚꽃나무들이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대원사 주변에는 300년 이상 되었다는 산 벚꽃이 둘러쌓고 있어, 봄철에는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으며, 가을이면 온통 불이 타는 듯한 붉은색이 절을 뒤덮는다. 대원사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1월1일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축제와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모악산진달래 화전축제로 이미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고찰이다.

 

모악산 대원사는 어머니 품속 같은 터전에 자리 잡아, 천하대복지 최길상지 명당이라고 한다. 대원사를 어머니의 절, 효의 절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주말과 휴일이 되면 등산객들로 늘 경내가 붐비고 있는 대원사는, 전국 각지에서 예를 갖추고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 창건 1350년의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다.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의 이변

 

▲ 방치된 옛 안내판 문화재를 분실하고 나서 그대로 방치된 목각사자상 안내판

▲ 안내판 목각사자상을 도난 당한 사연을 적은 현 안내판


어느 절이나 사찰에 문화재가 있으면, 그 앞에 문화재 안내판을 설치해 놓는다. 모악산 대원사에는 대웅전에 모셔진 전북 유형문화재 제215호인 삼존불과 전북 유형문화재 제71호인 용각부도가 있다. 그런데 대원사 안내판에 보면 현재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있었음을 적고 있다. 바로 진묵 스님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는 목각사자상이다. 전북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는 목각사자상은 어떤 것일까?

 

대원사 경내 한편에는 예전 목각사자상을 설명한 문화재 안내판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내용을 보니 다음과 같다. 

 

이 목각사자상은 조각한 시기와 조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진묵대사가 만들었다고 하며, 이 위에 북을 올려놓고 가축을 하늘로 인도하는 제사를 지낼 때 북을 쳤다고 한다. 크기는 높이 90cm, 길이 135cm이며 괴목나무로 섬세하게 조각한 사자상이다. 다리는 다른 나무로 만들었으며 현재 다리부분이 약간 떨어져 나갔다. 이 사자상의 등에 경전 등을 올려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위와 같은 설명으로 보아 이 목각사자상은 상당히 소중한 문화재임이 틀림이 없다. 더구나 제를 지낼 때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신물(神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목각사자상은 어디로 간 것일까? 현재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에는 목각사자상이 사라진데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대원사의 문화재인 사자상은 돌아와야

 

 
▲ 도난단한 목각사자상 도난 당한 목각사자상. 뛰어난 조각솜씨를 보이고 있다. 안내판 사진


어떤 연유로 목각사자상이 대원사를 떠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안내문에는 1988년 12월 1일에 도난을 당한 것으로 적고 있다. 그리고 1989년에는 완주군에서 속성으로 문화재지정을 해제했다는 것이다. 문화재가 도난을 당할 경우 해당 부처에서는 문화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빨리 문화재해제를 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그 뒤 목각사자상은 1999년 10월 27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거주하는 이모씨가 소유를 하고 있었는데, 공소시효를 주장했다고 한다. 당시의 문화재법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문화재 지정이 해제돼 있었다. 그리고 이 목각사자상은 다시 종로구 인사동 거주 이 아무개에게 팔렸다는 내용이다.

 

문화재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진묵 스님이 만들었다고 하면 이미 그 제작연대가 500년 가까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원사는 진묵 스님께서 가장 오래 묵으신 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진묵 스님의 체취가 배어있는 고찰이다. 그리고 목각사자상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이 될 만큼 소중한 문화재란 생각이다.

 

문화재법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모악산의 문화재인 목각사자상은 반드시 대원사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대원사 문화재 안내판에는 목각사자상이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었으면, 안내판에 그러한 사연을 기록을 했을까? 어떤 경로를 통해 문화재를 취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목각사자상은 대원사로 돌아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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