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10월 17일 김제 모악산 금산사에 개산대제가 열리는 날이다. 개산대제란 금산사가 처음으로 문을 연 날을 말한다. 절을 ‘산문’이라고 한다. 개산대제는 바로 절문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뜻이 된다. 금산사의 개창일이 되는 셈이다.

금산사는 조선 성종 23년인 1492년에 작성된 <금산사 5층 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금산사는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가섭불 때에 있었던 옛 절터를 다시 중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이 오래 전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진표율사는 중건자로 보아야 한다.

금산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중창자이지 창건주는 아니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기록에 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순제법사’에게 출가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진표율사 이전에 이미 금산사가 창건되었음을 알게 한다.



이날 금산사에 모인 인파는 5,000명 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절집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금산사 개산대제에는 언제나 그 정도의 인원이 모여, 부처님의 도량이 문을 열었음을 축하하는 것이다. 금산사 개산대제의 이모저모를 둘러본다.


개산대제를 거행하는 기념식장에는 외국인들도 보인다. 종교에는 벽이 없어서인지, 파란 눈의 외국인들도 개량한복을 똑같이 차려입고 많은 사람들이 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행사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죽장자를 짚은 전 조계종 총무원장이신 월주 대종사께서 현 금산사 주지 원행스님과 많은 인파를 대동하고 식장으로 입장을 하고 계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차를 받치고 입장을 한다. 그 뒤로는  쌀, 향, 꽃, 등, 과일, 차 등 공양물을 부처에 바치는 의식인 육법공양물을 손에 든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육법(六法)'이란 깨달음과 관련된 6가지 공양에 정신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이다.

(1)등(보시) - 지혜의 등불이다. 등은 세상을 밝히는 광명 지혜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2)향(지계) - 해탈의 향기이다. 향은 가려진 곳에도 향기를 두루 나눠 주는 공덕이 있다.
(3)꽃(인욕) - 보살 행의 아름다움이다. 열매가 맺기 위해서는
먼저 꽃을 피워야 한다.
(4)과일(정진) - 깨달음의 열매이다. 지극히 바른 도로써 성취 하겠다는 정진을 표현한다
(5)차(선정) -열반의 맛을 의미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차는 보통 차가 아니라 '감로차(甘露茶)'이다.
(6)쌀(지혜) - 깨달음의 기쁨이다. 봄부터 수많은 노력을 한 후
가을에 추수할 때의 기쁨을 상징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부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월주 대종사의 개산대제를 기념하는 법문으로 이어진다. 특히 이 날은 만등불사와 불자들이 법명을 받고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보살계'가 함께 이루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했다.

농촌에서는 곡식이나 과일이 익어갈 때가 되면, 골치 아픈 것들이 바로 새떼들이다. 곡식의 낱알은 물론 과일까지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적게는 몇 마리, 많게는 수십마리 씩 떼를 지어 날아다니면서, 농작물에 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떼를 막기위해 하수아비를 논에 세워보기도 하지만, 역부족일 때가 많다고 한다.

이제는 새떼들도 그만큼 머리가 좋아진 것인지, 도대체 하수아비를 무서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느 분은 새들이 허수아비 머리 위에 앉아있더라면서 웃음을 흘리시기도 한다. 이런 새떼를 쫒아내기 위해 방포를 쏘기도 하고, 깡통을 철사에 매달아 소리를 내기도 한다. 또는 허수아비를 같은 연을 줄에 매달아, 논을 가로질러 줄을 매 바람에 돌아다니게도 한다.


짚으로 만든 탈구를 말앗을 때(위)와 풀었을 때

새를 쫒는 짚공예품 '탈구'

농촌에서는 아무래도 이런저런 것을 만들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 시간적 여유를 갖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를 해낸 것이, 바로 짚으로 꼬아 만든 탈구이다. 탈구는 짚을 머리를 땋듯이 따아 만든다. 길이는 4~5m 정도에, 손잡이 쪽은 두텁고 끝은 뾰죽하고 가늘게 꼬아 나간다. 탈구는 밤 시간을 이용해 새끼를 꼬면서 만들 수가 있어, 시간을 별도로 낼 필요가 없다는 점이 이 탈구를 만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탈구를 만들면 손잡이를 잡고 머리 위로 줄을 돌리다가, 손잡이 부분에 힘을 주어 줄을 꺾는다. 그러면 "탕"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 새들이 놀라 달아난다는 것이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만들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농촌에서 많이 사용을 한 새를 쫒는 도구의 하나이다. 

탈구의 시연





  
탈구를 길게 뻗쳐 힘을 주어 위로 끌어 올린다.(맨위) 줄을 머리 위로 올려 힘을 가한다(두번 째) 줄을 가슴 높이로 수평이 되게하여 힘을 많이 받게 한다(세번 째) 손목에 힘을 주어 줄을 낚아채듯이 꺾는다(네번 째) 그러면 탕소리와 함께 줄이 떨어진다(맨 아래)

이렇게 시골에서 흔히 쓰이는 짚을 이용해 만들어 사용하는 탈구는, 우리 생활속에서 얻어지는 지혜이다. 지금은 볼 수가 없는 것이지만. 우리 선조들의 지혜의 깊이에 그저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다.

“자 야채 장사가 왔습니다. 과일 장사가 왔습니다. 빨리들 나오세요. 야채들 사가세요. 과일들 사가세요”

차에 야채와 과일을 싣고 다니면서 파는 야채장수가, 사무실 앞에 차를 대고 스피커의 볼륨을 높인다. 사무실이 있는 곳 주변에 예전에는 상가이고 주변에 식당과 주거지역까지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야 하는 장사꾼들의 소리이다.

“알 타리 무 한 다발에 4,000원, 두 다발에 7,000원입니다. 대파 한 다발에 7,000원입니다. 귤 한 상자에 10,000원, 4kg 1관에는 4,000원입니다. 싸고 맛이 없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야.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니겠지. 장사꾼이 장사를 하면서 싸고 맛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들어보아도 같은 이야기다. ‘싸고 맛이 없다’는 설명이다.

오늘(11월 18일) 낮 사무실 앞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야채장수

정말 맛이 없는 것일까?

과연 그 장사꾼의 이야기대로 귤이 맛이 없는 것일까? 사람들이 야채를 사러 나왔다가 그 말이 이상한지 물어본다.

“아저씨, 정말 귤이 싸고 맛이 없어요?”
“예”
“그래도 그렇지. 장사하시는 분이 맛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아뇨. 정말로 맛이 없어요.”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장사꾼이다. 맛이 없어도 있다고 해야 할 텐데, 맛이 없다고 방송을 하고 다니니 누가 그 물건을 살 것인가? 정말로 양심적인 것인지, 아니면 장삿속으로 그러는 것인지 구별이 가질 않는다. 한참이나 그렇게 방송을 해대더니 몇 사람에게 물건을 판다. 아마 그들도 양심적이란 생각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장사꾼의 양심에 한 수 배우다


하도 이상해서 직접 물어보았다. 도대체 물건을 파시는 분이 어째서 ‘맛이 없다’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인지.

“‘맛이 있다’라고 하고 팔았는데 맛이 그렇게 좋지가 않으면, 물건을 사신 분들 기분이 어떻겠어요. 차라리 맛이 조금 덜 하니까 ‘맛이 없다’라고 말씀을 드려야지”
“그렇게 장사를 하셔도 사 가시기는 하시나요?”
“사시고 안 사시고는 사시는 분 마음이죠. 그래도 값이 싸니까 사 가시는 분들이 꽤있어요”
“그분들이 나중에 무엇이라고 안 하시나요?”
“하하... 그 분들이 꽤 드실 만 하다고 하시죠.”

장사를 하는 사람은 그 물건이 어느 정도인지, 맛은 어떤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속여가면서 장사를 하고 싶지가 않다는 것. 이렇게 거리를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하는 장사꾼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양심적이다’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속이면서까지 팔아버린다면, 스스로 구덩이를 파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장사꾼이 자신을 속이는 것보다 나쁜 것은 없죠.”

뒤통수가 띵하다. 오히려 그런 장사꾼의 진정한 마음을 의심한 내가 부끄럽다. 벌겋게 낯이 달아오른다. 모든 것을 의심부터 하는 이 버릇을 얼른 고쳐야겠단 생각이다. 아직도 세상엔 양심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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