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 담벼락부터 안 담벼락까지, 담벼락을 꾸민 방법이 다 다르다. 굴뚝도 일반 가정집과는 전혀 다른 벽돌굴뚝을 조성하였다. 중요민속자료 제136호인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원리의 김기응 가옥. 안채는 19세기 초에, 그리고 나머지는 1900년대를 전후해서 지어졌다는 김기응 가옥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안으로 들어가 보아도, 전통적인 상류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깥담벼락의 꾸밈이 돋보이는 집

 

김기응 가옥은 외벽부터가 남다르다. 솟을 대문을 가운데 두고 양편으로는 행랑채를 마련했는데, 행랑채는 ㄱ 자 형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문을 들어서면 우측 끝에 한 칸을 달아내어, 전체적으로는 한편이 잘라나간 ㄷ 자 형이다.

 

대문 밖의 외벽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 처음 본 꾸밈이다. 돋아 나온 벽은 위로는 붉은 벽돌을 놓고, 그 밑에 수키와를 두 장을 마주 해 원을 만들었다. 그 밑으로는 돌을 쌓아 전체적으로는 3단으로 구분을 하여 문양을 만들었다. 이런 담벼락을 본 적이 없어, 이 집을 지을 때 담장 하나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바깥담벼락 대문 좌우에 마련한 행랑채의 담벼락이 외벽이다. 벽돌과 기와, 돌을 이용해 쌓은 문양이 특이하다.

▲ 행랑채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안마당을 낀 행랑채가 있다. 행랑채의 구성으로 보아 이 집의 살림살이 규모를 알만하다.

 

솟을대문의 우측으로는 쪽문이 나 있다. 충청도 고택의 양반 집을 보면, 대부분이 이렇게 대문이나 중문의 우측으로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하는데, 당시 양반가의 대문 조성을 할 때 유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안마당이 있다. 행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서 우측부터 한 칸의 돌출된 광이 있고, 꺾어져서 광과 헛간, 방, 부엌이 드리고, 대문을 지나면 방과 헛간이 있다. 그리고 담장으로는 연결이 되었지만, 안으로는 떨어진 꺾어진 부분에 한 칸의 헛간을 두고, 세 칸의 광과 방을 드렸다. 김기응 가옥의 특징은 공간 구성을 적절히 이용하여, 집의 분위기를 아름답게 꾸몄다는 점이다. 

 

안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사랑채

 

▲ 사랑채 일각문 사랑채는 안마당을 지나 우측으로 자리했다. 흑담으로 담장을 두르고 일각문을 내었다

▲ 쪽문 사랑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쪽문. 위로는 까치구멍을 내어 마치 행랑채에 붙은 부엌쯤으로 알게 했다.

 

넓은 안마당을 지나면 황토로 쌓은 안담이 있다. 안담은 안채를 들어가는 중문에 붙여 ㄱ 자로 꺾어 일각문을 두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채를 조성하였다. 사랑채는 큰 사랑, 대청, 작은 사랑으로 구성이 되어있지만,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앞을 모두 문을 달아냈다. 이 사랑채의 뒤편으로는 지붕을 달아내 안채로 연결한 통로가 있는 것이 보이는데, 바깥을 담장으로 둘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사랑채의 일각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쪽문이 보인다. 이 쪽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 수가 있다. 이 지역의 고택에서 보이는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을 하는 일반적인 동선이 흐름이다. 그런데 이 쪽문 위로는 까치구멍을 내어, 이것이 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중문채에 붙은 부엌문으로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마 외부인에게 이 문을 알려지는 것을 막자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 굴뚝 사랑채 뒤편의 굴뚝.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사용해 무게를 내고 있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의 사이는 담으로 막아 놓았는데, 그 안에 높은 벽돌 굴뚝을 놓았다. 이 벽돌 굴뚝은 검은 벽돌과 붉은 벽돌을 이용해, 흡사 어느 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형태로 꾸며놓았다.

 

또 다른 형태의 안채 담벼락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 중문을 향하는데, 중문 옆으로 쌓은 담벼락이 바깥 담벼락과는 또 다르다. 중문의 담벼락은 돌출을 시켜 위로는 붉은 벽돌을 6줄을 놓고, 그 밑으로는 돌로 쌓았다. 김기응 가옥의 담벼락은 모두 다르게 조성을 해, 용도를 구분한 듯하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우측으로 네 칸의 광이 있다. 그리고 그 끝을 떨어트려 안채가 시작이 된다.이 광의 문을 보면 일반적인 가옥의 광과는 다른 문을 달아냤다. 광의 문 까지도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아름답게 꾸민 흔적이 보인다.

 

▲ 중문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중문의 담벼락은 또 다른 문양을 조성했다. 집안의 곳곳에 다른 담벼락을 꾸민 것이 이 집의 특징이다.

▲ 중문채 중문에 달린 중문채는 광채로 구성하였다. 광의 문의 꾸밈이 색다르다.

 

안채는 ㄷ 자 형태로 꾸몄는데, 부엌, 안방, 두 칸 대청, 뒷방을 차례로 놓고, 꺾어져서 마루와 건넌방, 부엌을 두었다. 중문을 들어서 안채를 보면 좌측 중문채와 접한 부분에 한 칸의 광을 내었다. 방과 광 사이에는 다락을 위로 두고, 밑으로는 뒤쪽으로 나갈 수 있는 작은 쪽문을 낸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하게 공간 구성을 한 김기응 가옥. 건물마다 특징이 있는 문양을 사용한 담벼락. 그리고 벽돌로 쌓아올려 중후한 감을 주는 굴뚝. 김기응 가옥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 안채 중문을 들어서면 ㄷ 자로 꾸민 안채가 있다.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는 보물 제97호로 지정된 거대한 원풍리 마애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12m 높이의 자연 암벽 가운데 약 6m 정도의 네모 난 크기의 방형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두 구의 불상을 나란히 배치했다. 이렇게 쌍 좌상으로 조각을 한 예나, 자연 암벽에 감실을 조성한 경우는 극히 희귀한 예로 주목받고 있다.

 

연풍에서 충주 방향으로 새로 난 3번 도로를 이용해 나가다가 보면, 조령교를 지나 조령교차로가 나온다. 그곳에서 신풍삼거리 지방도로 내려 3번 도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우측에 내를 끼고, 좌측 계단 위 암벽에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눈이 채 녹지 않았을 때 찾아간 원풍리 마애불 가는 길은 그야말로 엉거주춤한 걸음걸이로 올라야 했다. 쌍 좌상으로 조성된 마애불을 바라보고, 눈이 쌓인 계단을 오르니 염불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마애불 앞에 천막을 치고, 안에서 염불을 하고 있다. 무슨 염원이 있기에, 추운 날 저리도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거대한 마애불 조성 누가한 것은 나옹조사일까?

 

원풍리 마애불은 석가여래와 다보여래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가 설법을 할 때 다보탑과 함께 땅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설법이 참이라고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와 다보여래를 함께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주 불국사에 조성된 석가탑과 다보탑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내용을 상징한다는 이러한 쌍 좌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 예이다.

 

 

 

자연암벽을 움푹하게 파서 자연적인 감실을 만든 것도 그러하지만, 그 안에 돋을새김으로 두 분의 여래와 작은 화불을 조각한 것은 뛰어난 예술품으로 평가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 범어사에 묵고 있던 고승 여상조사가 조성했다고도 하고, 고려 때 나옹선사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인근 지역의 거대마애불의 한 형태로 보아, 고려중기인 12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서 전설에 보이는 나옹선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이름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란 유명한 글을 남기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역사의 격동기를 살았던 분이다. 1320년에 태어나 1376년에 입적한 나옹선사는 공민왕의 왕사이며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여상조사는 신라 말에 범어사에 묵었던 고승이라는 점을 보아도, 원풍리 마애불을 조성한 주인이라고 보기에는 시대가 맞지를 않는다. 과연 누가 이 거대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이여송이 두 부처님의 코를 망가트렸다?

 

감실 안에 조성된 두 분의 여래상을 보면 넓적한 얼굴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번지고 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이 마애불은 가늘고 긴 눈과 큰 입, 평평한 가슴 등 형식화된 면이 많이 보인다. 마모가 되어 알아보기 힘든 광배에는 작은 화불들이 5구씩 조각이 되어있다.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식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현재 어떠한 장식을 한 것인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두 분 마애좌상을 보면 코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 높은 곳에 조성한 마애불의 코가 어떻게 떨어져 있는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 온 중국의 이여송이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그 마애불의 모습이 장사와 같다고 하여 코를 떼어갔다고 한다.

 

 

아마도 이여송은 이 마애불로 인해 주변에 장사라도 태어날 것을 염려했는가 보다. 또 일설에는 인근 마을에서 사는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코를 떼어갔다고 하지만, 그 높은 곳을 올라 코를 떼어갔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다.

 

원풍리 마애불을 보고 내려오면서 도로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니, 자연 바위 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작은 폭포처럼 보인다. 저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에 마애불을 조성한 것도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올려다 본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우는 듯하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많은 얼굴들. 그 온기 없는 얼굴이 오히려 더 따듯하게 느껴진다. 아마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느끼고 싶음인가 보다.

 

괴산의 애한정은 정자 중에서도 그 의미나 경계가 남다른 곳이다. 괴강 삼거리 가까이 있는 애한정은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애한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호위를 하여 그 공으로 별좌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낙향한 박지겸이 광해군 6년인 1614에 지은 정자 겸 아이들을 가르치던 학당이다. 원래의 애한정은 현재의 애한정 앞에 서 있다.

 

 

두 채가 나란히 서 있는 애한정

 

애한정으로 오르다가 보면 현 애한정 앞에 흙 담으로 둘러 친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의집이 있다. 앞으로는 느티나무 보호수들이 둘러친 이 전각이 바로 박지겸이 처음에 지은 애한정이다. 이 구 애한정은 지금은 퇴락하여 여기저기 담에 흙이 떨어져 있다. 애한정을 바라보고 좌측 한 칸은 마루를 만들고, 우측 두 칸은 방을 드렸는데,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연결해 전체를 놓았다.

 


예전 처음으로 지었던 애한정. 주변 느티나무와 어우러져 빼어난 풍취를 자랑하고 있다.

 

위로 오르면 솟을대문이 있는 애한정이 보인다. 솟을대문 앞에는 처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솟을대문과 어우러진다. 솟을대문은 양반가의 대문처럼 우측에 쪽문을 내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자이면서도 하나의 독립된 가옥으로서의 구조를 하고 있는 애한정, 아마 학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런 구조로 정자를 꾸민 것 같다. 솟을대문은 좌측에는 방을 드려 놓았다.  

 

이 새로운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박지겸의 손자인 박연준이 군수 황세구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짓고, 그 후 숙종 38년인 1712년, 숙종 44년인 1718년, 영조 51년인 1775년에 중수를 하였다. 최근에는 1979년에 중수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2칸 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꾸몄다.

 


양반가의 집들처럼 솟을대문 우측에 쪽문을 내었다.

 

 
후일 새롭게 조성을 한 애한정. 정면 6칸으로 꾸며진 애한정은 뒤편 소나무 숲과 어우러져 있다.

 

팔각의 주춧돌을 사용한 정자

 

정자에는 애한정(愛閑亭)이라는 현판이 대청 우측으로 걸려있고, 안에는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등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와 '제애한정기첩후'이다. 그리고 몇 개의 편액이 더 걸려있다.

 

정면 6칸으로 된 애한정은 정자를 바라보면서 좌측의 한 칸은 누정 형태로 높게 꾸몄다. 그리고 앞을 문양으로 내어 마감을 했으며, 방안으로 들어가면 다락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중앙에는 두 칸 대청이 있으며, 우측의 두 칸도 방으로 꾸몄다. 중앙 대청의 앞 창호는 모두 올려서 위로 걸어 놓을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대청에는 박지겸, 송시열 등이 쓴 글의 편액이 걸려있다.


누정과 같은 형태로 만든 끝방은 대청 옆방에서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애한정의 특징은 주춧돌이다. 특이한 형태로 주춧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일석을 이용해 맡에는 사각형으로 조성하고, 그 위를 깎아내어 팔각형으로 만들었다. 양편 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대청과 연결을 하였다.

 


팔각으로 조형된 주축돌. 일석을 이용해 아래는 네모나게 다듬고, 위를 팔각으로 다듬었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애한정

 

애한정은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뒤편으로는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괴강이 흐르고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이 정자 앞으로는 다리를 놓기 위해, 몇 년째 교각 공사를 하고 있다. 정자의 뒤편으로 돌아가니 아직 체 녹지 않은 고드름이 처마 끝에 달려있다. 소나무 숲에서 나는 솔향이 싱그럽다.

 

애한정을 내려 괴강 쪽으로 걸어본다. 주변에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모여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백의로 선조 어가를 모시고 그 어려운 길을 다녀 온 박지겸. 아마 그 마음이 닮아 저렇게 높이 하늘을 바라는 것은 아닌지. 괴강 위로 놓인 다리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시끄럽다. 역사는 그렇게 주변 환경을 바꾸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것인지. 바람 한 점이 몸을 감싸고 계곡으로 달아난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청안면사무소 옆에 자리한 충북 유형문화재 제93호 청안동헌. 처음으로 청안동헌이 세워진 것은 조선조 태종 5년인 1405년이라고 한다. 청안현의 관아로 세워진 청안동한은 일반적인 동헌의 형태와는 다르다. 세월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손을 보고 변형이 된 청안동헌은 여러 가지 구조기법으로 등으로 미루어 볼 때, 19세기 후반의 건물로 추측된다.

 

한편에 방을 드린 구조

 


청안동헌은 현재 청안면사무소 곁에 있어 찾기기 쉽다. 높은 네모꼴 주초를 사용하고 그 위에 둥근기둥을 세웠다. 목재는 소로로 수장한 굴도리를 썼으나, 부연을 달지 않고 보머리에 초가지 장식이 없는 검소한 형태로 꾸며졌다. 이런 모습은 관아건물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지만, 현존하는 유적이 드물어 조선시대 관아건축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앞에서 청안동헌을 바라보면 좌측에 세 칸의 마루를 놓고, 우측에는 두 칸의 방과 반 칸의 다락이 있는 아궁이를 두었다. '안민헌(安民軒)'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청안동헌은  1913년부터 3년간 중수하여 일경(日警)의 청안주재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청안지서장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건물구조가 많이 변형되었던 것을 1981년 복원 수리하였다.

 

현재 청안동헌은 동헌 한 동만 남아있어 과거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원래 관아에는 고을 원이 공무를 보는 동헌, 정당과 익실을 갖춘 객사, 수령이 기거하는 내아와 동헌의 입구인 아문 등이 있어야 하지만, 동헌을 제외한 다른 건물은 모두 남아있지 않다.

 

세칸으로 마루를 깐 대청은 뒤편에는 판자문을 내었다
 

대청의 외벽은 창호로 꾸몄다.

 

방을 네 개로 쪼갠 청안동헌

 

청안동헌의 특징은 우측으로 보이는 방이다. 대청마루에서 방문을 보면 교살불발기 창호로 꾸몄다. 우측의 문을 열면 다시 그 안으로 창호가 있고, 앞으로는 길게 마루를 놓았다. 밖의 창호에서 방을 가로질러 마루를 놓은 것이다. 방문은 밖과 안 모두 세살문으로 꾸몄다. 방은 밖에서 보면 큰 방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방을 네 등분하여 모두 4개의 작은 방이 있다.

 

대청의 뒤편에는 판자문으로 막았고, 측면은 세살문으로 처리해 들어 올릴 수가 있도록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전혀 꾸밈이 없이 검소하다. 아마 당시 이 건물을 지을 때 민가의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측 외벽은 별다른 구조물이 없이 아래 위, 좌우 모두 삼등분을 하여 나무를 가로질렀다.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교살불발기 창호로 꾸며 운치가 있다.
 

방앞에는 툇마루를 놓고, 그 앞에 외문 창호를 달았다.
 

큰 방을 네개로 나누어 작은 방을 만들었다. 여러 용도로 사용하면서 나뉜 것으로 보인다.

 

방을 드린 우측 끝으로는 위로는 다락을 낸 반 칸 정도의 아궁이가 있다. 양편으로 아궁이를 내어 놓은 이 방은 네 개의 방을 덥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루 밑은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해 놓았으나, 현재는 전체를 돌로 막아놓았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일반적으로 어디를 가나 동헌은 그냥 덩그러니 건물만 남아있다. 청안동헌도 예외는 아니다. 토요일에 답사를 간 청안동헌은 청안면의 직원 한분이 여러 가지 설명을 곁들이는 바람에 편하게 답사를 할 수가 있었다. 담을 사이로 있는 청안치안센터 건물 옆에는 커다란 고목이 한 그루 서 있어, 청안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방 옆에는 반칸 정도의 한데 아궁이를 놓고, 외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불이 타 위를 잘랐다는 나무. 청안동헌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고목은 밑동만 남아있고 잘려진 가지에 새 가지가 돋아나 있다. 안내를 하신 분의 이야기로는 이 나무가 불에 타 위를 잘랐다는 것이다. 그 옆에 있는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도 오래 묵은 역사의 나무란다.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청안동헌. 문을 바른 창호지는 찢고간다는 사람들. 도대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곁에 면사무소인데도 훼손을 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막아내기란 버겁다는 것이다. 언제나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려는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당연히 괴산군이라는 생각이다. 괴산군의 문화재 중 몇 기의 탑들은 원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것을, 주민들이 찾아내 복원을 시킨 것이다. 그 중 한 기가 괴산군 청안면 효근리에 소재한, 보물 제1299호로 지정이 된 보안사 삼층석탑이다.

 

보안사 3층 석탑은 옛 보안사 경내의 북쪽 담장 곁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57년 주민들이 찾아내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이 보안사 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마도 이 탑에는 마을과 관계된 이야기라도 전하는 모양이다. 주민들의 힘으로 복원을 했다는 것이 참 고맙기만 하다.

 

 

자연석인 암반을 지대석으로 이용하였다. 바위의 윗면을 네모나게 홈을 판 후 그 위에 탑을 조성하였다

 

자연석으로 지대석을 삼은 보안사 석탑

 

보안사 삼층석탑은 여느 탑과는 다른 면이 있다. 지대석을 가공한 돌로 사용한 것이 아니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자연석의 중심부에 네모나게 홈을 내어 그 위에 단층 기단을 세웠다. 기단은 4면에서 면석을 합하여 단층 기단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자연석을 이용한 지대석은 4각형이지만 한 쪽 면은 각이 없다. 지대석은 위만 지면으로 솟아오른 형태이고, 나머지는 모두 땅에 묻혀있어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동쪽면의 상단부가 깨어져 있으며, 기단부 면석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많은 금이 가 있다.

 

보물인 보안사 삼층석탑은 여기저기 많이 파손이 되었다

 

인근에 있는 보안사 경내를 벗어나 도로변으로 나오다가, 좌측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이 느티나무 옆에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현재는 집의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다.

 

탑신부에 조성한 작은 감실

 

전체높이 325cm 정도의 이 삼층석탑은 기단 면석에는 양우주를 모각하고, 별도의 조형이 없는 사각형의 갑석을 올려놓았다. 그 위에 삼층의 탑을 조성하였는데, 이 탑의 몸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그저 밋밋한 사각형의 돌을 올려놓았으며, 다만 일층 몸돌에 감실이 있을 뿐이다.

 

 

 

보안사 삼층 석탑 일층의 탑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12☓9cm 정도의 방형 감실이 조성되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 3층의 몸돌은 급격히 작아졌으며, 옥개석은 둔하게 조성되어 있다. 낙수면은 급하게 떨어지며 일층 옥개받침은 3단, 2,·3층의 옥개받침은 2단이다.

 

탑을 조성한 양식 등으로 보면 이 석탑은 고려 후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탑신부에 감실이 조형된 형태는 특히 충북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상륜부는 노반석 만이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각 면이 많이 닳아진 모습이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복원한 보물 석탑

 

마을의 주민들이 흩어져 있던 것을 보아 복원을 하였다는 보안사 삼층석탑. 석탑을 보호하는 보호철책 안에는 술병이 놓여있고, 감실이 있는 일층 몸돌 앞에는 정화수 그릇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이곳에서 치성을 드렸나 보다. 비록 둔탁한 형태로 보존이 되어 있고 많이 훼손이 되었지만, 보물로 지정 될 만큼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어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주민들의 정성이 깃들어 주변에 흩어진 것을 모아 복원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짝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마을사람들의 뜻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보안사 삼층석탑은 우리에게 한 마디 거드름을 피우는 것만 같다.

 

“나, 이래도 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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