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20에 소재한 태안사. 태안사는 『동리산태안사사적(桐裏山泰安寺事蹟)』에 의하면, 경덕왕 원년인 742년 2월에 이름 모를 스님 세 분이 세웠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광자대사가 절을 크게 늘려 지었는데, 이 때 절의 규모는 총 40여 동에 110칸이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 고종 10년인 1223년에는 당시 집권자인 최우가 고쳐지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숙종 10년인 1684년에 주지 각현이 창고를 새로 지었다는 기록 등이 보이고 있다. 태안사는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렇게 거대사찰인 태안사는 한국전쟁 때 전각 모두가 소실이 되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인 일주문과 능파각만이 남았다고 한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한 고찰 태안사. 절 입구에 세워진 일주문은 전남 유형문화재 제83호이다. 현판에는 '동리산 태안사'라고 적었다

곡성으로 발길을 옮기다

2월 26일 토요일 오후,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온다고 하더니 날씨만 좋다. 오랜만에 두꺼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들이하듯 답사 길에 올랐다. 그동안 몇 번이고 찾아가려고 예정을 잡았던, 곡성군 죽곡면에 소재하는 신라 때 창건 된 고찰 태안사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곡성읍에서 태안사까지는 승용차로 30분 정도가 소요가 된다. 오후시간에 출발을 했으니 마음이 조급하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맡아보는 봄 냄새를 즐기기로 했다.

태안사 매표소에서 태안사까지는 2km 정도의 비포장 길이다.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가보면, 태안사 입구 계곡 위에 걸린 능파각을 만나게 된다. 계곡 중간에 그늘진 곳에는 얼음이 채 녹지 않았다. 헌데 계곡에는 시뻘건 흙탕물이 흐르고, 연신 커다란 트럭들이 드나들고 있다. 태안사 입구 계곡을 정비하는 모양이다.



일주문 안 쪽 굵은 기둥 윗부분에는 양편에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굵은 기둥 양편에는 보조기둥을 세웠다

한국전쟁을 피해간 일주문

능파각을 지나 200m 정도를 올라가면 태안사의 일주문을 만나게 된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일주문. 몇 사람인가가 답사를 나온 듯, 일주문 곁에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절 입구에 세워놓는 일주문은, 속세와 불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의식적인 상징물이다.

한국전쟁 때 태안사의 그 많던 전각들이 다 소실이 되고, 계곡 위에 걸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2호인 능파각과 이 일주문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일주문을 바라보는 마음이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맞배지붕으로 꾸민 일주문에는, ‘동리산태안사 (桐裏山泰安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주문 안에 조각된 다포식으로 된 공포

우선 안내판에서 일주문에 대한 설명을 읽어본다. 항상 어느 문화재를 만나든지, 먼저 안내판부터 살펴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래야 그 문화재가 갖고 있는 특성이나, 어느 것을 중점적으로 살펴야 하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일주문은 연못을 끼고 돌아 계단을 오르면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요즈음 절을 들어가다가 보면 위압적인 일주문들을 볼 수 있는데, 태안사의 일주문은 그저 산으로 오르는 작은 소로를 막아 경계를 삼았다. 그렇기에 장엄하지도 않고, 거대하지도 않다. 어느 고택의 일각문보다 조금 더 크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일주문은 조선조 숙종 9년인 1683년에 각현대사가 다시 지은 후, 영월선사가 중수하였다. 그 뒤에도 1917년과 1980년에 보수를 하였다고 한다. 일주문을 처음 볼 때는 너무 작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렇게 큰 규모의 태안사였다는데, 너무나 초라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일주문은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두 개의 굵은 기둥 위에, 정면 한 칸의 규모로 되었다. 기둥에는 양쪽 모두 앞뒤로 보조기둥을 세워서 무게를 분배하였다.


사람을 겉만 보고는 모른다고 했던가? 태안사 일주문을 올려다보고,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음에 부끄럽다. 처마를 받치는 장식인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있는 다포식이다. 이 작은 일주문 안에 숨겨진 화려함. 앞, 뒷면의 기둥 사이에는 3구씩, 옆면에는 1구씩 공포를 배치하여 전후좌우가 포로 꽉 찬 느낌이다.

양서로 된 살미첨차들로 내외 사출목의 공포를 짜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이고 있다. 그 작은 일주문 안에 이렇게 화려함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 내부의 천장 아래에는 용의 머리를 양편에 조각하여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그 안에 청룡과 황룡이 마주하고, 속세에 찌든 사람들의 몸을 정결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절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모은다. 작은 것을 보고 잠시라도 헛된 마음을 먹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두 손의 모음이다.


대낮에 길을 가다가 용을 만난다면, 그 기분은 어떠할까?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은 혹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답사 중에 도로에서 용을 만났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용을. 백주 대낮에 용이라니. 도로 옆으로는 보성강이 흐르고 있으니 강물 속에서 솟아나와, 승천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있는 태안사 답사를 마치고, 18번 도로를 따라 오산면 가곡리 오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이다. 18번 도로는 좌측으로 보성강을 끼고 도로가 이어진다. 그런데 저만큼 이상한 바위가 서 있다. 흡사 용과 같은 모습이다. 왜 이곳에 이렇게 돌을 쌓아 용처럼 만든 것일까?


돌을 쌓아 만든 ‘석룡(石龍)’

곡성군 죽곡면 남양리. 마을입구로 들어가기 전 좌측으로 운동장이 있고, 그 운동장 입구에 돌을 쌓아 용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새머리 형상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돌을 쌓아 놓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뿔이 나 있고 입에는 여의주도 물고 있다. 왜 이곳에 이런 용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흡사 강물에서 나온 용이 승천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길가로 머리를 들고 있는 돌로 만든 용의 형상을 찍으려다가, 그 뒤를 보고는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용의 꼬리가 뒤편 보성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돌담으로 용꼬리를 만들어 길게 늘어놓았다. 그것도 뒤로 갈수록 담이 좁아지면서, 완연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보니, 머리를 들고 승천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다.



돌을 쌓아만든 석룡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위) 뒤편으로 꼬리가 보인다(가운데, 아래)

와룡체육공원의 상징, 용의 형상

와룡체육공원은 곡성군 죽곡면 남양리 마을길 조금 전에 있다. 남양리는 양동과 박용동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마을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하여 남향동이라 하였단다. 이것이 변하여 남양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박용동은 6.25당시 남양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왜 와룡체육공원이 들어섰는가는 자세히 알아보지를 못했다.

하지만 용머리는 남양리를 향하고 있고 용의 꼬리는 뒤편 보성강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니, 그야말로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아마도 남양리에 걸출한 인물이 난다면, 후세 사람들은 이 돌을 쌓아 만든 ‘석룡(石龍)’의 기운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까? 설화라도 한마디 나올법한 광경이다.


석룡은 와룡체육공원을 상징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돌담이 꼬리가 된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이런 재미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저 지나치면 그만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다닌다면 그저 돌이 쌓였는가보다 하고 지나칠 것이다. 사물을 보고 훌쩍 그 앞을 지나칠 수 없음은, 답사에서 꼼꼼히 따지는 습관이 들어서인지. 2월 26일 토요일 오후, 답사 길이 괜히 즐거워진다. 다음에 이 길을 지날 때는, 돌로 용을 만든 사연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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