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산27번지 내동 안골마을에는 햇골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다. 이 산 기슭에서 약30m되는 중턱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는, 동쪽을 향해 바라다보이는 곳에 보물 제1401호인 봉황리마애불상군이 자리하고 있다. 5년 전에 찾아깄을 때는 보수 공사중이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뒤돌아 섰던 곳이다.

 

지난 48일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말끔히 정비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암벽의 높이 약 1.7m 정도 너비 5m 정도 되는 넓다란 바위암벽에 일렬로 불좌상 1구와 공양상, 반가상을 중심으로 5구의 보살상 등 모두 8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마애불상군의 형태는 육안으로 쉽게 판별이 되지 않는다.

 

 

마애여래불과 화불을 알현하다

 

삼국시대 마애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 보이고 있는 이 불상군은 육안으로 정확히 식별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만큼 많이 훼손이 되어있다. 암벽의 석질이 약한 것인지 곳곳에 균열이 가고,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상군은 정확한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옆에 자세한 설명을 한 그림이라도 한 장 붙여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곳 마애불상군으로부터 남쪽으로 벼랑을 따라 50m쯤 가면, 또 하나의 마애여래좌상이 동쪽을 향한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높이 3.5m, 8m의 바위면에, 높이 2m정도 되게 돋을새김한 주존불인 마애여래좌상은 상호가 원만하고 어깨가 당당하다. 무릎도 큼직하게 표현을 해 안정감이 있고, 전체적으로 고식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의 두광에는 높이 34cm 정도의 화불 5구가 둘러서 조각이 되어있어 돋보인다. 앞으로는 한강의 지류인 큰 내가 흐르고 있어,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이곳에서는 목조 가구의 흔적과 와편과 자기편 등이 발견이 되어, 어느 시기엔가 이곳에 전각을 세운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전파되다

 

이 봉황리 마애불상군이 자리한 위치의 선택은, 강을 따라 조형문화의 전파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가치가 높다. 봉황리 마애불상군은 1978121일에 발견된 것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433일 보물 제1401호로 조정이 되었다.

 

 

현재는 마애불상군이 있는 암벽으로 오르는 철계단을 조성하여 놓았다. 계단을 올라 먼저 만날 수 있는 마애불상군은 비바람에 의한 마멸로 윤곽이 뚜렷하지 않다. 각각의 크기는 1m 안팎의 이 불상군은, 공양상에서 보이는 고리장식과 띠 등은 삼국시대 마애불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이 마애불상들은 많은 마애불상 중 비교적 초기의 예로,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역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지정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성이 되었다. 이 마애불상군은 신라시대 불상조각의 흐름은 물론 고구려 불상의 경향까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강을 따라 조형문화가 발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한강변에도 창동 마애불이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며 절벽에 조각이 되어 있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낙동강 정비사업 때 훼손이 된 마애불의 경우도, 불교의 조형미술이 강을 따라 발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강변에 위치한 문화재들을 좀 더 심도있게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에 소재한 봉암사 경내, 대웅보전 곁에는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이 전각 안에는 국보 재315호 지증대사탑비와,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인 881년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탑의 명칭을 ‘지증대사 적조탑’이라 부르는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온전한 지붕돌의 섬세한 꾸밈

8각으로 꾸며진 지붕돌은 아래에 서까래를 두 겹으로 표현한, 겹처마 지붕으로 아름답다. 서까래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한 지붕돌의 처마는 살짝 들려 있다. 낙수면의 각 모서리 선은 굵직하고, 끝에는 귀꽃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앞뒤의 양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아마도 이 탑이 지증대사의 사리를 보관한 탑이기 때문에 이런 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킨다는 사천왕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조각들이 지증대사 탑의 전체에 고르게 표현이 되어있다. 전국에 수많은 사리탑을 둘러보았지만, 이처럼 화려하게 장식을 한 탑은 그리 흔치가 않다. 위서부터 아래 기단까지 고르게 조각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많은 조각이 어우러진 탑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으로 꾸며졌다. 밑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위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금방이라도 탑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윗단에는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천상의 새라는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무릎을 굽힌 천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공양을 드리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조각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꾸며져 탑의 조형이 남다름을 알 수가 있다.

정녕 사람이 만든 탑일까?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고이기 위한 고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한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어울리는 지증대사 적조탑. 안정감이 있게 조형이 된 탑의 옆에 세워진 비문의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 헌강왕 9년인 88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는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 수행 중인 스님들께 자장을 해 드리기 위해 7월 6일에 찾아간 봉 옛 고찰. 그곳에서 만난 지증대사탑의 모습은 한참이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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