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방청이란 조선시대 관아에서 치안업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이 묵던 곳이다. 부여군 홍산면에 소재한 홍산현 동헌과 형방청,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홍산객사와 더불어 20077월 사적 제481호로 지정이 되었다. 홍산현은 백제시대에는 대산현이었다.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가, 조선조 태종 때 홍산현이 되었다.

 

홍산현 관아를 찾아가 중층 누각으로 지은 정문을 살펴보니, 문이 열려있다. 원래 이 관아의 건물은 부소산성으로 옮겨 영월루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관아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충남 유형문화재 제178호로 지정이 된 홍산형방청이 자리한다. 이 건물을 <이정우 가옥>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홍산형방청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정우 가옥을 몰라?

 

현재 홍산형방청이 왜 이정우가옥이라고 불리는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한때 이 집에서 이정우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부여군의 문화재 안내에는 이정우가옥인 형방청이 <충남 부여군 홍산면 북촌리 183-1>에 소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방청의 관아건물 말고, 또 다른 가옥이 있는 것인지.

 

홍산면에 들려 북촌리를 향했다. 이정우가옥이 있다는 곳을 찾아 아무리 둘러보고,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그런 집은 모른다는 대답이다.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장님 댁을 찾아 물어도 그런 집은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한 일도 있다. 할 수 없이 집을 찾는 것을 포기를 하고 홍산 동헌으로 발길을 돌렸다.

 

 

홍산 동헌이 있는 곳은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 187번지>이다. 그런데 이곳을 가니, 관아 앞에 안내판이 있고, 관아 건물 한 편에 이정우가옥이라는 집이 보인다. 어떻게 한 관아 안에 있는 건물이 남촌과 북촌으로 갈라질 수가 있을까? 막상 그렇게 찾으려고 돌아다닌 집을 찾고 보니 허탈감이 든다.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들이 묵던 형방청

 

이정우가옥은 조선시대 홍산현의 관아 건물 중의 하나인 형방청(刑房廳)’이다. 현재는 홍산형방청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은 고종 8년인 1871년 고쳐 지은 민가풍의 목조건물이다. 당시의 현액명은 비홍추청이라고 불렀단다. 10칸 크기의 자형 동향집으로, 중앙 대청과 남쪽 날개채는 마루를 깔았었다. 북쪽 안채에는 한 칸짜리 온돌방 2개를 들였다.

 

 

형방청은 자연석 주춧돌에 몸채는 정면 5, 측면 2칸으로 구성하였고, 좌우 날개채는 정면 2, 측면 1칸으로 꾸몄다. 몸채의 지붕 용마루를 좌우 날개채보다 높게 놓았다. 몸채의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아 대청으로 꾸미고, 측면에는 부엌을 두었다. , 우측의 날개채에는 현재는 각각 2개의 방을 드렸다.

 

형방청은 팔작지붕으로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이다. 조선시대 관아건물 중 형방청은 그 예가 희소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많은 관아 건물 중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 있었던 것도, 사람이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형방청은 건물연대, 중수기록, 형태 등이 온전히 남아있어, 조선시대 관아건물의 일면을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자 건물 한 동에 다양한 쓰임새가 돋보여

 

이정우가옥이라고 불렀던 홍산형방청은 단 한 동의 건물이지만, 그 쓰임새가 다양하다. 몸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좌측에 딸린 날개채는 밖으로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부엌이 딸려있다. 아마도 이 좌측 날개채를 사랑의 용도로 사용하였던 것 같다. 몸채 우측의 날개채는 두 칸을 방으로 들였으며, 끝 방의 밖으로는 다락이 돌출되어 있다.

 

몸채와 우측 날개채의 앞으로는 좁은 툇마루를 놓았다. 좌측 날개채의 툇마루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곳은 문을 내어, 출입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부엌문은 양편으로 내어 환기를 돕고, 몸채로 출입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한 동의 건물을 이렇게 용도가 다양하게 꾸민 집은 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곳에서 생활을 하던 관리들의 편의를 생각해서인지.

 

 

많은 고택을 돌아보았지만, 홍산형방청과 같은 구조라면, 이 집 한 채만 갖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가 있을 것만 같다. 어렵게 찾아다닌 때문인지, 형방청의 이모저모가 눈에 들어온다. 좁지만 용도가 다양한 홍산형방청. 보존상태도 양호하기에 더욱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응청각은 원래부터 청풍 한벽루의 좌측에 자리하고 있었던 전각이다. 지금도 제천청풍문화재단지 안 한벽루의 좌측에 예전 그대로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응청각의 용도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인조 15년인 1637년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아, 이 응청각이 한벽루 옆의 있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응청각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관수당이라는 당호가 붙어있다. 일반적으로 당이라고 하면 누정의 효과를 나타내는, 관아 안의 건물 등에 많이 붙이는 명칭이다. 물을 바라보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수당(觀水堂)은 아마 당시에도 이 건물이 물가에 서 있었음을 알게 한다.

 

 

관수당의 당호가 주는 의미

 

관수당이라고 전각의 뒤편에 붙인 현판으로 보아, 이 건물은 관아의 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누정의 형태를 보면 누(樓), 정(亭), 대(臺), 당(堂), 제(齊), 헌(軒) 등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들어서 이 이름이 모두 혼용이 되어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명칭에 따라 용도가 다 다르다.

 

우선 '누'란 밑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이층의 전각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정'이란 공간이 없이 단층으로 되어있는 경우이다. 간혹 주추를 높여 밑으로 공간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거기에 비해 '대'란 관아에 속해있는 정자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한다. '제'는 향교나 서원 등의 기숙을 할 수 있는 집이며, '헌'은 원래 왕실의 가족들이 묵는 공간에 붙이는 이름이다.

 

 

 

이외에도 '합(閤)'과 '각(閣)'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당'은 여러 사람이 집회를 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말한다. 흔히 '서당'이란 배우는 학동들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이런 용도로 볼 때 '관수당'이란 물가에 서 있는 청풍현의 관아 중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도 하고, 묵을 수도 있는 정자 건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래층을 벽으로 막은 응청각

 

응청각은 일반적인 전각과는 달리 아래층을 석축벽으로 막았다. 토석을 섞어 아래를 둘렀으며, 한편은 트여놓았다. 아마 그곳은 기물 등을 둘 수 있는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층은 나무로 만든 목조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층의 둘레는 난간을 둘렀다. 응청각이 언제 지어졌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조선조 명조 초에 이황(1501 ~ 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 기록으로 보면 응청각은 500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응청각. 이층은 계단을 올라 문을 열면 마루방이고, 문을 지나면 온돌로 놓여있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기둥을 세우고 그 틈을 모두 돌과 황토를 섞어 발랐는데, 중간부분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보인다. 구멍을 들여다보면 위로 비스듬히 뚫려있다. 아마 이곳이 방에 창불을 때는 곳은 아니었을까?

 

일반적인 전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지어진 응청각.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의아한 곳이 많은 집이다. 그래서 이런 집을 돌아볼 때는, 더 많은 상상을 할 수 있어 즐겁지만.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55번지에 소재한 사적 제346호 ‘무장현 관아와 읍성’. 몇 번이고 찾아가고 싶었던 길을 번번이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고창군 답사를 서너 번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곳까지 갈 수가 없었다. 답사 중 날이 저물어서이다. 지난 9월 4일 마음을 먹고 찾아간 무장읍성.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무장읍성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무장읍성은 1991년 2월 21일에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 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4km 정도이며 넓이는 43,847평이다.


토성과 석성으로 쌓은 무장읍성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흙과 돌을 섞어 축조하였다고 하는 무장읍성. 성내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 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여기저기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느라 파헤쳐진 무장읍성. 진무루를 지나 객사를 거쳐 뒤편에 있는 동헌건물인 취백당으로 향한다.

만 4개월 동안 2만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을 하였다는 무장읍성의 동헌. 동헌은 관아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로, 당시 무장현감이 집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에 세웠으며 한때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하기도 하여 변형이 된 것을, 1989년 원형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무장동헌은 멀리서 보아도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팔작 지붕으로 지은 동헌 건물은 겹처마로 구성해, 전체적으로는 장중한 느낌을 주는 조선시대 건축물이다.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헌 취백당

무장읍성의 동헌건물은 객사 뒤편에 자리한다. 동헌 뒤편으로는 토성으로 쌓은 성이 있으며, 동한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줄 지어 서 있어, 무장읍성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동헌을 찾았을 때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어,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정면 6칸인 동헌 건물의 중앙에는 <취백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아무리 동헌 건물이라고는 하지만, 넘치는 취흥을 이기지 못해 붙인 이름인가 보다. 대청 안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있는데, 그 중에는 최집의 취백당기를 비롯해 김하연의 찰미루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의 동헌시, 이덕형의 동헌시,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백정시가 보인다.

이런 시판으로 보아 동헌을 동백정이라고도 불렀는가보다. 무장은 무송과 장사를 합한 고을이라 하여 동헌 이름을 ‘송사(松沙)’라 하였는데, 영조 때 최집이 부임을 해와 ‘취백(翠白)’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중한 느낌을 주는 취백당

단 한 동의 건물이 사람에게 주는 느낌이 이리 장중할 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아마도 뒤편에 있는 토성이나, 주변에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 끝이 살아있는 듯하다. 아래는 넓고 위가 좁게 마련한 주초위에는 두리기둥을 사용하였다.




그러고 보니 두리기둥의 길이가 길어 건물 전체가 장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대청은 세 칸으로 마련하였으며 뒤편에는 판문을 달아냈다. 건물을 바라보며 좌측은 두 칸의 방을 한 칸 뒤로 밀어서 드렸으며, 우측은 마루 끝까지 방을 드렸다. 우측방은 따듯하게, 좌측 방은 시원하게 계절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뒤편전체를 복도마루로 마련한 것도 취백당의 특징이다. 아무래도 뒤편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단 한 동의 건물이면서도 장중함을 느끼게 하는 취백당. 그 이름 속에는 솔처럼 푸른 기상을 지니고, 힌 모래처럼 그렇게 민초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고고함을 지키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취백당은 45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켜오면서, 늘 푸른하늘을 동경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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